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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2:44:02 조회 : 196         
   십자가와 부활 20072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십자가와 부활(빌립보서 3:10-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YqcyWlwMSI, Hit:31
 이근호 20-07-26 13:28 
십자가와 부활

2020년 7월 26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3:10-12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사도의 관점은 자신의 구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구원에 이 세상 실제성의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습니다. ‘인간 구원’이 우선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선이냐를 놓고 그 차이성을 말해줍니다. 즉 ‘내가 구원받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유용했다’는 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 믿음으로 모든 활동이 종결되게 됩니다. 사도의 몸에게 남아 있는 일은 자신의 구원의 미완료가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의 미완료성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죽고 싶어했습니다. 챙길 것 다 챙겼으니 더 이상 이 세상 삶에 미련없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를 향한 주님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사도의 이러한 인생관은 실은 모든 성령받은 성도의 인생관과 일치되는 겁니다. ‘나의 구원을 위한 나’가 아니었던 겁니다. 사도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코스를 자기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4에서는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러한 하나님의 작업이 사도를 통해서 발산되는 과정에서 사도는 십자가에 돌진하는 것으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즉 세상을 그냥 곱게 떠나게 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합류하면서 세상을 떠나게 하시는 것이 사도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공통된 사항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십자가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죽으신 사건입니다. 즉 ‘나로 인한 피해자가 예수님이다’는 사건입니다. 왜 인간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모질게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하기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보기에 그다지 큰 하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본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것으로 구축된 자아상과 세상관은 인간들로 하여금 ‘본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자’라는 착오를 유발시키게 했습니다. 즉 잘만하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헛된 망상이 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인간들의 이런 기대는 다 헛꿈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 발언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빠뜨린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자빠진 바로 그 자리가 유일하게 비로소 열리게 된 천국으로 통하는 길인 겁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밀친 것은 그동안 우상의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오인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명사(名詞)로 인식했습니다. ‘나’라는 덩치가 여기 있어 그 덩치에 대해 본인이 관리자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제시한 구원방식은 명가가 명사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動詞)로 작용한 겁니다. 명사란 정지나 고정된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우상화의 빌미가 됩니다. 하지만 동시란 운동과 생성입니다. 끊임없이 요동치기에 인간의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에게 쉴새없이 작용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이해하면서 자기를 명사로 여겨서 괜찮아 보이는 신적 지혜를 소지하므로서 ‘나’라는 덩치를 천국까지 올려보낼 것을 기획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끝까지 우상처럼 지키려는 의도에서 나온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보여주는 태도는, 성령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에서 끊임없이 배설물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즉 움직임으로 작용하시는 십자가 자체의 능력에 자신의 명사처럼 간주되는 덩치를 늘 해체되는 겁니다. 어제의 나를 긍정하면 오늘에 와서 그것마저 나의 우상으로 전환됩니다. 이는 내가 나를 부정하는 바가 나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25에서는 분명히 언급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스스로를 사수하려는 자에게는 결코 그런 귀한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을 겁니다. 도리어 나를 미워하라고 촉구하는 바로 그 분을 본인들이 격분해서 죽여버릴 겁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바로 이 사실에 입각해서 예수님 죽임 사건에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는 이제 없어도 돼요!”라고 고백이 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쓰임받기 위해 단단히 붙잡힌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가 유일한 실재성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십자가마저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십자가 근처에서 사람들은 장님이 되고 맙니다.

마치 열왕기하 6:18에서, 엘리사 선지자가 거주하는 바로 그 근처에서, 그동안 엘리사를 공격하던 아람군대들이 모두 장님이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이것은 십자가가 인간들이 절대로 손 탈수 없는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주어지는 선물(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의 위력을 이 세상에 알리고자 사도는 이 세상을 제대하지 못하고 계속 이 세상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즉 로마서 8:35-37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주님의 관심사는 주님과 성도 사이에 있는 밧줄에 있습니다. 이 밧줄만이 이 더러운 세상을 무사히 건너갈 수가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세상을 건너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이번에는 저희들을 늘 죽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7-28 12:07 
23강-빌 3장 10-12절(십자가와 부활)2007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0-12절입니다. 신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진짜 신앙인 사도바울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에 있어서 자기는 평소에 죽는 것이 소원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빌립보서 1장에서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나는 소원이 있다면 죽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 것이냐? 그 점에 대해서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향해서 돌진해서 죽겠다. 죽을 때 십자가 있는 곳에 자기 몸을 던져서 죽겠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럴 경우에만 부활의 세계 천국에 도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 이유가 십자가에다가 예수님의 죽음에 자기죽음을 합류하겠다는 것은 그 십자가가 그냥 십자가가 아니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싫어버린 바 된 그 십자가거든요. 사람들에게 배제당하고 미움 받았던 그 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일어난 일이 십자가죽음이었습니다.

