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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12:38:20 조회 : 285         
   사랑을 입은 자19100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사랑을 입은 자(에베소서 5: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Y9w-VbIiX1Q, Hit:19
 이근호 19-10-06 13:39 
사랑을 입은 자

2019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1-2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현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삼스럽게 지시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미 뭔가 주어진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구약보다 신약에 집중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최종적’이 상황이라는 겁니다. 사랑 안에서, 개인은 자신에 대해서 잘했니 못했니 평가할 입장이 아닙니다.

옳았느니 그른니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개인이 아니라 ‘나라’입니다. 개인은 과거이지만 ‘나라’는 미래이고 현재는 ‘개인’과 ‘나라’가 공존합니다. 개인이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개인은 개인의 영향력을 자체적으로 발휘하고 그 영향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내놓은 사랑은, ‘자신의 사랑’임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대중가요나 드라마가 다 이런 식입니다. 상대를 보면서, 자신이 좋았다니 혹은 그대가 떠나서 외로워서 견딜 수 없다느니 라는 식입니다. 개인이 스스로 개인을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개인의 육신 그 자체가 더럽다는 겁니다. 개인에게서 유출되는 모든 액체가 다 더럽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개인에게서 나오는 정신마저 다 더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은 개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사랑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아가서입니다. 이 아가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남녀가 서로 상대의 벌거벗은 몸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이는 옷을 입지 않는 상태입니다. 창세기 2장의 상황에서 아담과 하와는 상대의 육신에 대해서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남녀는 그냥 만나지 않고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옷이라는 인공적인 요소를 벌거벗은 육신 위에 걸쳐 제 2의 인위적 육신을 인간이 조장하고자 시도한 겁니다. 수치를 가리기 위함입니다. 옷만 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옷만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온갖 허세와 권위와 권세와 직위를 다 걸치고 안 부끄러워 할 수 있는 존재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신 그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부에서 치고 올라오는 공포심을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요한 일서 4:18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 특히 형벌과 지옥가는 두려움조차 내쫓을 수 있는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요?

마태복음 3:17에 보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인정하시는 유일한 사랑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의 입장에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펼치십니다.

말씀도 하시고 기적도 베푸십니다. 그러나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에서 그 사랑을 읽어내지를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인간들이 고이 간직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정당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필요한 온갖 것들을 수집해서 자기쪽으로 끌어모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랑은 개인을 더욱 강화하고 고수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통하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나라에서 거부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적 사랑을 공급하기 위해 기존의 자기 사랑을 뜯어내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마치 털이 난 다리에 파스를 붙여 제모하는 작업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더러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의 경계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여기에 ‘죽음’이 개입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보충해주는 말씀이 히브리서 9:12에 나옵니다.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서 ‘염소, 송아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염소의 피, 송아지의 피, 예수님의 피’입니다. 곧 죽음입니다. 죽음을 존재의 바탕으로 한 기이한 현상이 이 악하고 음란한 세계에 발산하게 됩니다.

그 작업을 위해 육의 민낯이 드러나야겠지요. 주님의 사랑, 곧 주님의 죽음의 능력은 자신의 나라에 참여할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파스를 그들에게 임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의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인간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사수한 것들을 표적해서 공격하게 되고 인간들은 극렬하게 저항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 3장에 보면, 솔로몬 재판이 나오는데 그 재판의 핵심은, 어느 여자가 자기 죽음, 자기 정당성이 파괴되는 것을 받아들이냐로 판정되는데 있습니다. 자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진해서 자신의 귀한 자식을 상대방에게 빼앗기게 되는 바로 그 여인이 진짜 아이의 엄마였던 겁니다.

자기 정당함이 파괴되면서 개인도 파괴되고, 그러면서도 사랑의 현상은 그 현장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경계(境界)의 미학(美學)’입니다. 저주의 율법으로 도열하듯이 꿰차 있는 인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빠져나가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런 능력의 사랑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자 자기 백성에게만 사랑을 퍼붓습니다.

이는 곧 ‘같이 죽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최종 정치적 의미로 덮여져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은 정치적 의미막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일반인들 보기에 그저 정치적 살해당함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 세상 권세는 악마가 처놓은 포위망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뜯일 때, 바로 노출된 빈 자리가 십자가 용서가 폭발하는 자리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폭발 되는대로 막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10-07 12:00 
44강-엡 5장 1-2절(사랑을 입은자)1910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도바울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인가?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의 말은 항상 현상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이 마지막 때에는 드러났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 세상은 죄로 되어 있고요, 죄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는 파국입니다. 멸망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옥을 준비했다는 것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옥을 왜 만들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 때는 결국은 이 세상이 지옥과 통한다는 것을, 그 언질을 주기 위해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옥을 만든 겁니다. 세상과 지옥이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서로 통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세상이 지옥으로 가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교육받았고, 데모하고, 살아가고, 장례 치르고, 그리고 우리의 장례를 기다리고 있고.

그러나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는 사람이 그렇다고 보지 않고 그게 현상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내가 언급한, 내가 토해낸 그 말씀에 부합되는 현상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된 세계에서 인간은 갇혀 있고,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시간이라는 것은 역사의 도열인데요. 역사의 도열은 인간의 도열입니다.

