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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3 12:36:59 조회 : 208         
   빛의 열매 19110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빛의 열매(에베소서 5:9-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a_3VYidWwM, Hit:28
 이근호 19-11-03 13:20 
빛의 열매

2019년 11월 3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9-10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5: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주님께서 이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피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사야 53:3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이 다 얼굴을 돌리고 싶은 생애를 보내신 겁니다. 주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마구 예수님의 소문 듣고 몰려오지만 막상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자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사람답게 산다’는 소리를 듣고서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우대받으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주위 사람들을 기피하는 것은 아직 떳떳하게 내세울 것이 없다고 자신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숨고 싶은 겁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나의 터잡기’ 이게 세상살이입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기에 이게 흠이 될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을 받아주지 않는 이유는, 그게 바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시작은 ‘개별자 의식’부터입니다. ‘개별자 의식’이란 최종적으로 자아 절대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자아’를 원합니다. 결사적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자아상 수립에 나섭니다. 도덕으로 자아가 강화하고 중무장해서 행여 자기 실책으로 신으로부터 벌받는 것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그 어떤 역경도 극복하고 기어니 천국 입성에 성공한 영웅적인 자기 역사를 쓰는데 있습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을 봤다면, 자신을 일단 ‘빛의 자녀’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 ‘빛의 자녀됨’을 증명하기 위해 빛의 열매라고 제시한 것들을 수시로 모집해서 자기 쪽으로 들여와서 뭉칩니다.

마치 눈사람 만드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노름은 이미 이스라엘 역사 후반기에 실시했던 일입니다. 선지자의 말씀이 끊어지고, 남은 유대사회는 지난 날의 말씀을 교훈삼아서 그 어떤 강력한 이방의 침략으로부터 정치적으로도 버텨내고 특히 정신적으로 메시야를 고대하는 신앙심을 잃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상대적 의로움 추구를 알고 계십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따라서 그 사회에 속한 모든 이들의 경건의 최정점은 바리새인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생각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6:21-23에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인간들은 자신을 쓸만한 존재로 여기고 그것을 고수하려 합니다.

이런 자들이 십자가와 부활 소식을 접하게 되면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새사람 되었다. 하지만 이 십자가에 그냥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부활의 새생명까지 못하는 대단하고 멋진 자아상을 구축해야지”라고 말입니다. 즉 〰부터의 자유에 머물지 않고 〰향한 자유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까닭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고 말입니다.(요 6:26) 그들은 예수님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 ‘만’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간됨을 놓지를 못합니다.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자아의 동질성으로 계획 확장시켜 신마저 자아의 동질성으로 연결시켜 놓은 의식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빛’이라든지, 반대 개념인 ‘어두움’이라는 개념은 개별성에서 나오는 개념이 아닙니다. 포괄적이고 일반적입니다. 개인을 상대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 전부가 그 넓은 범주에 속했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그 결과로 나온 개인을 빛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서 신의 위대함을 언급하지만 그 위대한 신 앞에서는 당당하게 인간의 능력을 죽이지 않고 살리려는 시도가 늘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즉 신이 내린 운명이나 역경에 대처해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한 인간 나름대의 철저한 조치가 취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장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워합니다. 이게 바로 ‘주체의식’이라는 겁니다. 곧 ‘우상’입니다.

이러니 인간들이 예수님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죽이신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다른 몸을 따로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하늘나라에서는 성도가 실컷 실패하고 오기를 기대하십니다.

이 땅에서 성공을 기원하고 후원하고 늘 격려하는 것은 악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자기(=악마)를 닮아 독자적이고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이지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사고방식과 같은 겁니다.(마 19:17)

성령 받은 성도는 자신이 입자가 아니라 흐름임을 압니다. 네온사인처럼 그 깜박거림을 통해 어떤 시그널을 발산합니다. 빛의 자녀만이 빛의 신호를 발산합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속한 자녀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우상’으로 사는 흔적을 보이게 됩니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오직 ‘사람들에게 싫어버림 바 된’ 그분의 것입니다.