사도는, “그 다음은 내 차례다. 내가 바로 예수님처럼 십자가 죽음에 들어가겠다. 내가 예수님의 다음차례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으면 천국이고 부활이고 없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현재 너희 인간들에게는 구원이고, 천국이고, 부활이고, 해당사항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막혀 있다는 겁니다. 부활의 세계가 막혀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이유가,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에게 미움 받은 이유가, 하나님계신 곳에 너희가 갈 수 없다는 그것 때문에 미움 받은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다. 천국에 못 간다. 부활은 너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걸 분명히 일러주러 온 거예요.

예수님이 이야기 안하면 사람들은 그냥 상상을 하거든요. 죽고 나면 좋은 세계, 그런 세계를 염두에 두는데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상상하지 말고 실제로 이야기해줄게. 너희는 그 나라에 가지를 못한다. 너희들의 발상 속에 천국이나 부활이란 사실은 없는 세계다. 괜히 공상하고 헛꿈 꿨다.” 그걸 분명히 단언해주러 온 거예요.

원래 천국이 부활이고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갈 수 없는 세계다. 인간이 한 번 쫓겨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갈 수 없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걸 분명히 해주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밀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지요. 예수님이 인간에게 떠밀려서 죽고 보니까 예수님이 있던 그 자리가 유일하게 부활에 이르는 자리가 되어버린 거예요. 못 간다고 막았는데 그 막은 자리, “거짓말하지 마 왜 우리가 못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가기로 되어 있어 약속이다. 너는 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해?” 하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 당신은 이단이야.”라고 밀었는데 밀어서 생긴 그 십자가, 인간에게 떠밀려서 죽어버린 그 십자가, 그 십자가만이 유일하게 그 벽에서 구멍이 난 거예요. 유일한 통로가 된 겁니다.

“나는 길이요, 나는 길이요. 바로 내가 길 이었다. 길이 없다고 했던 그 내가 바로 길이다.” 그 말이에요. “없다고 해서 모든 인간에게 밉상 받은 내가 길이다.” 사도바울이 이제 살아가는 것은, 아, 내가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시도가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하는 그 의미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활동을 했다는 사실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느냐? 의미 없는 행위, 모든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집합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주는 사람은 어디에 모이느냐 하면, 전부 다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점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네 생명을 미워하라. 이 말은 인간들이 태어나면서 하는 모든 짓들이 자기생명 하나 건사하기 위해서, 이것 지켜내기 위해서 모든 세월을 이것 하나에 다 퍼붓는 거예요.

모든 것을 이것 하나에 집중시키는 겁니다. “세상은 멸망해도 내 생명은 건지겠다.” 이런 모토,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는가? 나라도 나를 지켜야지. 인생 아무리 힘들어도 나 하나 지키면 살만해.’ 그런 의지, 그런 의욕 하나로 힘들고 힘든 인생을 버텨왔던 겁니다.

그렇게 고귀하고 그렇게 귀한 것, 주님께서 말합니다. “그게 밉지 않느냐? 네가 너를 구원에 방해하고 천국 가는 것을 방해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네가 안 미워져?” 이렇게 묻는 거예요. 자, 신앙생활 여러분이 얼추 세월 보내면서 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는 나로 인하여 예수님이 피해자가 된 것이 십자가에요. 나로 인해서. 나 때문에 생긴 것이 십자가에요. 그러면 나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뭐하고 있었어요? 나를 천당 보내려고 했겠지요. 나를 구원시키려고 했겠지요. 남 구원시키려고 애썼습니까? 아니에요. 나를 구원시키려고 애썼지요. “주여, 뭘 하면 구원되겠습니까? 뭐 하면 천당 가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율법대로 다 지키겠습니다.” 이것 한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지요. 형사가 범인을 찾는데, 분명히 증거는 있는데, 십자가 살인사건의 증거는 있는데 예수님 메시아를 죽인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이게 얼마나 무능한 형사고 무능한 수사관입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형사 본인이 범인인 것을, 십자가 믿겠다고 달려든 내가 범인인 것을 왜 우리는 그동안 몰랐어요?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을 공개적으로 했어요. 성경에 보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대놓고 공개적으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고 철학하는 사람인데 서양철학을 하니 기독교용어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복음서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복음서에 보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요.

