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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9 12:44:11 조회 : 440         
   무시로 기도 20020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무시로 기도(에베소서 6:18-2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9F_Mo3TWko, Hit:48
 이근호 20-02-09 13:30 
무시로 기도

2020년 2월 9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6:18-20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적구원(개인적 구원)에 마음을 둔 사람이라면, 복음으로 인해 구원받았으니 더는 기도할 게 없다고 여길 겁니다. 개인적으로 챙길 것 다 챙겼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계속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뭘 기도하고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일까요?

복음으로 인해 드러난 이 세상 실정을 고발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겁니다. 방금 언급한 사적(私的) 구원을 시도하고 염원한 이 세상이 바로 죄가 됨을 알리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하는 개인이 모두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위해 복음이 말씀하는 바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데 있습니다. 즉 인간 자체가 ‘죄 있는 육신’입니다. 그렇다면 이 육신을 연명하겠다든지 혹은 목숨을 끈질이게 부지하겠다든지 혹은 이 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하고 영광돌리겠다고 하는 수작이 모두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6:31-32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옥 갈 자들이 기도는 결코 사적 기도에게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이유는 평소에 자신이 자신을 주시하고 관찰합니다. 그들에게 세상이란 자신을 뜻을 펼칠 마당으로 여깁니다. 그 세상판에서 ‘나와 나의 것’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는데 늘 유념해서 지켜봅니다. 그러하다가 자기 목숨 부지가 위태롭다고 여기면 여지없이 기도에 나섭니다.

예배당을 찾아나서도 기도 시간도 특별히 정해진 시간을 활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 5분전의 마음과 기도 5분후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기도 5분 전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기를 간구하는 마음이요, 기도 5분 후에는 자신이 응답받아 모든 문제가 해서되었다고 믿어지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일관성 있는 응답으로서의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무시로 기도’란 한결같이 이미 달성된 응답을 받아들이고 적용시키는 기도합니다. 즉 복음으로 인해 이미 인간은 뭘해도 죄인인 것이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빠져나가면서 보여주셨던 그 십자가 상황이 이를 말해줍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 26:46) 이 버림받음이 오늘날 우리 자신의 본 모습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이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복음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죽은 자는 살리되 오직 ‘복음을 위한 용도’로 살려냄을 당했음을 뜻합니다. 이로서 성도의 기도는 한결같이 복음의 결과물로서 기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 자체가 주님의 기도의 ‘응답’이 되는 겁니다. 성도가 곧 ‘답’입니다. 하나님이 벌리신 모든 일의 답이요 ‘다 이루심’에 해당됩니다. 기도에 대해서 흔히 예레미야 33:3을 언급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지만 이 말씀은 예레미야 33:2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즉 하나님께서 홀로 계획하신 일에 대해서만 필히 완료하심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오직 인간들이 ‘자기 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적 기도란 일종의 독백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본인만 그것을 들을 뿐입니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성도 자체가 답입니다. 이제는 이 세상을 향하여 질문을 던질 입장입니다. 즉 세상은 어째서 답이 낼 수 없는 동네냐는 겁니다.

성도가 이미 답이 되었다는 말은, 이 세상이 영원한 척하지만 실은 불로 망해야 마땅한 동네라는 것이 명백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 그 어떤 미련 것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은 자입니다. 다만 ‘기록으로만 존재’합니다. 이 기록은 오직 한 분의 기록입니다.

세상은 여럿의 기도가 있지만 성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기도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이름’의 기도를 말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자기의 기도조차도 관여할 수 없이 세상 일이 진행됨을 보여주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도 있었습니다. 역대하 20장, 여호사밧 시대 때 전쟁이 있었습니다.

암몬과 모압과 세일의 연합군들이 유다나라를 쳐들어오자 다급한 여호사밧왕은 하나님께서 기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도 응답이 야하시엘이라는 레위인에게 주어지는데 그 응답은 이러합니다.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즉 이 전쟁은 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벌리시는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이스라엘 처할 태도는 바로 전쟁 후 상황입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대 만들어 전쟁터에서 노래하는 겁니다. 그 승리의 골짜기가 ‘브라가 골짜기’입니다. ‘찬미의 골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자신의 전쟁을 끌어들이신 겁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게 될 때, 삭개오는 더는 자신을 챙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주님의 일의 답이요 결과물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자기에게 손을 떼는 겁니다. 자신이 자기와 의논하지 않는 겁니다.

