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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2 12:50:32 조회 : 686         
   사회속의 약속20011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사회속의 약속(에베소서 6:5-9)

음성        동영상 . Youtube

 링크 : https://youtu.be/EGvxSmSTGWE, Hit:52
 이근호 20-01-12 13:39 
사회 속에서의  약속

2020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6:5-9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가족 안에서 약속을 구현할 때는 한 ‘개인’이라는 의식보다 서로 이어진 혈육적 관계가 우선됩니다. ‘남편-아내’ 관계라든지 ‘부모-자식’ 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피어납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게 되면 더 이상 남편, 아내,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는 소용없습니다.

이 사회 안에는 ‘한 인간’으로 통합니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으로 행세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의 엄마다” 혹은 “나는 누구의 남편이다”가 소용없습니다. “너는 누구냐?”에 대해서 내가 누군지를 사회에서만 통하는 식으로 답변할 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이 사회에서 내가 한 개인으로 인정받게 하는 그것이 뭘까요?

그것이 바로 ‘서열화’입니다. ‘계층화’입니다. 이 세상은 뭔가를 기준으로 해서 종과 상전으로 구분지어집니다. 예를 들면, 과(科)에서의 상전은 과장입니다. 과장이 상전이고 나머지는 그 과정의 종이 됩니다. 하지만 부(部)서에 가서 부장이 상전이 되고 과정은 그 부장의 종이 됩니다.

종의 종이 생기게 마련이고 상전의 상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과연 이 사회에는 이런 서열을 무엇에 준해서 정해지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회를 옳지 않게 봅니다. 수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눈 가림만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식’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또한 ‘공갈’과 ‘협박’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수상한 이유는, 상전과 종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기어올라가서 최고 상전이 되겠다는 열망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게 범죄한 마음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움직인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이들 인간 사회에서 ‘상전’이 되는 것을 선(善)으로 여기고 ‘종’이 되는 것을 악(惡)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부지런히 상전을 목표로 살아가니 ‘눈가림’ 할 수밖에 없고, 또한 상전된 입장에서 더 상전을 추구하니 공갈이나 협박을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전이 상전됨으로 주위에서 인정받는 객관적 증거는 바로 돈입니다. 돈이란 ‘인간 노동력’의 결과물‘입니다.

사람들은 지는 것이 익숙해지지를 않습니다. ‘가진 자=승자=선한 자=복받은 자’는 공식이 통합니다. 이게 사회입니다. 이는 곧 스스로 노력하고 절약하게 되면 사회에서 인정받는 선한 자가 될 수 있음을 희망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 타인의 노동을 타인이 모르는 방식으로 갈취내지는 착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생리입니다. 자본주의는 돈이 우선이지 사람이 우선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은 생각하기를, 자신의 정당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서 정당한 노임을 받기에 법적으로 하등 하자없이 ‘자유로운 주체’가 행사한 적법한 교환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기업을 비롯해서 모든 조직은 필히 ‘확대재생산’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1년만 장사하고 그만둘 일을 하기 위해 사업 벌리고 노동자들을 모집한 게 아닙니다. 내일을 기약하면서 지속적으로 자금을 따로 모아두어야 합니다. 그게 ‘자본’입니다. 본위아니게 착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가정도 마찬가지고 모든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수녀원이나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바로 상전이 되는 것이 곧 구원이요 복받은 것이요 선한 자라고 인정받는다는 잘못된 서열화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상전과 종으로 틈이 갈라지고 차이가 나는 것은, 선과 악의 인식 때문이라면 그 인식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인식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선과 악 사이를 구분하는 그 인식 자체가 이 땅이 하늘과 틈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산가족을 상봉하면서 자식잃은 부모는 ‘착한 아들’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을 찾습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인간 세계는 악마로 인해 잘못된 서열화가 움직이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니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빌 2:6-9)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백성은, 주님이 보여주시는 이 서열화를 따로 보조 맞출 수 있는 백성입니다. 낮은 곳이 구원의 장소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구애받지 않고 즐겁게 움직이는 자를 말합니다.

복음 알고 난 뒤에, 세상 살기 힘들어서 칵 죽고자하는 자가 백성이 아닙니다. 이는 자기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일 뿐입니다. 참 백성은 복음을 위하여, 약속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백성은 어떤 식으로 생산이 될까요? 구약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은, 율법을 지키면 살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죽은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가 지키고자 함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부의 관계에서 가족의 관계로 그리고 사회의 관계로 약속 작용을 진행시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형성된 ‘자아됨’은 세상에서 돈 우선으로 살아가는 개별자가 가정 속으로 그 정신이 들어오고 부부사이에도 끼어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경제자립이 되지 않는 자식은 자식도 아니요, 돈 못벌어오는 남편은 남편도 아닌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교회에서 언급해도 이런 자아성이 이미 사회에서 만들어졌기에 신앙생활이란 기껏 해봤자 오락에 불과합니다. 오락이란 자아의 가치를 안 다치고 자신을 좋은 미래와 현재 생활을 기대하는 놀이를 말합니다.