똑같이 우리에게 하는 질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눈이 있어서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인데 봄으로서 우리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두 눈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만, 그게 전부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 전부거든요. 거울 앞에서 우리가 보이잖아요. 거울 앞에 보이는 그 나가 전부기 때문에 나에게는 내가 전부에요.

내 삶의 목적은 나에게 있는 겁니다. 왜 두 눈으로 봤으니까.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는 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예수님을 그들의 두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는데 보면서도 전혀 하나님으로 안 보이는 겁니다. 보면서도 봐야 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문제가 두 눈이 박혀 있는 나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 문제 있으면서 건방지게 천국을 간대요. 천국에 누가 넣어줍니까? 왜 천국에 가지요? 자기에게 문제가 있으면서. 문제 있는 인간은요, 천국에 못갑니다.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아요. 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그 문제를 알려면……, 이 땅에 와서 유일하게 문제를 일으킨 사람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문제를 일으킨 사건을 일으켰어요. 모든 인간을 향하여 보란 듯이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열두제자 앞에서도 사건을 일으켰어요. 눈이 있으니까 자기는 눈으로 보고 자기를 똑똑하다고 여깁니다. 똑똑하니 판단하게 되고, 판단하니까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식별한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식별을 했는데 그 식별은 선악적인 기준에 의한 식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악하다. 그렇게 식별하는 나는 선하다. 이게 인간이 내린 최종결론입니다. 인간이 자기 눈의 한계, 시력의 한계, 청력의 한계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알 길이 없어요. 자기 잘난 맛에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믿는 것이 우상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상의 특징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거든요.

눈에 보이고, 눈에 보이는 우상 그 신은 보이는 세계를 지켜줄 줄 믿고 그 믿는 신이 우상입니다. 보이는 것, 보이는 교회, 보이는 병원, 보이는 학교, 보이는 내 가정, 보이는 내 직장, 보이는 내 대한민국, 이것 지켜주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다 눈에 보이니까 그 눈에 보이는 것과 그걸 눈으로 보는 나와 결부시켜서 눈에 보이는 것을 지켜주옵소서, 이래서 생긴 것이 우상이에요.

여기 교회가 있지만 항상 여러분 생각에 이 교회가 마지막 교회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 부로 끝났어요. 다음 주는 보증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지키려고 하니까 하, 참, 지옥 가는 인간들, 그 공무원들이 자꾸 눈치가 보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그 공무원들 눈치는 보이고, 일제시대처럼 예배참석 하는지 지키고 감시하는 그것은 눈에 들어오고 왜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공무원, 천사가 같이 지금 거기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건 안보입니까? 천사가 예배 똑바로 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그것은 왜 안 보이는 거예요?

열왕기하 6장에서 엘리사 있는 곳을 아람군대가 포위했습니다. 수많은 군대가 와서 포위하니 엘리사의 비서가 쫄았어요. 게하시죠. 벌벌 떨었어요. “어찌해, 어째……” 이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문제에요. 눈에 보이니까 걱정과 두려움이 찾아온 거예요. 그럴 때 열왕기하 6장 16절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말을 이렇게 한다고 이게 먹힙니까?

17절에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엘리사를 둘렀더라.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그렇게 눈을 열어서 보게 하지 말고 평소부터 천사하고 막 부딪히고, 마스크 한 천사보고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도 하면서 천사를 평소에 보이게 하면 되는데 평소에는 천사도 하나도 안보이고 꼭 긴급할 때 보이게 해서 ‘아, 우리 편이 많구나.’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바로 그 과정,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그 자체가 그런 인간은 천국에서 안받아준다는 사실, 그러한 대상임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좀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속에 자기가 뛰어든다 했는데 그 십자가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인간들은 눈으로 보이니까, 그래서 시공간적으로 지정해야 되니까 사도바울이 뛰어들 십자가가 대체 몇 번지에 있느냐, 대체 대한민국 어디, 대구 시 몇 번지에 그런 것이 있느냐, 사람들은 그래줘야 납득이 되거든요. 여기서 사도바울이 어디에 뛰어드느냐, 할 때 언제, 어디에, 어떤 장소에 시공간적으로 표시를 해줘야 되는 그런 버릇은 인간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성이 되어 있어서 그래요.