성도의 기도란 이처럼 복음을 가리는 것에 항상 자신의 사적 의식이 개입됨을 인식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사단의 가시’를 빼돌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응답은 이러합니다. ‘병든 네 자체가 답이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교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처럼 뭐든지 복음 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적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일의 사소함으로 주님의 일을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2-10 16:00 
62강-엡 6장 18-20절(무시로 기도)200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 18-20절입니다. 신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6:18-20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이라는 것은 구약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이미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으면 기도할 필요도 없겠다, 라는 것이 인간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당연한 논리처럼 이어지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 도리어 기도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그 다음에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어요.

원 뜻은, ‘모든 시간에 걸쳐서’ ‘항상’ 그런 뜻인데 시도 때도 없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또 깨어서 기도하라고 되어 있어요. 보통 기도는 그냥 자기 아쉬울 때 기도하면 되는데 이것은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도록 연속성으로 기도하라는 이유가 뭐냐? 복음이 우리 성도에게 적용이 될 때는 기도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기도가 무시로 하는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만, 이 복음시대에 돌입했을 때 ‘복음이 뭐냐’ 하는 것부터 정리가 되어야 되는데 막상 성도보고 “복음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답변을 잘 못하고 있어요. 복음이 뭐냐 할 때는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복음이라 하는 것은 항상 시작할 때 나를 빼고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부터 시작하는데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로마서 8장 3절에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몸 자신이 죄 있는 몸이다, 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다 밝혀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죄 있는 몸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몸들이 있는 이 세상도 죄악된 세상이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몰랐었는데, 악마에 의해서, 악한 영에 의해서 몰랐지요,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그 죄 없으신 분이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이 세상은 죄 있는 몸인 것을 알게 된 것,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죄가 있는 몸이라는 그 죄 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 하는 기도가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기도는 곧 죄다. 헌금도 곧 죄가 되는 겁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죄가 되고요. 이게 기뻐져야 돼요. 교회 다니는 것도 죄고, 자식 키우는 것도 죄고. 이게 굉장히 기쁘다는 사실은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복음은 모르고, 곧 내가 죄 있는 육신인 것은 모르고 자꾸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하게 되면 이것은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는 수고를 헛수고로 만드는 마귀짓이 되는 거지요. 교회가 앞장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도로 하느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발산하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내 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는 식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세상을 향하여 자기판을 벌리는 겁니다. 자기 판을 벌여놓고 내 목숨이 계속 유지되는가, 내 목숨이 끈질기게 이어지는가, 그걸 주시하는 거예요. 그걸 주시하고 살피다가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 위험하다 싶으면 단박에 기도가 나옵니다.

그냥 기도하면 효과가 없을까 싶어서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 그냥 낮에 기도하면 효과가 없을까 싶어서 새벽부터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 그런 식으로 하지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신호를 본인이 알고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다급한 마음으로 뭔가 부르짖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교회나 본인들이 정당화한다는 겁니다.

그게 죄인데, 감추었던 죄가 바깥으로 드러났는데 그걸 정당화해서 “그게 바로 죄입니다.” 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러면 기도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기도할 것이 없네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만 주시하고, 자기 목숨만 끈질기게 이어가려고 하다가 위태로울 때는 기도하고요.

그래서 평소에 기도를 안한다 하는 것은, 뭐 남의 교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를 안한다는 말은 지금 꽤나 밥먹고 살만하다는 그 말이거든요. 참을만 하다는 그 말이 됩니다. 가정적으로 여유가 좀 있다는 그 말이에요? 그런 뜻입니까?

예레미야 33장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보통 이 구절은 다른 교회에서는 유명한 구절이거든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되어 있고요. 악을 쓰는 거지요.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여기 응답이 나오지요. “네가 알지 못하는 ……일”이 나오는데 어떤 일이냐?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가 하나님을 믿어야 천당 가니까 믿는다고 치고요, 일단 믿는다고 치고요,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믿는다고 치고, 믿는다면 믿는 값을 해야 되는데 뭘 믿느냐? 예레미야 33장 3절을 믿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이걸 믿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 위태롭고 가정에 위기가 왔을 때는 부르짖는다. 부르짖고, 그래서 뭘 믿느냐? ‘그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서 반드시 그 기도빨의 응답이 주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자 맞습니다.’라고 자기가 자기에게 확신을 주고 싶은 식으로 한국교회가 150년을 이어온 겁니다. 무당집이지요.