인간의 자아상이란 하나님이 주신 고통속에서 형성됩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면서 구성되는 것이 자아상이기에 이 세상에 그런 자아상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자신을 기어이 상전부류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하늘 사이에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이 세상에서 치워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 하늘나라에 올 수 있는 발판은 상실되었습니다. 종교나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대체하는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자체 오락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런 마음에 구멍을 뚫는 겁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인간을 따라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라는 선물이 인간의 마음을 관통하고 그 관통된 사랑을 따로 개별자들이 통합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사회 속에서 비로소 자기 주제를 알고 오직 물로 포도주되게 하신 그 예수님의 피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1-16 04:38 
58강-엡 6장 5-9절(사회속의 약속)200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 5-9절입니다. 신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6:5-9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지난 시간까지는 남자와 여자, 부부, 부모와 자식, 이렇게 인간이 단독적으로 자기자신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혈육관계에 있어서 자기가 처한 입장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 또 부모에 대해서 누구에게 자식이 된다는 것, 또 누구의 아내가 된다는 것, 남편이 된다는 것이 하나하나가 복음을 나타나는 요소로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남자, 여자, 부모, 자식이 아니라 8절에도 9절에도 나오는데 7절 끝에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고 9절 끝에 보면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해서 여기에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미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는 남자, 여자, 부모, 자식이라는 혈육적인 가족의 범주를 벗어나서 하나의 개인으로서 사회에 나설 때에 이 때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연속적으로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나는 예수님역할, 너는 교회역할, 가정에서 나는 약속을 전달하는 부모역할, 약속을 전달받는 자녀역할.

이때는 사람이라는 의식보다는 누구의 자식이고 부모이고 그런 약속의 관계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이 가정을 떠나서 사회에 나왔을 때에 부모라는 것이 통하지 않고, 자식이 통하지 않고, 누구의 아내나 남편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고, 그 때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움직여 나가는 겁니다. 개인으로 움직여 나갔을 때 그 때는 복음을 증거하는 요소로서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되고,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되느냐의 그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회에 나갔더니 어떤 것이 나오느냐? 5절에 “종들아 두려워말고” 그렇게 되어 있고 그리고 같은 5절에 상전이 나오는 거예요. 종이 나오고 상전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종이라는 개인이 따로 있고 상전이라는 개인이 따로 있어버려요. 그러면 종이 되는 사람, 상전이 되는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이가 발생돼요.

부모자식 간에는 약속이 개입되어 있고, 부부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개입되어 있는데 사회에 나가보면 개인으로 활동하게 되고 저쪽도 개인으로 주어질 때에 그 때에 너는 종이 되고 너는 상전이 되면서 여기에 서열화가 생겨버립니다. 서열화가 생기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6절에 ‘눈가림만 하지 말라’ 눈가림 하지 말라, 같은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되지 말라. 눈가림만 하는 자처럼 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로 눈에 보이는 사람만 즐겁게 넘어가려고 하지 말라고 되어 있고 9절에 보면, 상전들이 공갈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길한 거지요. 이 사회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나는 이제 하나의 단독자로서 개인으로, 인간으로 살기 때문에 ‘공갈을 쳐야지’ 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사회에는 불길한 요소들이 항상 상주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옳은 사회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 보기에 거절당할만한 사회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거기에 우리는 하나의 개인으로 나서게 되었을 때에 ‘과연 복음을 아는 자, 성도가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공갈이 상주화되어 있고, 이미 그것은 당연시 되어 있고, 종들은 주인이 눈만 가리려고 하는 짓거리가 너무나 당연시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구별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아. 너희는 이렇게 대처해야 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손대기 전에 이미 이 사회는 망가져버린 사회에요. 사회개혁에 나서서 이 땅을 천국 만들려는 그런 부질없는 짓거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다만 ‘이 사회에서 복음이라는 이름의 약속은 어떻게 드러나느냐’는 여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되는 겁니다. 좋은 사회 만들겠다는 그 의도가 뭘까요? 그것은 약속위주도 아니고, 복음 위주도 아니고, 내가 하나의 개인으로서 편하고 싶다는 욕심의 발로로서 좋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호주가 좋다고 호주에 이민가고, 캐나다 좋다고, 미국 좋다고 이민들 가지만 다시 돌아온 사람들도 많아요. 왜 갔겠어요? 자기 몸 하나 편하려고 간 겁니다. 괜찮은 사회가 있는가를 찾고자 해서 간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괜찮은 사회는 없어요. 어디가도 서열화되어 있고 계층화 되어 있습니다. 계층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서열이나 계층이라 하는 것은 그 계층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어요. 그 틈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긴 틈인데 그게 뭐냐? 주인이 될 때 그것을 선으로 보고, 종이 될 때 그것을 악으로 보는 겁니다. 주인이 되면 복받은 것으로 여기고 종이 되면 저주받은 것으로 여기더라는 말입니다. 이사회자체가.