라디오 회로판에 수직으로 세워진 진공관에 전기가 들어오면 불을 밝히는 것처럼, 이 ‘싫어버림 바’가 성령을 통해서 들어선 자만 빛의 자녀이고 그 모습이 열매입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마치 생명이 없는 죽은 마네킹같은 겁니다. 이 세상은 마테킹의 창고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그 고생마저 사도바울은 자신의 몸을 떨어내는 성령의 일로 보았습니다. (고후 11:23-12: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빛 되심이 나의 절대성에 막히지 말고 호리려 뚫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9-11-04 12:03 
48강-엡 5장 9-10절(빛의 열매)1911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9-10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9-10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지난 시간에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빛이라는 이것은 실체로서 이야기하기가 곤란해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바람의 아들’이라 할 때 바람이 아버지가 될 리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빛의 아들’ 혹은 ‘어두움의 아들’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 개별자로 살아가기에 그것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개별자. 나 여기 개인이 있다. 개인이 있으니까 모든 출발을 나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나 구원받겠습니까, 나 복 받겠습니까, 나 천당 가겠습니까?’ 시작하는 그 모든 사고방식이 나부터 출발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할 말이 없지요. 완전히 그들을 다 뭉개버려야 되지요. 포괄적으로 다 다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빛이라는 이 단어는 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두고 이야기하고요. 거기에 반대되는 어두움이라는 것도 개개인을 두고 “너는 나쁘니 어두움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전체를 어두움으로, 포괄적으로 다 덮어버립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가 나오고 그 다음에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하면, ‘네가 빛의 자녀인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어두움의 자녀겠지요, ‘네가 빛의 자녀인지 어두움의 자녀인지 스스로 측정해 보라’는 겁니다. 테스트해보라, 시험해보라는 말이 그런 말이에요. 측정해보라. 네가 빛의 자녀인지 어두움의 자녀인지.

빛의 자녀가 되려면 개인적으로 내가 어떤 역량을 동원해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서 빛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없어요. 제가 방금 이야기해 드렸거든요. 빛, 어두움이라는 것은 개인을 두고 닦달 내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똑바로 해. 그러면 빛의 자녀라고 해줄게.”가 아니라 이미 쳐들어온 개념이에요 그냥.

해를 우리가 초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달을 나에게만 특별히 비춰달라고 우리가 요구할 수는 없어요. 낮이면 해가 있고 밤이면 달이 있고요. 낮에 해가 있고 밤에 달이 있는 그것이 그렇게도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우리가 평소에 거기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고 있지요.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낮에 해가 비취고 밤에는 달이 다 비췬다는 포괄적인 개념이 없고 눈만 뜨면 자기생각만 하고 살기 때문에, 자기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정작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것을 왜 이야기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인생 살면서 걱정을 해도 혼자만 알고 있는 근심거리 가지고 걱정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찾을 때도 “나만 특별히 봐줄 수 있는 혜택을 주옵소서.”라고 요청을 하게 돼요. 남들은 안 해도 나는 특별히 기도하고 헌금을 하니까 헌금하고, 기도하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 나에게만 특별하게 하나님이 좀 챙겨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다른 교회 말고 우리교회만 부흥되게 해달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다른 집안 말고 우리 집구석만 잘되게 해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의 성경은 빛, 어두움, 포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자녀라고 추상적인 용어를 거론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부터 출발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비춰보게 되면 그것은 포괄적이고요,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그것은 개별자의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거든요.

그래서 빛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걸어왔고, 이 땅에서 살았던 그 전체가 빛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나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던 자체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이것은 어두움에 속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사시면서 겨냥한 그 몸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디 중심이냐 하면, 자기 개별적인 몸을 중심으로 해서 그 몸에서 자신의 자아가 있고 나 개인적으로 천국가기를 바라는 욕망같은 것이 있어요. 거기서 나온 개념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복음에는 인간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출발점이 이 몸을 내 몸이라고 여기고 시작하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인간으로 시작하다 보니까 그 나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고 목사한테 묻는 거예요. 그러나 목사가 보기에는 당신이 인간이 아닌데 왜 출발을 인간부터 시작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어요. 이거 아세요?