그 사람들이 뭘 놓쳤느냐 하면, 예레미야 32장 2절을 빼먹었어요. 그 바로 앞에 있는 구절이 뭐냐 하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일은 다 여호와께서 먼저 자기가 계획 잡은 것이 있다는 거예요. 네 계획 말고 여호와께서 잡아놓은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은 차질 없이 이뤄나가니까 너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네가 아쉽다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된 것만 기도하라는 그 말이지요. 그런데 자기 살 궁리에 바쁜 존재가 언제 하나님의 계획 같은 것에 관심이나 있습니까? 없지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기도가 엉터리지요. 지옥으로 이끄는 기도지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아니고 지옥으로 이끄는 삶이에요. 기도해서 지옥가세. 그 기도에요. 열심히 금요철야해서 지옥가세. 다같이. 혼자 가면 심심하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뭔데? 몰라요. 관심이 없어요. 왜? 자기한테 관심이 몰두하다 보니 자기 일 아닌 것은 관심이 없어요. 타인의 일에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도 타인이에요. 그래서 유치원 애들 보세요. 안 가르쳐줘도 기도하잖아요. 복음에 의해서 이게 죄 있는 육신의 몸이에요. 육신이 평생 동안 자기에게만 신경 쓰고 기도를 했니, 교회 다니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인간들의 개인적인 기도는요, 사실은 독백입니다. 자기중력권을 못 벗어나요. 자기가 자기에게 고함지르고 고함지르는 소리를 본인이 들어요. 자기가 소리를 지르고 소리 지른 그것을 자기가, 반향이라 하지요, 메아리치는 것, 그 소리를 자기가 듣고. 자기가 자기를 혼내고 닦달내고 몸부림치고요. 실컷 기도했는데 혼자 몸부림치다가 기도 끝, 하고 먼지 털고 일어나는 거지요. 독백입니다. 응답도 없어요. 응답도 없는데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허공을 향하여 실컷 한풀이하고, 울고불고, 좀 속 시원하면 응답인줄 알고 일어서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응답은 복음으로 가는 거예요. 복음이 낯설지 않고 복음이 온 몸에 젖어드는 거예요. 복음이 뭐냐 하면……, 또 잊어버렸지요, 아까 했는데. 복음이 뭐냐 하면, 내가 죄 있는 몸이에요. 이걸 그 전에는 몰랐지요. 복음 알고 난 뒤에 내가 죄 있는 몸이니까 기도한답시고 한풀이 한 그것도 죄라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죄 있는 몸이니까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그것은, 죄 없었지만 죄 있는 몸으로 오신 분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어떤 모습으로 떠나시는가를 지켜보면 됩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몸이 버림받은 몸이에요. 이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새삼스럽지 않아요. 관계가 끊어졌으면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놈이 기도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이 없지요.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뭐냐? 방금 한대로 구약에서는 그렇게 예언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계획한 모든 일이 마감이 되었습니다. 완성이 되었어요. 그러면 완성된 그 응답의 결과물이 뭐냐? 성도 아닌 자가, 보통 죄인이 성도가 된 것이 답이 돼요. 성도자체가 응답이에요.

성도 자체가 응답이 되어버리면 이 세상은 이제는 답이 말할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아, 네가 얼마나 죄가 많았기에 내가 성도 되어야 하는 이것이 답이 되어야 하는가?’ 그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답이 이미 되어버리면, 내가 이미 답으로 완료가 되어버리면 답이 없는 이 세상은 스스로 영원한척 해도 이것은 마땅히 파멸되어야 되고 몰락해야 될 대상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가 않아요. 불바다 되어도 마땅합니다. 왜? 내가 답이니까. 성도가 답이니까. 성도가 보기에 세상은 죄 있는 세상이니까 마땅히 그 결과는 파멸이고 저주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라 하는 것은 이미 성도 본인이 답으로 확정이 된 상태에서, 현재 이미 하늘나라에 도착한 입장에서 과거의 세상, 이 세상이죠, 이 세상이 왜 답을 낼 수 없는가, 답이 안 나오는 세상인 것이 복음을 전파하기위한 기도가 되는 겁니다.