이 사회는 선과 악 사이를 벌어지게 한 거예요. 틈이 있게 만든 겁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고, 그 둘이 섞이지 않고 갈라져 있다는 겁니다. 갈라져버리면 그 틈이 생기지요. 틈이 생기면 서열화가 생기는 거예요. ‘너는 어느 편에 속하는데?’ 선이라 하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대로 주인 쪽이고, 종이 된다는 것은 팔자 말아먹은 것이니 이것은 악한 인생, 저주받은 인생이라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틈 사이에서 나 개인은 틈을 기어 올라가서 기어이 좋은 신분, 주인이 되는 쪽으로 몸부림치고 노력하게 되겠지요. 노력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 종이 되었으면 언젠가는 주인이 될 것을 여망하면서 눈가림만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주인이 된 것은, 주인이 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이 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밑에서 기어오르는 그것을 발로 차야지요.

그들은 공갈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인간이 주인과 종으로 갈라지지만 이 사회자체가 내가 얼추 주인인가 싶지만 그 주인 뒤에, 그 위에 또 주인이 있어요. 과장 위에 부장이 있듯이. 자기 과에서는 과장이 최고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주인노릇 하고 밑에 오는 신입사원을 종으로 부리지만 갑자기 부장이 들이닥치면 의자에서 일어나서 “부장님 오셨습니까?” 하고 컨셉이 종의 컨셉으로 확 달라지잖아요.

계속 머리위에 머리, 머리위에 머리가 계속 있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개인화된 것, 개별자가 된 서글픈 운명입니다. 계속해서 뭔가 높은 자리를 선이라고 여기고 낮은 자리를 악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사이, 틈을 메우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까 사는 것이 어수선해요. 하, 집에 오면 서글프지요. 한평생 사는 것이 결국 이거냐, 저주받은 그 틈을 내가 언제까지 마냥 과장으로 머물겠느냐, 부장으로 언제 승진하느냐, 언제 종에서 벗어나서 상전이 되느냐를 계속 추구하는 그 모양새, 이거 정상 아닙니다. 이거 비정상적인 사회에요.

비정상적 사회에 우리 개인이 하나를 보태주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할 때 약속이라고 했지만 약속을 구약적으로 살펴보면 율법이에요. 하나님의 계시니까 율법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보면서 이스라엘에 아주 특이한 점이 있어요. 이스라엘나라가 율법을 지키면 살고, 율법을 어겨버리면 죽는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개인이 얼마나 애쓰고 힘쓰느냐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율법대로 살면 살고, 율법대로 못지키면 죽는 나라라는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하나님께서 살려보자 하는 것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내가 노력하면 살고 내가 나태하면 죽는다. 내가 몸부림치면 살고 내가 태만하면 죽는다.’ 그런 인식, 사회에서 그렇게 우리는 양육 받아 왔어요.

이걸 몸으로 체화된 습관이라 하는데요. 체화된 습관, 그것과 방금 제가 이야기한 성경, ‘율법 있으면 살려줄게. 율법 없으면, 율법 버리면 내가 너 죽여 버린다.’라는 이스라엘의 모습, 이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이스라엘의 그 운명을 우리가 모른 체해야 됩니까? ‘그런 나라 없어.’라고 애써 부정해야 되겠어요? 성경에 나와 있는데요.

내가 스스로 살려고 할 때 도대체 뭘 살리려고 하는가를 보세요. 내가 말씀을 살리려고, 복음을 살리려고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과 주님의 공로를 살리려고 애씁니까, 아니면 나를 살리려고 애씁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칵 죽어버릴까요?” 하는데 복음 아는 나를 위해서 죽지 마세요.

복음을 위해서 죽어야지, 복음 아는 나 편하려고 내가 일찍 자살하거나 누구처럼 산에 가서 누워 있거나 하는 것, ‘이제 쌀 떨어졌으니 나 죽으련다. 쌀 떨어졌으니 이제 살기 싫다.’고 죽는다는 것, 집에 쌀 떨어져서 오해해서 죽겠다는 그런 모습은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평생 살아왔는지 들통 다 내버렸어요.

에베소서 6장에서 종과 주인, 상전과 종의 이야기를 언급한 것은 이 사회에 대해서 하나님은 조금도 긍정하지 아니하고요. 이 사회를 부정적인 사회로 보면서도 그 가운데서도 부정적인 사회, 그 나쁜 사회가 약속을 약속대로, 복음을 복음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조건으로 필히 있어야 된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도 닦는다고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어디에 들어가야 되느냐? 우리는 사회 속에 들어가 봐야 돼요. 사회 속에서 생활을 함으로서 내가 두 패 중 하나라는 말이지요. 종에 속하든지 상전에 속하든지 둘 중 하나인데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자기가 말단 사원이라도 ‘내가 취직 못한 사람보다는 상전 아니냐. 더럽지만 사표 안내는 이유는 그래도 여기 회사는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이다.’ 그 말이지요.