어디에 내성이 되어 있느냐? 명사에 내성이 되어 있어요. 동사가 아니고 명사에. 명사라 하는 것은……, 좀 어렵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명사라 하는 것은 존재를 표시할 때 명사로 표시해요. 우리교회 뒤편에 십자가 있잖아요. 전에는 앞에 달아놨었는데 뒤편으로 옮겨놨습니다. 십자가가 저기 있어요.

저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명사지요. 명사는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시공간, 지정된 장소에 모이게 되면 이 지정된 장소 여기가 우리 집도 아니고 가게도 아니지만 여기가 시공간, 눈에 보이는 공간이기 때문에 명사가 되고 명사는 우상의 본질이 돼요. 그래서 명사라 하는 것은 명사에서 동사로 바뀌어야 되는데 상태명사라 하는 것은 정지와 고정입니다.

정지와 고정, 정지가 되면 명사가 되거든요. 정지와 고정, 이것을 명사라 해요. 반대로 동사는 운동과 생성입니다. 명사 같으면 인간의 소유의 대상이 되고 붙잡을 수가 있지만 동사는 운동과 생성이 되어서 ‘어 저기 있네.’ 하고 붙잡아 버리면 벌써 그 자리에 없어요. 벌써 날라 가버렸어요. ‘찬송가 405장이 그 때 참 은혜가 되었다.’ 그 때는 은혜가 되었지요.

그러면 지금에 와서 또 다시 405장 불러보세요 그 느낌이 안 옵니다. 왜? 하나님의 모든 일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와 생성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거울에 비치는 우리의 몸이 명사거든요. 우리 눈에 보이잖아요. 저게 나라고. 이걸 뭘로 해체해야 되느냐 하면 동사로 해체시켜 줘야 돼요. 우리 자신을.

눈에 보이는 것은 명사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저걸 믿고자 하는 나도 우상이 되고 저것도 나에게 우상이 된다, 라는 사실이 내성화 되었다, 몸에 배었다, 그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동사, 하나님의 운동에 의해서 날마다 이 우상이 해체되는 일들이 일어나야 돼요. 늘.

똑같은 하루하루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늘 달리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자, 그러면 동사의 예를 들게 되면 이런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제가 아까 십자가는 뭐냐, 라고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졌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피해자가 되는 사건, 그게 바로 십자가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지혜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적 십자가에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천국갈 수 없는 것으로 확정이 되었어요. 천국 못갑니다. 같은 말로 천국 가는 길이 막혀 있어요. 있어도 못가고 인간들에게는 천국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자가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동사에요. 왜냐하면, 내가 명사인 나를 움켜쥐고 쥐어짜서 구원 안 받은 명사, 나를 구원받은 명사 나로 바꾸는 그런 헛수고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어떤 작업을 걸어서 내가 구원되는 일은 없고 명사가 다른 명사가 되게 하는 그런 재주는 없어요. 그러한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런 쓸데없는 질문 할 필요 없어요. 중요한 것은 동사가 살아야 되는데 동사는 항상 생성 새롭게 창조되고 생성되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 동사가 되는 십자가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이 지혜를 찾는 이유가 명사인 나를 천국보내기 위해서 악을 쓰면서 찾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23-24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 동사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해 놓은 거예요. 주께서 불러주신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 빌립보서에서는 붙잡힌바 되었다, 고 해요. 주님께 붙잡힌 바, 주께서 먼저 일을 벌였잖아요. 동사가 되어가지고. 왜 주님은 안보이십니까?