“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잖아요. ‘이 세상 어디에도 답이 없습니다.’ 하는 것을 지금 모르고 있는데, 악마에게 휩싸여가지고, 복음을 전해서 이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 벌써 드러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길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답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냐? 그게 아닙니다. 성도는 본인 붙들고 본인보고 기도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 본인은 이미 죄 있는 몸으로서 이미 죽은 몸이거든요. 죽은 몸인데 이 복음을 남에게 적용시키려고 성급하게 나대지 마시고 본인한테 적용시켜야 돼요. 아까 기도하신 분이 참 좋은 말씀 하셨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옵소서.” 이 복음이 나에게 적용되게 하옵소서. 이 복음이 적용되게 한다는 말은, 내가 살려고 애쓰고, 내 목숨을 유지하려는 이러한 모습자체가 죽어 마땅한 나의 과거의 모습인 것을 내가 알게 해달라는 거예요.

위태로울 때마다 기도하는 그 모습, 그 모습이 바로 내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과거의 세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성경말씀, 복음을 위해서 그런 것이 존재하거든요. 마태복음 6장 31-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기도가 뭐냐?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아, 참, 세지 않습니까? 참 세지요. 이거 참 센 말이거든요. 정말 이 말씀 들으면 교회 완전히 문 닫아야 돼요. 교회 왜 나오는데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그것 때문에 내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마지막 기대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밖에 없다. 살려주옵소서. 헬프 미. 이래서 교회 나오잖아요. 그래서 무당집처럼 교회가 세워지잖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지옥 가는 사람들의 티를 팍팍 내는 것이라는 거예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그런 것이 넉넉하다면 기도 안할 사람이에요. 기도 안하게 되면 무슨 기도가 안되느냐 하면 무시로 기도가 안돼요.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복음은 ‘무시로’ 에요. ‘무시로’ 무시로 기도가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기도, 기도하기 5분 전과 기도하고 난 5분 후에 기도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무시로 기도가 아니에요.

그런데 무시로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하기 5분 전이나 기도하고 난 5분 후가 내용이 동일해야 됩니다. 중간에 살고자 하는 내가 끼어들 수가 없는 기도가 무시로 기도에요. 성령 안에서 이렇게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는데 성령을 받아야 무시로 기도가 돼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납득이 안되는 겁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고, 내가 하려면 기도하기 전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자, 기도할 때 응답을 목표로 합니다. 응답을 받으면 안좋은 상황이 원상회복될 거라는 기대를 갖고 기도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기도 후 10분에 응답을 받았다. ‘야, 기도효과가 있구나. 나는 신자 맞는거 같아.’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그렇게 되면 5분 전의 내 모습과 5분 후의 내 모습이 달라져요. 이것은 무시로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방인들, 지옥 가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에요.

이야기 들어보니 점점 기도할 것이 줄어들지 않습니까? 무시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내 목숨을 유지하겠다는 식으로 끼어들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복음 안에서 나는 이미 죽은자기 때문에 산자로서 기도하겠다는 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복음에 의해서 이미 죽은자라면 죽은자 다운 기도가 무시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되실 거예요. 어릴 때 집은 좁고 형제들이 많을 때는 형제는 형제끼리 한방에 재우고, 자매는 자매끼리 한 방에 재우잖아요. 그 때 엄마가 밤에 순시를 합니다. 10시쯤 되어서 애들이 안자고 있으면 엄마가 강제로 소등합니다. “불 끄고 자거라.” 이렇게 해도 형제간에 그리고 자매간에 안자요.

이불 밑에서 소곤소곤 하지요. 형제들이 이불 밑에서 막 장난도 치고 한다는 말이지요. 생생하게 살아 있는 티를 다 내요. <작은 아씨들>처럼. 이야기하다가 한쪽이 자고 있으면 그 때 이야기가 끝나는 거지요. 그 덮는 이불, 그 이불이 복음이에요. 복음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인데 우리는 그렇게도 할 말이 많아요. 소곤소곤 기도할 것도 많고 걱정거리도 많고요.

그러면 엄마가 자기 방에서 소리치지요. “어허이, 불 끄고 자라니까!” “예, 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불로 덮어버려요. 시체가 시체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이불로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것은 이제 전혀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밤이 되면 온천지가 캄캄한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거든요.

살아 있을 때는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복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이 세상에 빛이 오매 어두움이 영접지 아니하”면 이 어두움은 온 천지가 다 어두운 거예요. 나만 나쁜 것이 아니고 다 나빠요. 그 나쁜 사람들이 교회 세워서 철야기도하고 새벽기도 해봐야 그게 바로 죄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다 덮어놓고 그 다음에 내가 따로 ‘내 영혼이 어떻게 구원받겠느냐?’ 이제는 복음 안에서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무시로 기도는 뭐냐? 기도와 ‘무시로 기도’의 차이가 있는데요. 무시로 기도는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내가 따로 정해놓은 내 수도원에서 내 손모가지 붙잡아서 거기서 빼내는 거예요. “너 도 닦을 생각하지 마라. 네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죽은 놈이 죽어야지 뭘 기도해서 구원 받겠다 하느냐?”