‘전쟁터가 지옥보다는 낫지 아니하냐.’ 일종의 자기우월감, 상전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참고 견디면서 회사생활하고, 직장생활하고, 농사짓고, 힘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꿈지럭거리면서 뭔가 일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나는 남자다, 아내다, 남편이다, 부모다, 자식이다, 하는 그러한, 복음을 더욱더 확실하게 드러내는 가정중심의 모든 것은 여기서 다 소멸해 버리고 ‘나는 사람이다. 남자나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자나 여자는 묻지 말라.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나는 살아남아야 되겠다.’ 그것만 달랑 남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이 사회가 내가 문제가 있는 존재인지를 확실하게 드러내 주는데 그런게 이 사회밖에 더 있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인간은 남에게 지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아요. 희한해요. ‘남에게 져서 너무 기쁘다.’ 그런 것 없습니다. 물론 도가 트이면 몰라도. 도가 트여도 안될걸요? 인간은, 이 사회는 일을 요구하고 일을 하는 순간 남자, 여자, 부모, 자식, 다시 말해서 약속을 담아내는 관계의 요건으로서의 모든 것이 다 떠나버리고 남는 것은 몰입과 몰두만 남아요.

인간이 일을 할 때 몰입하고 몰두하는 겁니다. 가정주부가 김장 할 때 몰입하잖아요. 설거지 할 때나 빨래 할 때도 몰입하듯이 모든 인간이 몰입할 때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부모인지, 자식인지, 그런 것이 없어져요. 하나의 개인으로만 남아요. 몰입을 하면서 자기 일에 몰입할 때 누가 오게 되면 거기서 뭐가 이루어지는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만남이 이루어지면, 여기서 좀 어려운데요. 견뎌야 돼요. 저 사람이 지금 나에게 가까이 오는 거예요. ‘저 사람’이에요. 남편, 아내, 자식, 부모가 아니고 ‘저 사람’이 나에게 와요. 그래서 그 순간 나에게 오는 저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의 사람으로 몰입하는 거예요. 참,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인간이 일에 몰입할 때는 내가 사람인지 인간인지 뭔지 몰라요. 그러나 누가 나에게 다가오게 되면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방어에 나서는 겁니다. 왜? 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본성이 그래요. 지는 것을 싫어해요.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쉽게 예를 들면, 나라는 것이 하나의 개인인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간은 고통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살기위해서 고통하다 보면……, 이게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저주거든요. 모든 인간에게 준 저주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이런 고통스러운 환경을 이겨내야 된다.’ 그렇게 해서 고통을 이겨내면 낼수록 점점 구체화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나다.’ 에요. ‘나는 하나의 개인이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 이것이 점점 구체화되는 겁니다.

옆에서 누가 도와주게 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남에게 의존하게 돼요. 그러나 나중에 독립해서 자기 몸소 일을 하게 되면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어요. 왜? 모든 고생을 감내하면서도 지금의 나가 되기 위해서는 참아냈잖아요. 눈물 훔쳐 가면서, 아픔 몸 끌고 지금의 나 하나 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다 보니까 ‘내가 이 고통도 나를 위한 고통이라면 내가 감수하고 이걸 받아서 수용하겠다’ 이렇게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오후예배에서 욥기 보고 있잖아요. 욥기에서 그렇게 살아온 나에게 알 수 없는 고통이 와버려요. 내가 예상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내가 이 고생 참으면 나중에 월급 받는다.’ 이렇게 예상되는 고통이 아니에요. “국민 여러분, 올해 경제 어렵고 2퍼센트 성장밖에 예상 안되더라도 참읍시다.” 하면 그게 예상이 된다고요. 욥같은 경우에도 자기가 고생해서 만들어진 내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는 욥이나 욥의 친구가 동일해요.

그런데 욥의 다른 점은 뭐냐? 예상 밖의 고통이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돼요? 도대체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어요. 상전이 선이고 종이 되는 것이 악인데 나는 지금 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남 지배하려고 고생을 하는 거예요. 고생도 보람이 있는 거예요. 올라가니까.

그렇게 올라가고 올라갔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를 바닥으로 낮추었다. 그러면 나는? 나는 뭐예요? 그동안 내가 꾸려온 나는 뭐가됩니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이에요? why me? 왜 하필이면 저를? 인간은 가난하게 될까봐, 가난한 것이 악이니까, 가난하게 될까봐 바들바들 떨어요. 그리고 건강은 선이고 몸 아픈 것은 악이니까 몸 아플까봐 바들바들 떨고 사는 겁니다. 다들 개인이 그렇게들 살아요.

그게 모인 것이 사회고 그 사회를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언급을 하는 겁니다.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성의껏 일은 하더라도 주인이 없으면 태만하기 마련이에요. 눈가림으로 하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내가 끌어 모은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밑의 직원들 공갈 협박하면서 “게으르면 너 내보낸다. 취직하려고 한 달 전에 이사까지 왔지? 오늘부로 너 사직이야.”