보이는 것은 전부 다 우상이니까, 나부터 해서 전부다 보이는 것만 챙기니까 주께서는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분명히 보이는 육체로 왔지만, 보이지만 보이면서도 못 보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에게 시선이 있다는 것, 인간은 자꾸 누굴 보면서 관계를 맺으려 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려 하지만 모세가 가진 눈에 있는 이 시선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얼굴과, 그 시선과 교환될 수 있는 시선이 아니에요. 너는 내 얼굴 못 본다고 했거든요. 네 얼굴은 내 얼굴의 시선을 교환하는데 불필요한 것이고 쓸데없는 것이고 쓸모없는 거예요. 우리의 눈은.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된 자가 눈을 떴어요. 떴는데 그 뜬 눈이 소경이에요. 눈을 안 떴어도 소경이고 눈을 떴어도 소경이에요. 진짜 소경에서 실로암 못가에서 눈 뜬 사람, 그렇게 예수님을 알아먹어야, 그 자리에 가야 비로소 소경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을 알아봐야.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난 뒤에 다시 자기를 돌아볼 때 내가 소경된 것은 내가 죄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보다 죄를 더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시선가지고 다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동사, 그 능력으로 우리가 주님한테 살해당할 차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반응은 뭐냐? “주님, 저는 없어도 됩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구원받은 사도바울이 이 땅에 살아가는 모습은 뭐냐? ‘저는 의미 없습니다. 저는 없어도 돼요.’

주여, 내가 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명사는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명사에서 모든 생성과 움직임 모든 운동이 거기서 다 나오거든요. 예수님한테서 나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나는 없어진다, 그 말입니다. 성도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사도바울에게 성령을 줬으면 이제 바로 하늘나라 데려가도 되는데 계속 남겨두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을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뱃전에 밧줄이 고정되어 있고 그 밧줄 끝에 고기미끼를 달아놓습니다.

그리고 그 배는 쾌속정이라서 마구 달립니다. 그렇게 달리면 그 밧줄에 묶여 있는 그 고기는 배에 있지 않고 물속에 있어요. 탁류, 더러운 물속, 천박한 물속에, 흙탕물 속에 두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물고기는 고난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죽을 지경이에요. 불편해서 못살겠어요. 못사는데 못살면서도 왜 그 더러운 세상에서 살게 두는가?

이 밧줄이 있잖아요. 이 밧줄이 십자가거든요. 이미 붙잡힌바 된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물속에 잠겨서 달리는 거예요. 배는 신나게 달리고 우리는 물속에 있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그런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지만 모든 영광을 일체 인정받지 못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과 함께 사는 그것을 되풀이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가신 곳이 바로 부활의 세계에요. 천국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방금 설명한 것은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에서 나옵니다. 14절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세상으로 하여금 진리를 꼭 이런 식으로, 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식으로, 지혜 있는 자가 못 알아듣는 이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짐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 갔던 그 길을 이제는 열두 사도가 그 길을 가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그렇게 세상에서 짠한 곤고과 고생을 하게끔 아직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죽는 게 소원이었지만 사도바울의 소원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이 육체에 채워야 돼요. 어디서? 이 세상에서. 그런 사도바울을 보고 어떤 사람은 “구라다. 거짓말이다. 너도 이단이구나. 너는 뭐 잘났나?” 하지만 사도바울은 “나 안 잘났어. 나는 쓸모없어. 나는 쓸모없는 거야. 나라는 명사는 쓸모없어. 중요한 것은 나로 인하여 어떤 동사가 나오는가가 중요해. 나는 쓸모없어.” 쓸모없는 것을 주께서 쓰시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많은 사람이 사도바울 보고 온갖 욕을 다 했지요. 온갖 비난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래요. 예수님 변화산에 올 때 양쪽에 두 선지자가 있었는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공통된 특징이 있어요. 모세나 엘리야가 시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엘리야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사흘 동안 엘리야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 헤맸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명사를 찾으려 해요.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동사, 일하심을 생각 안하고 그저 우상 섬기는 것처럼 어떤 특정 물건이 나오면 거기서 희한한 힘이 계속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 목걸이 하면 재수 좋고, 차에 걸어놓으면 사고 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뭔가 십자가라는 보이는 명사에서 어떤 신기한 힘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의미 없어요. 십자가는 동사로 움직이지 명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마저 우상이 되는 거예요.

열왕기하 6장 17절은 아까 말씀드렸고요. 18절에 보면 중요한 대목이 나오는데요. “아람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아람들의 모든 눈이 다 어두워졌어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신학박사고, 교회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그렇게 성경 달달 외우는 그 귀한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 십자가 앞에 가게 되면 십자가를 못 찾아서 뺑뺑이 돌아요. 눈이 어두워져서. 십자가자체가 사람들의 눈을 어두워지게 만들어버려요. 십자가를 찾는데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빨리 내가 천당 가야 되는데 뭘 믿으면 천당 가지?’