그걸 보면 천주교에서 하는 수도원이라는 것, 이게 참 보통 나쁜 동네가 아니죠. 뭐하는 짓이에요? 진짜 복음적 현실이 그만큼 묵직하게 우리를 누르고 있는 거예요. 이불처럼 묵직하게 눌러버리면 우리는 그 앞에서 복음의 되어진 그 일에 우리가 말려들었다는 그 상황을 즐기고 감사하고 고마운 것 외에는 달리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삭개오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삭개오가 부자고, 세리고, 돈 많이 챙기고 나름대로 자기도 성공한 인간인데 예수님 소문 듣고 예수님이 어떤 인간인가, 싶어서 나무 위에 올라갔지요. 나무 위에서 보는데 지나가던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거든요. 눈 딱 마주치니까 예수님께서 딱 찍었어요. 호명해서 “삭개오야! 내가 네 집에 가야 되겠다.”

이게 묵직한 현실이에요. 더 이상 그 이후로 삭개오가 더 이상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할 수 있는 모든 자격이 박탈된 겁니다. 사적인 나의 일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주님의 구원이 내 안에 거해버렸거든요. 주님의 현실과 주님의 세상이 나를 눌러버린 거예요. 완전히 묵직하게 눌러버렸다 그 말이지요.

무슨 이야기냐?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고민거리가 있고 걱정거리가 있는데 이게 누르는 능력을 못 느껴서 지금 입에서 그런 헛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묵직하게 눌러버리면, 사적으로 애가 아프고, 돈이 없다는 둥, 이런 시답지 않는 시시한 이야기, 메르스가 어떻고, 신종코로나가 어떻고, 그런 시답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이야기가 하나님의 복음 밑에서는 꽉 납작하게 눌려서 끽 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만약에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면 그 때부터 우리는 사적인 기도가 되어버려요. 내가 나오는 기도가 되어버린다고요. “목사님, 복음 알고 난 뒤에 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내가 보기에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삭개오가 주님과 눈을 딱 마주치고 난 뒤에 할 말을 잊어버린 거예요.

제가 지난 울산강의에서 했잖아요. 복음은 우리의 과거를 지워버려요. “내가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 일이 내게 있었어요?” 과거를 지운다니까요 과거를. 그게 별 문제가 안돼요. 문제 될 일이 없다니까요. 이미 죽은 자에게 무슨 문제될 일이 생겨납니까? 죽었으면 그냥 죽은채로 있는 것이지 무슨 문제될 일이 있어요?

우리가 답입니다. 새삼스럽게 인생의 의미, 답 찾지 마세요. 우리 자체가 답이에요. 예레미야 33장 2절 다시 하겠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일을 누가 행하느냐? 여호와가 행하고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따라서 성도는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모두 박탈당했어요.

그 다음부터 나는 없어지고 내 안에 작용하는 복음의 기록이 돼요. 기록, 다큐멘터리, 주님의 다큐멘터리입니다. 나는 없고 나는 하나의 문자가, 기록이 되는 거예요. 죄로 죽은 자를 주님이 이렇게 손대서 이런 식으로 말씀대로 무시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그 기록에 우리가 편입되는 겁니다.

세상에서는요, 기도가 하나의 기도가 아니라 여럿의 기도가 있어요. 수많은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무시로 기도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기도밖에 없는 거예요. 단 하나, 일관된 기도, 5분전, 5분후, 5년 전, 10년 전, 기도가 동일하게 계속해서 연속성을 이루는 기도, 그게 무시로 기도에요. 시도 때도 없는 기도, 동일한 기도가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 하여금 기록물로 나오는 겁니다.

주님이 하신 기록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의 성취에요. 우리기록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라는 뜻이에요. 사실은 불신자들도 기도한다 하지만 불신자의 기도란 평소에 자기 생각의 연속이 그들의 기도였습니다. 평소에 걱정하고 염려한 그것이 그대로 바깥으로 튀어나오니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연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기도는 죄를 더 발산시키는 기도가 되는 겁니다. 사적인 기도와 신약에서 말하는 무시로 기도의 내용이 구약에서는 중첩되어서 나오는 구절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왕 때 일어난 일인데요. 이스라엘 주변에 암몬과 모압이라는 나라들이 있었어요. 사해바다 동쪽, 지금의 요르단 지역의 주민들이 그 당시에 암몬과 모압이었습니다.