해고는 살인입니다. 해고는 살인이에요. 해고당하면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 가족이 다 죽어요. 저도 네 번 해고당했어요. 교회에서. 이것은 악한 사람이나 받을 대우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생각입니다. 따라서 어쨌든간에 이런 수모를 당하기 전에 빨리 어느 정도 안전빵이 보장되는 상전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돼요. 그 틈새를 메워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선과 악 사이의 틈을 벌어지게 한 그 틈이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틈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거예요. 네가 선악을 안다는, 그것으로 중무장되어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단절되어 있다는 겁니다. 차이가 난 것, 틈이 난 거예요. 선과 악으로, ‘나는 선한 사람이 되어서 복 받아야 돼’라는 의식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뜻이고요. 그걸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사회생활을 함으로서 우리는 왜 갇혀 있는가를 알아야 돼요. 여러분이 이해되는 눈치를 줘야 계속 설교를 할 수 있어요. 수학에 항등식이 있고 부등식이 있습니다. 항등식이란 양쪽이 동일하다는 뜻이에요. 부등식의 특징이 뭐냐 하면, <, 혹은 >, (……은 ……보다 작다, 혹은 크다) 그렇게 돼요. =(항등식)이 아니고 크다, 혹은 작다로 되어 있어요. 이게 부등식이에요. 갈매기표시를 옆으로 뉘어놓은 기호로서 부등식을 표시한다고요.

부등식이 되어버리면 그 부등식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개별자가 되지를 못해요. 그 안에서는 틈이 없어요. 어떤 통이 있는데 그 통에다가 쇠구슬을 집어넣어 보세요. 쇠구슬을 집어넣을 때 우리가 쇠구슬이라면 나라는 쇠구슬, 옆에 있는 너라는 쇠구슬, 전부 다 단자가 되지요. 개별자가 되고, 개체가 되고, 사물이 되어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누가 더 높은 자리 가는가 보자, 투쟁해보자, 살아보자, 누가 더 똑똑한지 공부해보자, 대결해보자, 내신 몇 등급이야, 이 모든 것이 되지만 주님께서는 부등식 통 안에서 그걸 흔들어버려요.

그러면 너는 어디서 어디까지나 함께 갇혀 있는 꼴이 된다는 그 말입니다. 차이가 없어져요. 틈이 없어진다고요. 선악과, 선과악의 틈을 인간들이 악마에 의해서 부여받다 보니까 ‘나는 무조선 선한 쪽, 너는 나보다 못한 종이 되어야 해. 악한 쪽이 되어야 돼.’라고 우기고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부등식이라는 통 안에 들어 있어가지고 그 차이는 의미 없는 차이에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산가족이라 해서 방송에 나와서 내가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다고 할 때에, 30년 40년 만에 자식 찾을 때 착한 아들 찾겠어요, 나쁜 아들 찾겠습니까? 착한 아들, 나쁜 아들 고려하지 않고 그냥 그 아들이에요. 내 아들 찾으면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 찾기에요. 착하고, 악하고, 선하고, 그런 것은 주께서 묻지도 않습니다.

인간들이 개별자, 자기가 하나의 쇠구슬처럼 딱딱해졌는데 고통이 나를 나로 딱딱하게 만들었어요. 살아보려고 애쓰다 보니 점점 더 자기속으로 응축이 되고 축소가 되는 겁니다. 나에게 철저하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줬지만, 그래서 율법을 지킨다 했지만 멸망했어요. 하나님의 율법은 그게 아니에요. 선과 악 그 자체가 ‘율법 안에 갇혀 있음을 알아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나쁜 쪽으로 안가고, 될 수 있는대로 이 사회에서 바닥을 안치고 높은 계급에 위치하려고 우리는 교회와도 철저하게 지키고 만전에 만전을 기하잖아요. 한석규가 한 cf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원산지까지 직접관리하고, 여덟 단계로 거듭 검증하고, 녹용팁까지 담아내는 정관장, 저의 녹용은 천녹입니다.”

8단계로 거듭 검증하고, 혹시 놓칠까봐 팁까지 담아내는 녹용, 천녹. 철저에 철저를 기했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 모습이 그 모습 아닙니까? 그러면 남는 것이 뭐냐? 개별자가 남지요. 단자가 남지요. 이게 약속을 보여주는 성도의 모습입니까?

개인과 개인에서 자기가 높은 자리에 가기 위해서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오해를 하고 있어요. 노동자나 자본가나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가 인간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치를 교환함으로서 나는 받을 것 받고 너는 줄 것 주고, 내가 내놓을 노동을 내놓고 너는 네가 내놓을 월급을 내놓으면 우리는 합법적이고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노동법, 즉 취업할 때 계약에 의해서 하잖아요. “얼마 줄게. 이거 해라.” “알겠습니다.”

자기는 더도 덜도 말고 동등한, 자본가와 노동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계약을 했다고 노동자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유로운 주체의 자발적인 법적인 교환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떠한 착취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노동자들이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사 해놓고 돈 벌어서 직원들 착취 안하고 임금 줘버리면 회사 1년도 안되어서 문 닫습니다. 회사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회사는 ‘확대재생산’이란 것이 있습니다.

확대재생산이라는 것은 지금 갈라먹기 해서 헤어지자는 그것이 회사가 아니라,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고, 한 달 후가 있고, 두 달 후가 있고, 5년 뒤에 계획이 다 있어요. 이 계획을 위해서 돈을 빼야 됩니다. 모아놔야 돼요. 저축을 해야 돼요. 기금을 마련해야 돼요. 소비다변화 해야 되지요. 해외원자재 값 변동 오기 전에 빨리 뽑아서 창고에 재놔야 돼요. 창고에 재놓으려면 창고비 나가야지요.