예수님은 싫어버린바 되었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진실을 알려면 우리가 어느 자리에 가야 되느냐, 어느 자리에 합류해야 되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싫어버림 받은 그 자리에 우리가 찾아가서 합류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은 개별자, 개인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남들로부터 싫어버린바 될까봐 그걸 겁내면서, 그걸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고 숨어지는 이유가 남들에게 보일만한 거창한, 뭔가 떳떳하게 남들에게 나서고 싶을만한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자꾸 두더지처럼 숨기 좋아하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어요. 특히 현대인들에게 그 특징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겁니다. 내가 남들 앞에 내세울 것이 있을 때까지는 내 몸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출시켰거든요. 예수님의 노출된 그 몸, 그 몸에서 나오는 말씀과 그 행동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부터 싫어버린바 된 겁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 3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한평생 살아갔던 그 모든 것을 다 종합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일이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어서 아무도 주님과 동행할 의사가 없는 결과를 낳는 것이 예수님의 살아가신 모습이에요. 그리고 그 예수님의 몸이고요.

그런데 우리의 몸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되기 싫다는 거예요. 그래놓고 꼭대기에 십자가 꽂힌 교회에 나오니까 제가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살기가 싫은 거예요. 예수님 생각은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그게 사달이고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생각하는 몸은 하나에요. 몸은 하나인데 자아가 두 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빛의 자녀를 예수님의 몸의 확장, 몸의 영광의 확장에 붙어 있는 새로운 몸으로 만들어내면서 기존에 있는 자아를 떨어내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그걸 측정하라는 겁니다.

내가 인간이라고 여긴 것인데 사실은 인간이 없다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지금 하늘에서는, 주님은,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는 우리가 실패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인생에서 좀 실패하라는 말이지요. 주님 가신 길이 그 길이거든요. 우리의 성공을 기다리는 쪽은 누구냐? 악마 쪽이에요. 같이 지옥가자는 이야기죠. 이 땅에서 성공해서.

실패를 해줘야 기대를 안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의 인간미, 또는 인간의 가치, 인간의 고유한 자율권, 그런 것을 좀 떨쳐버리라는 그 말입니다. 성공하려고 교회와요. 완전히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위해서 교회 옵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보면 예수님 가신 길은 싫어버린바 된 것인데 우리 몸은 그 싫어버린 바 되는 것이 싫다는 거예요. 우리 자아는.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하기를, ‘네가 너를 시험해보라. 네가 전에 어두움이었던 그 자이냐? 아니면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 자아인지’를 시험해 보라는 거예요. 물론 여기서 사도바울은 어떤 조건을 걸어놓습니다.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지 않은 자의 차이를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시험해 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친자확인해 보라는 거라는 겁니다, 친자확인! “dna 한 번 조사해볼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님은 성령 받았지요? 그렇다면 천국에 가려면 주님 받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갑니다. 주님은 성령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거예요. 그것도 아무 구애받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그래, 싫어해라. 나를 미워해. 이 가는 길이 주의 길이야.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야. 너희가 싫어하든지 말든지 나는 내 갈길 갈 거야, 하는 당당함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라고 오늘 본문은 묻는 거예요. 시험해보라. 떨어낼 것을 떨어내는지를. 오늘 보문 설교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령 받은 자 이야기하기 전에 성령 받지 않은 자가 오늘 에베소서 5장 9, 10절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만 파악하면 오늘 본문해석은 다 끝나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자가 오늘 본문을 봤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갖고 계속 교회 나오는지 그것만 파악하면 끝나는 겁니다. 성령받지 않은 자는 개별자로 있기 때문에 자기보존능력이 굉장히 강렬해요. 자기하나 잘 다듬어서 천국 보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굉장히 강렬합니다.

성경에서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그거지요. 어릴 때부터 자기는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말씀으로 자기를 자아됨을 강화시키는 거예요. 떨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완전한 자아를 추구하는 겁니다. 완벽한 자아를 추구하는 거예요. 완벽한 자아 앞에 성경에 십자가가 나오니까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십자가가 나오니까 ‘주께서 고난 받으셨구나. 주님이 고난 받아서 우리보고 그 고난의 길을 따라오라고 하는구나. 따라가야지.’ 제가 지금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따라가야지. 십자가지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니까 이제는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사탄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다.’