그들이 연합군을 이루어서 유다나라를 쳐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사해바다 건너서 엔게디에서 예루살렘으로, 북서쪽으로 방향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쳐들어올 때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사적인 기도입니다. 역대하 20장 12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기도를 했어요.

기도를 하니까 제사장 중에 야하시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아까 설교한 내용은, 신약에서는 우리자체가 응답이에요. 우리 자체가 응답이고 무시로 기도한다는 것은 왜 내가 응답이 되는지를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도라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순서가, 먼저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는 겁니다. 잊지 마세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구약에서는 먼저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신약에서는 먼저 응답부터 먼저 챙기고 왜 이런 응답이 어디서부터 흘러 나왔는지를 질문을 찾아가는 것이 신약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기도를 하니까 역대하 20장 17절에 보면 여호와의 응답이 나옵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너희는 지켜보라는 그 말이지요.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15절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 그 말입니다. 이게 중첩되어 있어요. 사적인 기도와 그리고 무시로 기도, 하나님의 응답된 기도가 구약에는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시작은 땅에서부터 시작되니까, 답답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하기를,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다.’ 너희들이 하는 전쟁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들이 뭘 했느냐?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전쟁이후에 치를 행사가 뭐냐? 찬양, 찬송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가대를 만들어서 아직 전쟁하지도 않았는데, 전쟁 시작하려는데 전쟁의 끝 상황을 성대가를 앞장세워서 노래를 불러버린 겁니다. 적들이 놀랐지요. ‘미쳤나?’ 그런데 전쟁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 골짜기를 브라가골짜기, 찬송의 골짜기에요.

하나님께서 유다에 모암과 암몬으로 하여금 쳐들어오게 하신 것은 사실은요, 남쪽 유다나라에 묻는 겁니다. 너희가 답인 것을 왜 너희가 잊어버리고 사느냐는 그 말입니다. 너희들은 사적인 네 걱정을 하는데 걱정을 해도 하나님이 걱정을 해야지 주제넘게 왜 네가 네 인생에 대해서 걱정을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답답해서 기도를 하게 된 거지요. “아이고, 죽었나이다.” 아까 삭개오 이야기 잊지 마세요. 삭개오는 기도하지 않았어요. 주님 눈만 딱 보고 난 뒤에는 일체 자기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네 배나 갚겠나이다. 내 것입니까? 주님 것이지요. 네 배나 값겠나이다.” 전혀 자기를 돌보지 않아요. 자기 목숨이 이어지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부라가찬양대가, 물론 제가 지은 이름입니다만, 그 찬양대가 불렀던 노래 내용이 무엇일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제가 생각한 것은 이 노래에요.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 때 울어요.” 주님 그리울 때 그 때는 주님 찾으라는 그 말이지요. 제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별보다 더 아픈게 외로움인데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때 울어요.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때 울어요.” 나 훈아 노래거든요.

성도가 할 것은 무시로, 무시로 “왜 이런 죄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어찌해서 내가 이렇게 건짐을 받았나이까. 이것은 도대체 납득이 안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공로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일을 치렀는데, 주님이 기도하고, 주님 자신이 기도한 것에 응답을 했는데 덤으로 얻어진 전리품이 뭐냐? 성도가 생겨버린 거예요.

세상 사람들의 기도라는 것은요, 기껏해야 숟가락으로 팥죽 뜨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숟가락으로 팥죽을 떠보세요. 숟가락 속에 있는 팥죽과 대접 안에 있는 팥죽과 똑같은 팥죽이에요. 자기 딴엔 기도한다고 폼을 잡고 마음 다잡고 새벽 5시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해봤자, 그 시간을 특별한 시간으로 정해봤자 숟가락 속의 팥죽이나 남아 있는 팥죽이나 똑같은 팥죽인데, 그 마음이 그 마음인데 그게 응답이 되겠어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걸음 더 나가야 돼요. 악령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두부에 못을 박아봅니다. 여러분, 두부에 못 박아버리면 못이 쑥쑥 잘 들어가는 것 같지요. 맞아요. 잘 들어가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두부에 못박아버리면 두부가 벽돌 됩니다. 왜? 우리 안이 빈 공간이 아닙니다. 악한 영이 있어서 내가 만약에 기도나 한다 싶으면 갑자기 순한 맘조차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마음으로 더 딱딱해져요.