1년 일하고 그만둘 거예요? 숯불갈비집 1년 하고 문 닫을 겁니까? 아니잖아요. 그냥 생산이 아니고 확대재생산, 축소가 아니라 확대재생산 하려면 계속 돈을 저축해야 되고 모아놔야 됩니다. 노동자들은 이걸 몰라요. 자본가가 욕심 부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회사가 유지되려면 자금이 뽑아져 나와야지요. 확률이 어떻게 될지, 등락을 어떻게 할지, 달러가 어떻게 변할지를 어떻게 알겠어요?

소비자가의 취향이 변해서 이 상품 말고 다른 상품을 요구할 때 연구비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러나 삼각김밥만 팔아서는 안된다는 그 말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모든 것이 확대재생산입니다. 이 확대재생산주의를 가지고 자본주의라 하는 거예요. 자본주의 무슨 뜻이냐?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사람 나고 돈 난 것이 아니고 돈 나고 사람난 거예요. 돈 나고 사람 난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라 하는 겁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이에요.

왜냐하면 개인과 개인이 종이 되지 않고 상전이 되려면 자기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빼앗은 것이 받쳐줘야 위로, 더 위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겁니다. 세상에 착한 사람, 하는데요. 이 세상에 착한 사람 없습니다. 이미 사회가 돈이 인간의 목표가 된 이상은 착한 사람은 없어요. 손해 보면서 장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금 성경말씀 에베소서 5장에서 가정중심으로 했습니다. 부부가 1번. 가장 복음을 적실하게 보여주니까.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니까. 이게 1번이고, 2번은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약속을 자식에게 전수한다는 그것이 2번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6장에 넘어가면 3번이 뭐냐? 사회 속에서 성도가 뭐냐? 이게 3번이 되거든요.

그런데 1번은 예수님의 희생,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희생이 나오고 2번은 약속이 나오고, 3번은 사회가 나오는데 이게 1, 2, 3번으로 나오는 것이 성경의 순서지만 현실에서는 뭐냐? 3번에서 2번에서 1번으로 가요. 그러면 3번은 뭐냐하면, 돈이 주인이에요. 돈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인간이다, 할 때는 ‘내가 가진 돈은 이겁니다’라고 뭔가 뒤에 바탕이 있어야 돼요. 돈 힘이 바탕이 돼줘야 돼요.

그게 개별자로서, 단자로서 인간은 인정이 되는 겁니다. 3번으로 가서 2번으로 가게 되면, 돈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거든요. 착취당하든 말든 인간은 빌어먹고 살아서 월급 주는 것도 감사해야 돼요. “너도 출세해서 나중에 사장이 되면 되잖아.” 왜 자꾸 나에게 시비를 거느냐는 말이지요. “우리 사장님 미워요.” “미워요, 하지 말고 네가 사장되어봐라. 너도 네 직원한테 공갈 안쳤어?”

네가 과장으로서 대리한테 공갈 안쳤느냐는 그 말입니다. “네가 공갈친 것은 생각 안하고 사장이 너에게 공갈치는 것을 생각해?” 다 우리가 뭣 때문에 사는데요? 돈 때문에 사는데요. 오늘 살고 죽을 거예요? 아니면 모아놓은 돈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돈이 3번이거든요. 3번에서 2번으로 가게 되면 돈 없는 자식은 자식이 아닙니다. 돈 없는 며느리는 며느리가 아닙니다. 그게 2번에서 1번으로 가게 되면 뭐냐? 돈 못버는 남편은 남편이 아니올시다. 이제 아멘이 나옵니다.

돈 없는 남편은 남편이 아니에요. 여자는 남편 돈 보고 결혼했지, 돈 없는 남자하고 뭐하려고? 거지를 건사하려고 결혼해요? 돈도 없는 남편을 왜 붙들고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부등식 안에. 뭐는 뭐보다 크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갇혀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 남편, 아내 이야기할 때 ‘그래 나도 남편으로서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지’ 이런 생각은 할 사람이 없겠지만 혹시 했다고 치고, ‘그래 자식한테는 복음을 물려줘야 돼.’라고 혹시, 안했지만 혹시 그런 생각 할 사람 같으면 정신 차리세요. 3번이 정답입니다. 3번이 정답이에요. 인간의 인간됨은 경제자립이에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은 인간은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그것은 사람이 아니올시다. 똑바로 보셔야 돼요.