그래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자유는 뭐냐? 일단 첫 단계가 ‘~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자유’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뭐로부터 벗어난 자유.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그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반토막이고 이제 나머지가 있는데 ‘~을 향한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나를 완전케 다듬는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로부터의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십자가에 그냥 있지 말고 이제는 부활의 새생명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완전한 자아를 추구하는 겁니다. 자기고유의 절대함을 추구하는 거예요. 나의 절대함.

뭘로 무장하는가? 도덕으로 무장하는 거지요. 주께서 시비 걸어서 나에게 벌을 내릴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도덕으로, 윤리로 무장해서 예수 믿고 평생 나는 나쁜 짓 한 적이 없다는 그걸로 완전무장해서 이 땅에서 복 받고 천국 가는 기본이고 천국에서 상급까지 챙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목사가 처음에 목회하기 전 신학교 다닐 때 자기가 신자라고 여깁니다. 신자라고 여기는데 막상 목회를 시작하게 되면 전혀 신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완전한 자아가 확장이 되면서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완전함까지 자아성이 확장이 돼요. 자기의 통치성이 확장이 된다고요. 그걸 어려운 말로 동질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처럼 나하고 동일한 생각만 있는 교인들만 남아라. 그러면 그 교회는 내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게 확장이에요. 내 권력이 퍼지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상숭배 아시지요? 우상! 나를 닮은 신이 되는 거예요. 나와의 동질성을 확장시킨 신, 그 신이 나를 위한 신이 되는 거예요.

그 신의 이름이 여호와가 되든지 예수가 되든지 상관없어요. 무조건 그 신은 내가 되고 싶은 이상향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게 나를 닮은 신이에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이 대목,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나는 빛의 자녀라고 치고 그 다음에 내가 할 것은 뭐만 추구하면 되느냐?

빛의 행함, 열매가 있으면 되는데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만 나에게 퍼부으면 된다는 겁니다. 마치 눈사람 만들 듯이 작은 눈송이로 시작해서 굴리는 거예요. 착함과 선함과 진실함,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그걸 전부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게 되면 자기는 완전에 완전을 추구할 수 있는 겁니다.

옛날 그리스 신화에 <오디세이>라는 신화가 있어요. 그것은 인간이 창안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적 인간형이 오디세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 꽤나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사이렌이라는 요정이 있는데 그 요정은 바다의 협곡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건장하고 멀쩡한 정신의 선원들이 가던 코스대로 가지 않고 절벽으로 노를 저어 가게 되어 있어요. 그 유혹의 노래를 듣고서.

그러면 바위암초에 부딪혀서 배가 파선되고 선원들을 다 죽게 만드는 사이렌이라는 요정이 있었습니다. 신화지요. 그 때 오디세이라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서 거기서 인간의 힘을 발휘해 주는 겁니다.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나를 시험해서 넘어트릴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예측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비책까지 다 마련합니다.

선원들에게 명령합니다. “나를 돛대에 묶어라. 묶되 내가 아무리 풀어달라고 너희에게 요청해도 오히려 더 단단하게 묶어버려라.” 그리고 선원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아요. 요정이 부르는 유혹의 노랫소리를 안들리게 해놓습니다. 과연 협곡에 가니 노래가 들리는데 이것은 인간인 이상 그 여신이 부르는 노래를 극복할 수가 없어서 지금 미쳐버릴 지경이에요.

풀어달라고 고함을 지르고, 노를 저어 그 여신들에게 다가서라고 아무리 해도 사전에 약속된 것이 있어서 꽁꽁 더 묶어버리니까 배는 무사히 파선되지 않고 지나갔고 나중에 통과해서 밀랍 뽑아버리니 선원들이 “선장님,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주체라는 겁니다. 인간은 신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인간의 자기 할 도리를 다 해버리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율권이 인간에게 있다. 이게 성령 받지 않은, 성령이 없는 인간의 노림수입니다.

그러면 교회 온 사람들은 전부다 주체들이에요. 개별자부터 시작한 겁니다. 어떠한 극한의 역경도 이겨내고, 어떠한 악마의 시험도 이겨내고 기어이 이 한 몸 천국에 골인하게 되었다는 그 자부심하나 믿고 교회들 오는 거예요. ‘악마여, 유혹해라. 악마여, 시험해라. 나는 말씀으로 무장했어. 기도로 무장하고 헌신으로 무장했어. 기어이 나는 내 한 몸 지옥가지 않고 방향 틀어서 천국으로 들어가겠다.’