기도하고 난 뒤에 마음이 더 딱딱해지고 완악해진다니까요. 기도하고 난 뒤에.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답을 이미 노리고 기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될 때 나는 응답이라고 간주하겠습니다. 하나님, 나하고 거래합시다.’ 이렇게 나왔던 그 자체가 죄의 몸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기도에 대해서 이미 언급을 했어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잘 귀담아 듣지 않는 것 같아요. 6-8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 대목에서 사람들이 제일 헷갈리는 것은 주께서 무엇이 있어야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내가 “이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는 기도는 제발 좀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왜? “내가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입에 담는 것은 이방인들, 지옥 갈 인간들이나 그런 제안을 하지 정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택한 백성은 “주님이여,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하는 기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역대하 19장에, 여호사밧왕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북쪽나라 이스라엘하고 정치적 외교술을 벌인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남쪽의 대통령이 북쪽의 김 정은이 만나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한 거예요. 서른다섯 살 먹은 애가 뭘 압니까? 철딱서니 없는 애를 지도자라고 인정해주고. 철없는 애인데 그게 뭘 안다고 이야기가 돼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하나님을 믿는 여호사밧이 정치적으로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 만난 거예요. 만났을 때 예후라는 선지자가 하는 말이 이거예요. 2절에 보면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 악한 왕을 왜 당신이 나서서 좋다고 만나십니까?”라는 말을 했다는 거지요. 이 말의 깊은 의미는 이겁니다. 이미 복음에 의해서 우리가 죄의 몸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내가 나하고 의논하면 안돼요. 왜? 내가 악한 자니까요. 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 있는 몸이거든요. 악한 영이 있는 몸, 마귀가 있는 몸이라 하나님을 싫어해요. 미워해요.

그런데 왜 내가 내편을 듭니까? 내가 내편을 들어서 내가 왜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이런 짓은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그게 이방인들의 기도에요. 제가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여러분은 속으로 ‘그럴 줄 알고 아예 기도 안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데 고린도후서 12장에 가면 사도바울이 세 번이나 기도한 대목이 나와요.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천당 챙겼고, 구원 챙겼고, 십자가 피 챙겼고, 이제 기도할 것은 없다.’ 이게 자고에요. 이것은 사적인 욕망을 본인이 달성했다고 지금 여기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위해서 죽은 자가 살아났는데 계속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옛날 철없던 그 시절처럼 나를 위해서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것. 밥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이 없으니까 별 기도할 것이 없는 거예요. 사명이 없는 거예요. 사명감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줬습니다. 아프지요. 아프니까 자동적입니다. 기도할까를 고민할 것도 없어요.

아프면 아픈 거지요. 아픈데 “즐겁다. 난 성령의 열매로 화평하다.”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프면 그냥 아픈 거예요. 아프니까, 누르니까 튀어나오는 겁니다. 사적인 것이 튀어나온 거예요. 이미 죽은 옛사람이 튀어나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탄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는데 지금도 사탄이 얼마나 유용하지 몰라요.

사탄을 통해서 계속 성도로 하여금 복음만 전하도록, 사탄이 일군이 되어서, 뱀이 휘감아서 우리 인생에 계속 개입하고 있는 겁니다. 사탄이 사도바울에게 육체에 가시를 주니까 천하의 사도바울도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삼세번이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한 거예요. 이 가시 좀 빼달라고. 가시 좀 빼달라고 세 번 기도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는 가시가 없는데요.” 하는데 가시가 뭐냐? 세상유혹을 가지고 가시라고 해요. 구원받기 전에 나 위주로 살았던, 나만 챙겼던 그것이 가시에요. 여러분의 가시는 뭐냐? 여러분이 너무 잘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위로의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너무 예쁘고, 내가 너무 건강하다는 것, 나의 가진 부동산이 좀 많다는 것 그것이 가시에요.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가시고.