모든 약속은 자기주제파악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 나오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은 뭐냐? 그것은 오락이지요. 오락이라는 뜻은 뭐냐? 나의 부정성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항상 천당 가야 돼. 내가 지옥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왜? 나는 고생고생 하면서 나 하나 잘 되기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이것도 고생이거든요. 그 고생은 나 하나 천당 올려 보내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전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게 되면 상전이 되고, 지옥가면 그것은 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등식 안에 있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자체가 악마한테 갇혀 있는 모습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틈, 그 간격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신앙생활도 하나의 오락입니다. 이유가 뭐냐? 주님은 시신을 남기지 않았어요.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하나가 되려고 하면 어떤 매개가 있어야 되는데 현대사회는 돈으로 매개해요. 돈이 있으면 왁 달라붙고 돈 떨어지면 다 떠납니다. 돈이 매개인데 그러면 인간이 하늘나라 가려면 뭘 매개로 해야 되는가? 구약의 이스라엘은 율법을 붙들고 시도한 거예요. 율법을 만전을 다해서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쓴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끝났지요. 왜?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어떤 눈에 보이는 매개체도 하나님께서 다 치워버렸어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요. 그러면 교회나 수도원의 수도사들,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이 모든 종교단체들에서 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은 뭐냐? 치워버린 예수님의 시신을 대체해서 집어넣은 거예요.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는 것, 그리고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는 것.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없어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설치한 다리들이에요. 오락입니다. 그것은. 오락이라는 것은 날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 번 했습니다만 마태복음 16장을 다시 하겠습니다. 중요한 대목이에요.

16장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23절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과 반대되는 계열이 뭐냐? 사람의 일이에요.

이 말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에는 건너올 없다는 거예요. 끊어져 있고, 틈이 있다는 겁니다. 계곡이 있어서 인간 쪽에서 건너갈 수가 없어요.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일 뿐이에요. 이것을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 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면서 포도주를 달라 했는데 준비한 것은 물이었어요.

포도주를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양동이에 물을 담게 했어요. 인간은 물이다, 그 말이지요. 물을 들고 가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물밖에 없어요. 왜? 인간은 물이니까. 절대로 포도주가 될 수 없으니까. 물과 포도주 사이에는 틈이 벌어져 있어요. 단절되어 있어요. 끊어져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종교적인 행세를 해도, 아무리 용을 써도 물이 포도주 되지 않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850명이 밤새도록 기도해도 바짝 마른 나무위에 제단의 소에 불이 붙을 일이 없어요. 하나님과 인간의 뜻의 단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제단에다 물을 갖다 부어버려요. 불과 물은 상극이잖아요. 그런데 물을 부어버린다고요. 물을 부어놓고 그 제단 위 송아지 제물에 불이 붙겠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이미 돈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 갑을관계로 이미 형성되어 있어요. 그러면 포도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포도주가 누구냐?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포도주를 ‘내 피’라 했어요. 마태복음 26장에 27, 28절에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포도주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 포도주에요. 인간은 졸지에 물이 되는 거예요. 물은 포도주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29절에 보면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그 말입니다.

이미 종결된 포도주로서 그냥 오시는 거예요. 종결된 포도주로서. 인간 쪽에서는 주님 쪽으로는 건너갈 수가 없어요. 교회, 기독교, 이것은 전부 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없는 시신 대체하기 위해서 그냥 인간의 몸부림을 해보는 거예요. 결국 그 본색은 뭐냐? 돈인데. 신에게 귀의하고 하나님께 귀의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만 있는 줄 알아요? 불교에도 있어요.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이라는 말을 하지요. 원효가 화엄경에 있는 것을 줄여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인데요. ‘나무’라는 것은 귀의하다, 의지하다는 뜻이고요. 아미는 부처인데 아미불이에요. 부처시대가 지나고 그 다음에 보살시대가 와요. 불교사상의 발전에서 보살시대가 오게 되면 보살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합되고 완성이 되어버려요.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은 관자재보살이라 해서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보는 거예요.

아미불은 극락을 좌우하는 최종부처. 그 다음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은 현재 이 세상에서 소원성취를 하기 위해서 있는 보살. 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을 성자가 되고, 아미불은 성부가 되는 겁니다.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것이 불교에 있어요. 화신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보신은 성령, 그리고 법신은 성부가 되는 거예요. 기독교 삼위일체는 인간들 머릿속에서 다 지어내놓는다고요.

왜냐하면 오락이니까. 종교란 오락이니까 그냥 나만 기쁘게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나를 천당 보내주라는 말입니다.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말은 고생한 결과가 뭐다? 나다 그 말이에요. 절대적인 나인 거예요.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뭐예요? 없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여기에 그리스도가 등장하거든요. 이 그리스도는 뭐냐 하면, 그 서열을 거꾸로 하시는 분입니다. 서열화를 시키는데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분이 어디로 가느냐하면, 그 계기판의 눈금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그 계기판에 보조 맞춰서 따라올 사람 따라오라는 그 말이에요. 이 땅에 주님이 나타나게 되면 인간들이 사모하는 선한 자리, 다시 말해서 상전이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을 사모하는 인간의 본성, 그걸 거슬려서 반대로,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거예요. 주님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 단절된 틈이 있기 때문에.