그게 바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의 성경보기입니다. 이게 뭐냐? 우상입니다. 우상숭배에요. 이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선지자가 없는 시기에 이스라엘은 우상으로 무장되어 있었어요. 의류매장 창고에 보면 ……, 옛날에 우리 어머니도 옷가게를 하셨기 때문에 알아요.

거기 보면 마네킹들이 있습니다. 창고에 그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구약성경 후반기에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에게 말씀이 그만 끊어졌어요. 말씀이 끊어지니까 남는 것은 주체들밖에 없어요. 지나간 말씀들을 챙겨서 로마제국 앞에서 그들은 압제를 당하면서 그들이 믿는 것은 메시아가 온다는 그 일념하나밖에 없습니다.

메시아가 올 때 메시아를 만날 수 있는 자격자는, 제가 아까 이야기한 오디세이처럼, 자기의 주체적인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메시아 만날 준비를 하는데 다 투자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 오실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이었습니다.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의 노고와 수고에 대해서 치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그런 짓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했어요.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단정했습니다. 그 정도로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의 거룩함과, 순결함과,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그 바리새인들이 모범적으로 나설 때에 그 뒤의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모델로 해서 뒤따라오겠지요. 그 뒤따라오는 사람 중에 누가 있었느냐? 열 두 제자가 있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열두 제자가 나오는데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 이야기가 16장에 주로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온갖 충성심을 다 발휘해서 예수님을 붙들고 간청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다치도록 내버려둘 우리가 아닙니다.”라고 할 때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바리새인의 주체적인 열심히 악마의 일이라는 사실을 열두 제자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게 악마의 일인 줄을 몰랐어요.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이것이 악마의 일인 줄 지금도 한국교회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게 사탄의 일인 줄 모르고 있어요. 사탄이 교회 세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요한복음 6장 26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이 이용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시작은 개별자입니다. 나부터 해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 몸이 여기 있는데 누가 나를 위로해줄까? 여러분! 이것이 윤 복희가 하는 이야기고요, 여기 내가 있는데 누가 나를 궁극적으로 구원해주고 위해줄 자 누구냐? 예수다. 예수님 찾아가자.

그게 바로 예수님한테 책망 받을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거 상상해요? “주님 사랑해요. 주님 좋아요. 주님 너무 위대해요. 주님 대단해요. 주님 최고에요. 난 주님만 따를 거예요. 난 주님만 사랑해요.” 이게 빈 말인지, 이게 헛소리인지를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여러분? 상상 못하지요.

목사는 신자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들은 교회만 키우면 끝나는 사람들이에요. 왜? 돈이 나오니까, 생계비가 나오니까, 그것도 하나의 직업이니까. 자기 펜들 많아보세요. 방탄소년단 이유도 아닙니다. 교인들은 자기집구석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아들, 내 남편, 내 아내, 자기 직장, 자기미래, 그거 빼놓고 무슨 생각하고 앉아있을까요, 거기에?

전부 다 사기꾼들이에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왜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까? 주께서, 나와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고 했어요. 그 소리 듣고 예수님 따라왔던 사람들, 떡을 먹고 배불러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말씀드릴게요.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 남들에게 싫어버린바 되는 그런 인생이 될까봐서 제일 그게 싫어요. 남 앞에 인간대우도 못 받는 그것이 인간이겠어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말을 한다는 것은 남들 앞에 내세울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잖아요. 그것 없으면 우리는 부끄러워서 얼굴도 내밀지를 못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중복된 자아상이에요. 시험해보라는 것은 떨어내라는 겁니다. 성공을 기하는 그 몸, 우상을 좀 떨어내라는 그 말입니다. 몸은요, 주님 몸만 있으면 돼요. 우리 몸은 결국은 죽습니다. 우리가 한평생 세월을 살아가는 것이 이 몸 떨어내기 위한 주님의 아주 친절하심이고 애씀이에요.