만사가 다 잘 풀리니까, 사도바울 같으면, 주여, 만사가 잘 풀려서 내가 자고하게 되었는데 이 가시 좀 빼 달라고 세 번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네요. 속으로 빙그레 웃든지 말든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사도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육체의 가시라는 것은, 나를 건드림으로서 ‘나 무시하지 마라. 나 잘나간다.’ 그걸 대외적으로 펼칠 수 있는 그런 바탕 그것이, 바로 예수의 복음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이 바로 복음을 가로막는 가시인 겁니다. 내 자식일 수도 있고, 내 손자일 수도 있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속에 악한 영이 없는 진공상태가 아니라고요. 예수님이 보낸 악한 영이 우리 속에 항상 있어요.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고 주님이 다녀간 어두운 세상인 것을, 말씀만 벗어나면, 설교만 벗어나면 다 잊어버려요.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중에 반 고흐가 있습니다. 그 화가의 작품을 보게 되면, 그냥 모든 사물이 생명력으로 불타서 하늘로 올라가요. 생명력으로 휘휘 휘감아 돌아가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작품, <해바라기>라든지 모든 작품이 생명력으로 휘감고 돌아갑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살고 싶다는 거예요. 그게 육체의 가시 아닙니까? 아니고 뭡니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알아요. 사도바울이, 이왕 사는 것 고통 없이 살고 싶다는 겁니다. 세 번씩이나 기도했어요. 그 성령 받은 사도가. 사적인 기도를 했다는 말이지요. 응답은 어떻게 나왔는가? “그만 됐네. 이 사람아!” 그게 응답이었어요.

한결같은 것, 무시로, 기도하기 5분 전이나 기도하고 5분후나 한결같음, 무시로. 응답은 가시 박힌 그 자체가 자고하지 않기 위해서, 자고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손을 댄 그 자체가 응답이다 그 말이지요. 반 고흐가 그렇게도 생명, 생명을 찾다가 결국 죽지요.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총에 맞았다는 설도 있고 하여튼 죽어요.

그 후 반 고흐를 돌봤던 동생 테오, 꼭 한국이름 같은데, 그 테오의 무덤도 반 고흐의 무덤 옆에 나란히 있어요. 사람들이 그 반 고흐를 기립니다. 그 생명력을 보면 자기 속내가 그대로 보이거든요.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자기가 죄의 몸인 것도 모르고 그냥 악령에 의해서 나오는 그 본성은 뭐냐? ‘살고 싶다. 어디 교회 없나? 예배당 없나?’ 살고 싶은 거예요.

미국의 증권가에 예배당이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맨해튼 한 복판에. 1920년대, 30년대 넘어가면서 평소에는 교회에 사람이 없다가 대공황으로 주식이 폭락하니까 교회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거예요. 주식이 폭락해서 자기회사가 다 망하게 되었을 때 믿을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는 거예요. “주여, 회개합니다. 이제 돌아옵니다. 살려주옵소서.” 예배당이 비좁았어요. 바글바글 했어요. 살고 싶다고. “내 생명력 어떻게 합니까?” 이미 죽은 몸인데.

여러분, 시체는 시체다워야 돼요. 폭우가 쏟아질 때 시체를 그냥 두면 안되잖아요. 거적때기로 덮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거적때기가 뭐냐? ‘무시로 기도’에요. 날마다 무시로 기도해서 거적때기로 덮으세요. 이미 답은 여기 있다. 이 세상아. 왜? 복음 때문에. 지금 복음이 활동하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지금 옥중에 갇혀 있어요. 사도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으면서 에베소서를 쓴 겁니다. 갇혀 있지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옥에 갇혀도 복음만은 누구도 가둘 수 없이 위에 우리를 덮고 있는 거예요. 묵직한 현실이에요. 촐랑대는 현실, 나만의 현실이 아닙니다. 너 잘났나, 나 잘났나, 그런 현실이 아니에요.

묵직한 현실,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현실, 이 세상에는 어떤 해답도 없어. 마땅히 불바다 되어야함을 복음을 통해서 보여주는 바로 그 복음, 나는 매이더라도 복음만은 매이지 않게 기도해 달라고. 다시 말해서 죽은 자들아, 네가 살게 된 것은 복음이니까 복음에 대한 사명, 그것을 위해서 늘 무시로, 시도 때도 없이 삶 자체가 복음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삶이 되라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따라서 사적인 기도는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한테 환원되는 응답이라면 무시로 기도는 주님께서 일을 이미 계획하셨고 성취하셨습니다, 를 감사하면서 날마다 나를 없는 사람으로, 하나의 경우지요, 내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의이름으로 쓰이게 하옵소서, 라는 주님이 하신 내용만 여러분의 기도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가 무슨 할 말이 많겠습니까? 하지만 마귀가 들쑤셔서 우선 사적인 기도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고 현실인 것을 깨닫습니다. 인정합니다. 그걸 통해서 이미 답은 주어졌고, 주께서 죽으셔서 떠나갔던 이 세상에서 같은 운명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도리어 영광으로 여길 수 있는,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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