그 틈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에게만 메우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산가족으로 아들 찾을 때는 그 아들이 중요하지 나쁜 아들 좋은 아들 필요 없다고요. 그러면 그걸 하시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마음에 구멍을 뚫습니다. ‘고생 많이 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돈이 있어야 내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그 마음 한복판에 마음을 담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을 뚫어버려요. 주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뚫는다는 말은, 구슬을 구멍을 뚫어서 그것을 실로 꿰어서 목걸이 만드는 것처럼 뚫을 때 뭐가 생기느냐 하면, 연합체가 생깁니다. 인간은 각자 모여서 아무리 설교하고 해도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하나가 되는 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구멍이 뚫려서 관통해야 돼요. 주님의 사랑의 바늘로 실을 꿰어서 뚫어야 돼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낙타가! 바늘이 와서 낙타를 뚫어야 되지요. 그래야 이게 뚫리거든요. “가만 있거라. 낙타야. 내가 쑤셔서 구멍을 내 줄게.” 휑~ 하니 사랑의 바람이 통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저 사람 것을 이용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놓을 어떤 장소가, 자리가 없어져요.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이 세상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다 전환시키는 것이 사랑이거든요. 전에는 네 것이었지만 이제는 정신적으로 네 마음을 내 것으로 조종해서 네 것을 전부 다 내 것으로 만들어놓는 것. 그리되면 너는 나에게 종이 되고 나는 상전이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이 땅에서 남을 위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통제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고요. 남에게 위로하고 사랑을 한다는 것, 용서를 한다는 것은 용서해줌으로서 내 마음은 안 다치고, 구멍 나지 않고, 위로하고 사랑함으로서,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함으로서 그 사람의 마음을 뚫어놓고 그 뚫린 데다 내가 상전되기 위해서 내게서 나온 그 줄로서, 실로서 그 사람을 내 것으로 꿰어버리는 것, 이게 바로 이 세상의 사랑이고 위로고 순종이라는 거예요. 가족이라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 앉혀 놓고 “아버지, 이번 한번만 도와주세요. 집 잡혀서 대출 한번 해주시면 제가 평생토록 병든 아버지 어머니 다 모시겠습니다.”라고 할 때 부모도 한 두 번이지 독에 받치잖아요. “네가 날 때부터 키워준 것, 대학교까지 낸 공납급 다 계산해 보자. 얼마냐?” 결국 이야기가 돈 이야기로서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너 때문에 학자금 대출한 것 내가 그 돈 갚는다고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내가자식한테 잘해주면 나는 착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러면 선악체계에 의해서 나는 착하면 뭘 받는다? 복을 받는다. 복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창세기 4장에서 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입니까? 자기자신의 가치를 지키려 하는데 갑자기 동생한테 하나님께서 뭔가 사랑을 받으니까, 자기는 버림을 받으니까 자기의 숨겨져 있는 살인의 충동이 발생되는 겁니다. 너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서열화에서 네가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고 나는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이 되었지요.

내가 너보다 못하게 된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상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어떤 일을 해도 이기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이혼을 해도요, 결국은 누가 찼느냐의 문제에요. 연애도 마지막 문제는 자존심싸움입니다. ‘차이기 전에 차자.’ 그게 마지막 남은 자기에 대한 자기위로에요. “그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내가 알아서 나왔대요. 차기 전에. 뭐예요, 이게. 구멍이 안뚫렸어요.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가 그겁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덟 단계 거듭 검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나를 따라와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삼키는 형국, 그게 구원입니다. 밤에 주무시는 것, 그리고 태어나는 것, 우리가 죽는 것, 남을 사랑하는 이것 전부 다 주님의 허락에 의해서 되는 거예요.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따라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어리둥절해야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나는 내 돈만 챙겼는데 구원이 되다니.’ 이렇게 어리둥절해야 돼요. 어리둥절한 이것이 뭐냐? 마음속에 구멍 뚫린 사람입니다. 사랑의 구멍이 뚫려서 진짜 내 중앙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의 사회생활보다 더 세다는 사실입니다.

일부러 그 지옥 같은 사회에 집어넣어서 네 힘으로 구원은 어림도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 알아서 종이 되신 그 종의 위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맘속에 줄로서 목걸이 만들 듯이 구슬로 꿰어버립니다. 우리 하나하나는 전부다 구슬입니다. 하지만 꿰어진 그것이 전부 다 종이 되는 거예요. 마음이 뚫렸으니까 로마서 12장의 말씀처럼 원수 갚는 것은 내 소관 아니에요.

사람이 개별자가 되니까 항상 ‘너 두고 보자.’ 맨 날 원수 갚는데 평생을 다 보냅니다. ‘네가 나보다 앞서다니 나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나보다 기도도 오래하고 도저히 용서 못해. 나보다 헌금을 더 많이 하다니.’ 우리교회는 그런 일 없지만. ‘내가 더 목돈 낼 거야.’ 이거 뭐냐? 복수심이 있는 것, 남에게 때려죽여도 지기 싫어하는 것, 그게 가인이잖아요.

아직도, 내가 고생해서 얻어낸 마음이 아직 있다는데 거기에 성령이 와서, 말씀이 와서 거기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겁니다. ‘없다. 너는 없어. 내 말씀 때문에 너는 종으로 있어야 돼.’ 따라서 우리는 말씀의 종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상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유로울 수밖에 없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남 욕하거나 남 시기질투 할 이유도 없음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 마음에 아직도 내 맘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가 악마의 노리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제는 성령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피를 먹음으로서 우리가 이미 죽은자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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