전에 몇 번 이야기를 했는데 나 훈아가 한 노래가 있잖아요. ‘고장 난 벽시계’ 시계는 고장이 났는데 세월은 고장이 없느냐는 말이지요. 그 노래를 모르시니 제가 더 설명은 못하겠습니다만. 우리는 붙들어도 세월은 우리를 자꾸만 떨어내고 있어요. 세월은, 시간은 아주 착실해요. 주의 말씀을 너무 순종을 잘해요. 우리를 아예 없애버립니다.

네가 시작한 그 개별자라는 것, 개인이라는 것, 그것은 어차피 실패로 끝나야 돼요. 있어봐야 무거운 짐만 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왜 근심걱정이 있느냐 하면, 현실 돌아가는 것하고 우리 인간하고 아귀가 안 맞아서 그런 거예요. 현실은 떨어내기인데 우리는 나지키기로 나가는 거예요.

백날 교회 와서 주님께서 기도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현실과 안맞는데요. 주님이 현실과 안맞는 일을 할 리가 없지요. 그러면 주님은 시험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 이 모든 환경이, 네가 빛의 자녀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부딪히게 만들어요. 계속 멈추지 않고 부딪히게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과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온 동네 안다닌 동네가 없어요. 갈릴리부터 해서 예루살렘도 가고, 온 동네 다 다니면서 계속 부딪히게 만들어요. 부딪히게 만드는 것이 뭐냐? 이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는데 아직 비활성화 된 요소가 있어요.

컴퓨터 게임할 때 마우스 가지고 시커먼 구역에 들어가면 이쪽에서 탐지되거나 관찰되지 않았던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있어요. 컴퓨터게임 안 해보신 분들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컴퓨터 게임에 들어가서 마우스를 대서 ‘여긴 뭐가 있지?’ 하고 보면 없다고 여겼던 어두운 자리에서 새로운 상황의 게임의 기회가 부여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빛의 자녀, 성도를 성령으로 계속 돌아다니게 만들어요. 11월 3일, 11월 4일, 5일, 6일……, 계속 다니게 되면 활성화되지 않았던, 비활성화지역에서 내가 또다시 실패를 하는 그것이 감사한 일인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 벌어져요. 성공할 필요가 없는데요. 성공은 악마가 자꾸 부추겨요.

“너 주체잖아. 너 오디세이잖아. 네가 대비할 수 있잖아 너의 실패를. 네가 성공해야 남들 앞에 싫어버린바 되지 않아. 너는 남에게 칭송을 받는 존재가 돼. 교회와도 인간대우 받고 사회 나가서도 대우받고. 싫어버린바 되지 않고 너는 훌륭하게 될 수 있어.” 계속해서 그걸 부추기는 겁니다. 악마가.

그러면 몸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물리학에서 소리하고 파도의 공통점이 있어요. 소리와 파도는 실체가 없어요. 개념에 불과합니다. 소리라 하는 것은 공기의 파동을 가지고 소리가 되고요. 파도라 하는 것은 바닷물이 물결치는 그것이 파도지 파도자체는 없어요. 그걸 파동이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흐름이라고.

파동의 반대말이 입자인데요. 우리 개체는 입자거든요. 이 세상에는 흐름밖에 없어요. 개체라는 것, 입자라는 것이 없어요. 입자가 잠시 있더라도 세월 따라서 그 입자가 다 조각나서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흩어질까봐 늘 주워 모읍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리고 그 몸은 죽어가고 있는 몸인데 이게 아까워서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버리지 않고 다 주워 모아서 다시 자아로 구성이 되고 그게 실패로 끝나면 또 좌절하고 울다가 술 한 잔 먹고 돌아서서 다시 ‘나 그래도 그렇게 절망할 정도는 아니야. 나는 그 정도까지 망가질 대상은 아니잖아.’ 하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성경말씀 이용해서 다 힘내서 주워 모은다고요.

마치 <터미네이터> 영화에 나오는 그 기계 같아요. 액체가 되어서 흘러내려 흩어지니까 다시 주워 모아서 또 하나의 자아를 만드는 것처럼 꾸역꾸역 나의 나다움을 포기를 못해요. 포기를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비활성화 된 지역에서 11월 5일, 6일, 7일,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갑자기 우리는 분노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일을 하시는 것은 좋은데 나는 뭐가 됩니까, 라고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나를 왜 개무시하느냐? 나를 왜 개무시하느냐 할 때 그 앞에 붙은 것이 ‘나’에요. 그런데 나는 없는 거거든요.