자꾸 자기한테 자기존재의 의미를 가지니까, 자기 쪽에서 십자가에 다가가니까 십자가가 보일 리가 있습니까? 소경되어 버렸지요.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 따라 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결국은 예수님 앞에서 다 돌아섰지요. 바로 이러저러한 일들,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 중요한 대목 많지만 이 고린도전서 2장은 참으로 중요한 것을 가득 담아놨어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2장 8, 9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그러니까 교회 감시하는 공무원이 알지 못하였나니, 그런 뜻이지요.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건 뭐 구원받지 말라는 이야기지요. 결국은 구원받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네가 네 의도로, 네 의욕으로, 기대나 목표로서 ‘나 천당 가야지.’ 그런 소리 하려면 교회 오지 말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탐정이 범인을 찾아도 본인이 범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구원받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내가 예수님을 죽인 범인이란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는 거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배설물 이야기한 겁니다. 오징어먹물 빠지듯이 계속 빠져야 돼요. 사도바울이 살아 있을 동안 자기육체에 남아 있는 배설물이 계속 빠져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직도 사도바울은 죽을 때까지 설사병이 있어요. 계속 세상적인 육적인 것,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는 자기의미, 행함에 대한 나의 의미, 명사가 된 나에서 나오는 동사, 여기에 인간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명사는 보이지 않는 분이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계시는 그분이 유일한 명사거든요. 존재에요 존재. 그 존재에서 동사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모든 일들이.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 때문에 ‘아, 나 어제 예수 믿었어.’ 갑자기 ‘예수 믿었어.’가 되어서 주인공이, 내가 동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졸지에 동사에서 명사가 되었어요. 나, 예수 믿는 나, 예수 믿는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오늘 치 할 일이 또 있는데, 오늘 주시는 활동이 또 있고 생성이 또 있거든요.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이 또 있는데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어제로 시간을 스톱시키는 거예요. 괜찮은 어제가 나의 표준이고 싶다, 그런 거요. 나 그걸 유지하고 싶다, 그런 것 말이지요. 참, 오늘 같은 이 본문이요, 참, 신학교 다닐 때부터 교수들도 그렇고 모든 신학생들, 교인들도 고민거리가 된 거예요.

이게 명사인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동안 그렇게 해왔던, 이미 구원 받았다, 구원받았다, 구원이 완료되었다, 그렇게 앵무새처럼 외워대던 그들에게 오늘본문 딱 보니까 잡은 것이 아니고 이룬 것이 아니다, 내가 얻었다 함도 아니라,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이 대목이 딱 나오니까 하 우리는 힘이 쫙 빠지는 거예요.

또 남았다니 이제는 십일조를 해야 하나, 예수 믿는 것으로 모자라서 뭐가 또 남았어요? 또 남은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꾸 남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최종의미를 내 구원에다, 최종성을 나 천당 가는 것에다 두고 있으니까 모든 성경구절을 내가 뭘 챙기면 되고, 뭘 믿으면 되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그게 자기 자신이 사달인 것을 모르고, 자기 자신이 화근인 것을 모르고, 그런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속 천당 갈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남하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런 식으로 천당 가는데 너도 네 마음 끄집어내봐라. 너는 어떤 식으로 구원받았나?” 이렇게 끄집어내라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절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2장 9절을 다시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십자가라는 것은 어떤 인간들로부터도 발각된 적이 없다. 인간의 어떤 지혜나 마음, 여기서 마음이라는 것은 착한 마음도 다 포함되는 겁니다. 선한마음, 착한 마음, 훌륭한 마음, 침착한 마음, 조심스럽게 인생 살아가는 것 다 포함되는 거예요. 조심해서 인생 살아간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 아니에요. 사도바울만큼 조심스럽게 완벽하게 산 사람 누가 있습니까? 율법에 흠이 없다는 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깊숙하게 박혔기 때문에……, 깊숙이 박혀 있어요. 너무나 깊숙이 박혀 있어서 사람들에게 절대로 들키지 않는 방식으로 박혀 있었어요. 이 지혜가.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시도해도 그 박혀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고린도전서 2장 11절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누가 알리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선물로 온 그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는데 끄집어내보니까 그 깊은 뜻이 뭐냐? 그게 바로 십자가였던 거예요. 주님이 이것저것 새로운 율법을 나눠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십자가자체가 이것은 꼬깃꼬깃 숨겨놓은, 어떤 인간에게도, 어떤 피조물에게도 들키지 않은 하나님의 가장 내밀한 것, 하나님의 가장 깊은 속에 있었던 것이 뭐냐? 십자가였어요.