없는데 그 나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과거의 추억들을 다 끌어 모아서 지금의 나라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우기다 보니까 모든 하나님의 일이 나에게 와서 나를 기쁘게 하는 쪽으로 마감이 되어야 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상이거든요. 우상이 바로 그런 거예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좋으라고 돌아가야 돼! 신이시여, 예수여, 그래야 당신은 좋은 예수고 사랑의 하나님이 맞아요.”라고 우리쪽에서 주님을 한수 가르치려고 한다는 그 말이지요.

부서지면 되는데. 없어지면 되는데. 자신의 동질성을 포기를 못합니다. 인간이 자기의 동질성을 포기를 못하게 되면 자기가 절대의 도덕적 기준이 되어서 나와 같지 않으면 욕하는데 아주 전념을 해요. 어느 책에 보면 그런 이야기 나와요. “왜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을 죽였느냐?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 못박아 죽였기에 죽였느냐? 아니. 유대인이 돈밖에 몰라서 미워서 죽였느냐? 아니.”

그게 아니에요. 유대인을 죽인 이유는 그 당시 나치가 무려 국민들의 83.5퍼센트라는 지지를 얻기 위해서 다 같이 동일하게 공격할 적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 적을 만듦으로서 이쪽이 전부다 내 편으로 하나의 자아의 확장이 된 거예요. 개별자가 모여서 국가라는 그 큰 개별자가 된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덩어리에요.

예수님은 그게 마감되는 것, 유대사회, 이스라엘이 살아 있어야 메시아가 온다는 그 이스라엘 한복판에 북한이 미사일을 쏘듯이 아주 구멍을 뚫어버린 거예요. 오늘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리에, 내가 있던 과녁에, 양궁에서 10점 만점의 자리가 있지요, 그 자리에 미사일을 쏘아버리는 거예요. 그 자리는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계실 자리에요. 거기는 빈곳이 되어야 돼요. 우리의 한 복판이.

그야말로 바람의 아들, 바람이 숭숭 통과해야 될 자리에요. 그래야 우리가 분노하지 않아요. 어떤 단편영화가 있어요. 칠곡의 할머니들이 70이 되고 80이 되었는데 한글을 뒤늦게 배우면서 재미가 있었답니다. 한글 배우면서 어떤 시를, 러시아의 푸시킨의 시를 가르쳐준 모양이에요.

영화에 보면 할머니들이 이런 대목을 외웁니다.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너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운명이 너를 속일지라도 너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경우에만 가능하지요.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경우에나 화가 나거나 분노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껏 제가 이야기한 것이 뭐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성령 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반갑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이지요.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게 지금 성령 받은 사람이 성령의 인도함을 따랐던 결과입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의 자아는 어디 있습니까? 12장에 나옵니다. 12장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한 환상을 봤는데, 거기서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나였다.”

이것은 내가 마련한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한 자아에요. 몸은 하나인데 자아가 둘되었어요. 중복된 거예요. 하나의 자아는 주께서 알아서 처리해주고 그 하나의 자아를 처리할 때마다 점점 더 새로운 자아가 가치와 그 고마움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걸 저는 네 자로 네온사인이라고 합니다.

네온사인이 특징은 내가 없다는 거예요. 네온사인의 특징은 깜박깜박 주님만 보여주는 시그널, 신호만 있을 뿐이지 내 몸은 이쪽 몸이나 저쪽 몸이나 관계없어요. 나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깜박깜박 보여주고 있느냐, 시그널을 보여주고 있느냐?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몸 가지고 나로 하여금 어떤 시그널을 보여주고 있느냐? 저쪽은 어두움의 어두움 됨을 보여준다면 나의 시그널은 빛의 빛 됨의 시그널을 보여주는 거예요. 빛이라는 개념은 개체가 없어요. 하나의 이미지라니까요? 하나의 흐름이라니까요, 흐름! 원인은 딴 데 있고 우리는 결과물에 불과한 거예요.