그 십자가가 활동해서, 그 십자가의 영이 임해서, 그것이 밧줄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붙잡힌바 된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 붙잡힌 바가 얼마나 단단하고 얼마나 그게 끊어지지 않는 것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아직도 그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흙탕물 속에다 두고 그 속에서 더러운 인간들과 이 땅에서 같이 살라고 한 거예요.

참, 생각해 볼 때 같이 복음을 들었는데 복음에 같이 참여 못하고 떨어진 사람들, 마치 요즘처럼 홍수가 나서 막 쓸려가는 큰 강이 있잖아요. 이쪽 편에서 강을 건너가는데 건너가려면 물결을 거슬러 가야 돼요. 거슬러서 가는데 거스르는 힘, 주님의 붙잡힌바 된 그 힘이 없으면 기껏 내가 하나님을 믿으려는 그 내 힘 다 끄집어내거든요.

끄집어내봐야 탁류 중간쯤 가다 떠내려가서 나중에 강 하류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건너가지를 못했으니까. 건너간 사람은 밧줄이 너무나 단단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주 센 물, 흙탕물 한 가운데 있어도 그 밧줄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이런 대담한 시험을 위해서, 시험, 테스트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테스트를 실시를 하십니다. 진리는 그렇게 전한다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로마서 8장 35절에 보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 구원이 관심사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주신 그 사랑이 안 끊어진다는 것,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우리를 시다바리로 사용하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요즘같이 실감나는 때가 없어요. 핍박 3백만 원,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에 하나 더 집어넣어요. 코로나 19나. 36절에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39절에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끊을 수 없느니라, 쟤를 봐! 끊을 수 없느니라, 저 성도를 봐! 끊을 수 없느니라, 너 자신을 봐! 너 아무것도 아니잖아. 밧줄이 중요하잖아.” 밧줄이……, 진짜 요즘 실감나는데 대구 정말 실감나요. 진짜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묶어라. 네가 없어도 된다고 인정할 때 그 정도로 그 밧줄, 주님도 밧줄을 보니까 너도 이 밧줄을 보라는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괜찮다, 상관없다는 것을 알고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코로나 19가운데서도 여러분, 쾌활하게 즐겁게 살 수가 있습니다. 우주인들이 우주선 안에서 중력이 없을 때 자기 혼자 붕붕 날아다니지요. 자기 혼자서, 붕붕 날아요. 아무 거리낌 없이 공중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마음대로에요. 이 세상 염두에 둘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식으로 살려면 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어떤 태도로 세상을 다시 봐야 되느냐? 우상을 거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상을 거치게 합니다.

참, 이 예가 중요한데 두 가지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 예는 여러분이 잘 아는 다니엘 3장 22,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 보면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 떨어졌더라.”

불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불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이 세상이 꿈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망상이고 꿈인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불속이라 하는 곳은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는 곳이지요. 타면 죽으니까. 그런데 그 불속에 누가 먼저가 있느냐 하면,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가 있고 거기서 불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세상을 이렇게 살았다. 그럼 우리는요, 할 때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다 허망한 꿈같은 세상이에요. 오늘 되면 어제는 꿈이었습니다. 꿈 안 꿔도 꿈이었고, 한 달 전에도 꿈이었고, 16세 예뻤던 그 여고생 그것도 지금 생각하니, 80되어 보니 다 지나간 꿈같은 거예요.

‘참 예뻤지.’ 꿈에는 다 예쁜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명사 때문에, 내가 명사로 봐서 그래요. 그러면 꿈이 아닌 것은 뭐냐? 꿈이 아닌 것은 동사지요. 시편 126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꿈이 아닌 것은 뭐냐 하면, 실제로 우리가 애굽에서 돌아오듯이 구원이 되어야 돼요. 구원 작용, 십자가가 갖고 있는 그 능력, 밧줄……, 십자가 이야기해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동사 역동적인 동사가 지금도 우리에게 능력으로 매일 매일을 채워주시는 거예요. “너는 쓸모없다. 네가 할 일은 그냥 오징어 먹물 빼면 돼.”

세상과 친했던 것, 이 꿈같은 세상, 이게 전부인줄 알고 있었던 그것이 바로 배설물, 다 설사해야 되거든요.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았어요.” 하는 그 세상 것, 좋아하는 것 다 내려가야되지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이 땅에 딱 붙어서 산다는 거예요. 땅에 붙어사는 것, 그게 눈에 보이는 거거든요.

우리는 유령 같아서 눈에 보이는 이 땅에 붙어 있으면 안돼요. 동사에 붙어 있어야지 명사에 붙어 있으면 안 됩니다. 자꾸 그러면 미련이 남아서 안돼요. 집착과 미련이 우리로 하여금 걱정과 두려움을 야기 시킵니다. 다니엘 세 친구, 그 일은 세상에서는 꿈같은 일인데 세상에 그것이 꿈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온 것도 실제성이지요. 다니엘 5장에서 갑자기 벨사살 왕 앞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써요. 그것도 실제성입니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지요. 왜? 나타나고 없어지는 것은 동사의 특징 사건이니까. 십자가도 마찬가지에요. 잠시 이 땅에 오셨다가 죽었지만 그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은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이 세상을 심판의 세상 저주받을 세상으로 넘치게 만들었어요.

마치 맨홀 뚜껑에서 물이 넘쳐서 온 시가지를 다 덮치는 것처럼 십자가 뚜껑에서 나오는 그 저주의 힘이 ‘너희들은 구원이 없다’는 그 힘이 온 천지를 다 발라버렸습니다. 교회고 절이고 다 소용없고 다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기쁜 소식은 뭐냐? 열왕기하 7장에 보니까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포위하니 다 굶어죽었어요.

그럴 때 여기에 문둥병자 네 사람이 있었는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7장 4절에 “우리가 성중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 즉 우리가 가서 아람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굶어죽으나 저기 가서 잡혀죽으나 마찬가지라고 한 거예요. 일단 이 문둥병자는 사람들에게 사람대우 못 받습니다. 명사로 봐서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명사가 아니에요. 자기를 우상시할 수 있는 건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늘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것도 본인이 이해해요. 나는 인간 같지도 않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을 해요.

본인이 인정을 하니까 그냥 밥이나 먹어도 고마운데 이제는 그것도 안돼요. 다 같이 굶어죽게 생겼어요. 성이 포위되었으니까요. 아람군대가 그 작전을 썼기 때문에. 그래서 이 네 명의 문둥병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매한가지다. 나가서 죽자.” 해서 나가보니까 그 날 밤에 천사가 와서 아람군대를 다 쫓아내고 엄청나게 먹을 것이 많아서 감당을 못한 거예요.

그래서 문둥병자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9절에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자기들끼리 먹다가 “아, 우리끼리 이러면 안 돼.” 한 거지요. “오늘날 이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것을 우리가 잠잠하고 있으면 안 된다. 나가서 다시 성안에 들어가서 알리자. 거기 있지 말고 나오세요.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본인이 그 안에서 자기 의미 챙기지 마시고 나처럼 이 문둥병, 더러운 문둥병, 저주받는 나처럼 생각을 그렇게 가져가셔서 여기서 사나, 이 대한민국에서 사나, 어디 가서 사나, 사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내 말 들으세요. 나갑시다. 나가서 그들에게 아람군대에게 맞아죽읍시다. 그럴 마음으로 맞아 죽으려고, 그들에게 사로잡혀서 칼에 찔려 죽는다는 각오로 나오세요.”

나와 보니까 적들은 없고 그냥 천사가 다녀간 현장만 있을 뿐이지요.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에는 이 땅에 없는 동질성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사야 65장 25절에 보면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같은 세상, 공간에 있기 때문에 서로 적대할 이유가 없어요. 똑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똑같이 얻어먹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잘했다 네가 잘했다’ 할 것이 없어요.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지금 그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문둥병자라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아직도 자기에게 기대를 걸고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냥 놋 뱀 쳐다보면 되는데.

십자가 앞에서 주님한테 살해당하면 돼요. 이제 주님이 내 모가지를 밟아야 돼요. 밟힐 만 하니 밟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죽였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한테 살해당해야지요. “주님이여, 저를 죽여 주옵소서. 죽을 만 합니다. 주여, 쓸모없습니다.” 이러면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내 것을 지킬 이유가 없어요. 다 같이 문둥병자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살리는 방식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이미 알았기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즐거움으로 살았습니다. 저희들도 어떤 환난과 곤고가 올지라도 이 쾌활함과 감사와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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