옛날 라디오는 뒤를 뜯어보면 진공관이 있지요. 회로판에 진공관이 수직으로 꽂혀 있지요. 전기가 끊어지면 진공관에 불이 안들어와요. 그런데 전기를 꽂으면 진공관에 불이 들어오지요. 성령께서는 우리 같은 우상숭배자, 나밖에 모르는 우상숭배자, 나의 절대성을 추구하고 나 천당 간다고 그게 진짜인줄 알고 착각해서 철석같이 믿고 있는 우리에게 갑자기 성령이 오게 되면 빛이 들어오고 신호가 들어와 버려요.

신호가 들어와 버리면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은 삼층천에 사도바울처럼 따로 있어요. 생명은 따로 있다고요. 생명이 있는 곳에 우리의 자아가 있거든요. 우리의 자아는 하늘에 있지 이 땅에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가짜 자아로 지금 버티고 있는 거예요.

악마는 닥터피시처럼 달려들어서 계속 우리한테 매일같이 성공을 약속하고, 성공을 부탁하고, 성공을 독려하고, 우리에게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악마가! ‘자식 잘돼야지. 집안 잘돼야지.’

결혼식 할 때 기독교식으로 결혼하게 되면 대표로 기도하는 목사가 있어요. 기도하는 목사가 결혼식 기도를 이렇게 해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선남선녀가 이렇게 만났습니다.” 선남선녀인지 자기가 그들의 과거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해요.

“선남선녀가 만났으니 그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자식을 낳되 이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큰 일꾼 되게 해주시고 교회 큰 일꾼 되어서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큰 보탬이 되게 해주시고, 이들로 말미암아 양가에 웃음이 넘치고, 행복하고, 아들 딸 잘 낳고,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옵소서. (침까지 막 튀기면서) 축뽁해 주씨옵소서!”

그게 바로 악마가 교회 마다 하는 멘트의 되풀이잖아요. 너를 포기하지 말라는, 네 주체를 포기하지 말라는. 네가 미리 말씀가지고 대비하게 되면 너는 성공할 수 있다. 끊임없이 나에 집착하게 만들어요. 자기집착.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십자가의 주께서 오라고 하는, 내 살과 내피를 마시라 하는 그 소리는 들리지도 않아요.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는데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예수님은 쓸만하다는 거예요. 부처보다 예수님이 훨씬 쓸만하고 부처는 지옥갔지만 예수는 나를 천당보내기 때문에 예수를 붙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누굴 위해서? 날 위해서. 왜? 내가 최종마감이니까. 예수도 하나님도 다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공부 열심히 따라다니고 온갖 성경구절 다 외우고, 여호와증인한테 지지도 않아요. 얼마나 외웠는지.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천국에서는 여러분을 보면서 제발 실패하는 인생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실패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목사님, 아직 실패 안했는데요.” 오늘 11월 3일이잖아요. 아직 4일이 남아 있다고요. 내일 되면 또 실패할지 몰라요. 기다리세요. 잔뜩 기대하세요. 실패하게 될 거예요. 옥수수 팔아먹으려고 하다가 안되고 ……, 실패했잖아요.

11월 7일이 되면 또 무슨 실패가 기다릴지 몰라요. 실패하는 그 쏠쏠한 재미, 그게 뭐냐 하면, ‘아, 주님께서 이런 시그널을 보냈구나.’ 아, 주님이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면서도,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지나갔으면 하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는 이 고백의 마음이 그대로 우리한테 왔거든요.

따라서 매일같이 네가 먼지를 털어봐라. 다시 말해서 테스트해봐라. 측정해 봐라. 시험해 봐라. 너에게 예수만 남는지, 내가 예수만 이용하는 우상이 되었는지 먼저 털어봐라. 네가 빛의 자녀인 것은 네 뜻이 아니고 너를 하나의 네온사인으로 만들어서 신호체로 만드는 주님의 공로임을 주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인작업 들어가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 때문에 살았습니까? 나 잘되려고 살았습니까? 절이나 교회나 다를 바 없는 세상, 온천지가 빛을 마네킹같은, 해골같은 집단체에 불과한 것을 우리가 진즉에 몰랐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마네킹인데, 죽은 마네킹인데 성령이 빛으로 와서 주님이 생각했던 영생이 주님 품에 있음을 이제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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