인간이 좍 서 있는 거예요. 촘촘하게, 옆자리, 또 그 옆자리에 서 있는 겁니다. 아버지 옆에 자식, 그 자식 옆에 또 그 자식의 자식, 좍 빈틈없이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마치 구슬을 줄에 꿰게 되면 아무리 구슬이 반짝이고 빛이 나도, 하나의 구슬을 끄집어내는 순간 다른 옆에 있는 구슬과 줄로 연결된 이상은 사적으로 탈출이 불가능하잖아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그 원칙이 우리를 관통하고, 우리 몸을 관통하고, 우리 육신을 관통해서 구슬처럼 꿰어져 있다면 어느 누가 튀듯이 독특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체제가 아닙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필히 거기서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한 구슬의 줄, 그러한 역사의 도열, 인간의 도열을 사도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모든 인간,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고,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단 하나도 없어요. 단 하나도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인간에게 하느냐? 그것은 인간보고 뭔가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게 현상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일으킨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쳐다볼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계속해서 일을 벌이시는 또 다른 현상, 그 또 다른 현상을 쳐다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른 현상을 또 준비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현상을 또 끄집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구약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 폭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거의 없어요. 가끔 띄엄띄엄 있지요. 없는데 구약에서 사랑이 집중적으로 모아져 있는 책이 있으니 그게 아가서입니다.

아가서의 내용은 두 남녀가 벌거벗었는데 굉장히 그 모습이 아름답다는 내용이에요. 창세기 2장에서,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옷을 걸치지 않은 모양새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옷을 만들어서 입은 겁니다.

인간이 옷을 만들어서 입었다는 것은 자기의 맨몸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거예요. 뭔가 가려야 버틸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맨몸은 더러운 몸이에요. 범죄하고 난 뒤의 인간의 몸은.

사랑이라 하는 것은 서로 옷을 다 벗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그 모습이 아름다울 때 진정한 사랑인데 옷을 벗을 수가 없어요. 왜? 너무 추잡스러우니까, 더러우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수치스럽다고 되어 있거든요. 부끄럽다는 거예요. 부부지만 부끄럽다는 거예요.

“우리 만날 때 그냥 만나지 말고 옷 입고 만납시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옷을 입었다는 자체가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변질된 거예요. 좋게 변질된 것이 아니고 더러운 것으로 변질된 겁니다.

그 변질된 인간이 옷을 입었는데 단지 옷만 입은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권위와 체면과 권력과 경제적인 장식과 문화적인 장식, 예술, 정치, 이런 것들로 자기를 걸치는 거예요. 속은 썩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데, 겉으로는 자기를 위장하고 포장하면서 ‘이만하면 최선을 다한 것이니 알아주세요.’라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을 때 가룟유다는 자기의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성경에 보면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스승을 팔아먹은 나로서 내가 보여줄 최상의 결정은 자살이다.’ 해서 목매서 자살했어요. 가룟유다는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도의적책임을 갖고 있고, 그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요.

있으니 뭐합니까? 지옥 가는데요. 최소한의 도의와 예의와 책임이 있으니 뭐합니까? 지옥 가는데요. 가룟유다는 어떤 세계를 상상치도 못했느냐 하면, 복음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복음 앞에서는 인간이 자기가 ‘나쁘다, 좋다’ 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다는 그 세계를 가룟유다는 맛보지도 못했고 상상도 못한 거예요.

가룟유다가 자살한 것은,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의식 때문에 자살한 거거든요. 그러나 천국에서는 내가 나보고 질책하거나 지적할 수 있는 것도 필요 없는 세계가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합니까? 평소 여러분의 하루 일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을 자책하는 식으로 살고 있지 않아요? 그러면 가룟유다와 차이가 뭐가 있어요?

도대체 어느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겁니까? 가룟유다는 자기가 자기를 협박한 겁니다. 가룟유다, 사탄이 든, 악마가 든 가룟유다가 자기가 자기를 협박한 거예요. 죽어서도 네 일을 책임지라고 협박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루 일상 살면서 우리 자신을 협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나를 벌세우지 않습니까?

나보고 ‘좋았나, 나빴나?’ 평가하고 점수매기지 않습니까? 가룟유다하고 다른 점이 뭐가 있어요? 그런 식으로 자기자신을 책망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서 나오느냐? 나도 안다는 겁니다. 최소한의 도의와 책임감 정도는 있다는 거예요. 나에게 최소한의 양심같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 양심, 도의적책임, 그거 누가 준거예요? 그거 마귀가 준 거예요. 악마가 준 겁니다. 그것 가지고 인간답다고 우기지 마세요.

그것 가지고 사람답다고 우기지 마세요. ‘나는 짐승보다 낫지 않느냐?’ 그것으로 짐승과 비교하지 마세요. 짐승이 웃습니다. 인간보다 못한 짐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보다 못한 개는 없습니다. 모든 개는 인간보다 나아요. 모든 송아지는 인간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송아지는 자기 주인을 알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주인이에요. 끝이에요. 모든 결정은 자기가 내립니다. 뭘 봐서 우리가 인간입니까? 뭘 봐서 인간답다는 거예요? 도대체 근거를 찾을 수가 없어요. 조국 물러가라고요? 저는 뭘 잘했다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고 싶어요. 조국을 지켜야 된다고? 무슨 근거가 있어요? 조국하고 아는 사이에요?

사람이 남의 사정을 압니까? 남의 형편을 알아요? 그렇게 알 수 있는 형편입니까?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은 이 더러운 몸에서부터 출발한 거예요. 모든 정신이. 몸만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몸에서 빠져나온 모든 액체는 더러워서 “어딜 감히 네 몸에서 나온 액체가 약속의 땅을 더럽히느냐? 빨리 조치를 취하는데 거룩한 제물 바치고 거룩한 예물을 바쳐서 그 더러움을 처리해라. 그 얼룩덜룩한 더러운 것을 처리해라.”

레위기의 상당한 내용이 그 내용으로 들어 있어요. 인간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생리뿐만 아니고 기침, 똥, 오줌, 모든 것. 심지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인간답게 보이지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시신이 되면 그야말로 경상도 말로 ‘어비야!’ 너무 더러워서 제사장은 그 근처도 가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했어요.

애들 보고 그러지요. “어비야, 안 돼!” 큰일 나, 부정 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어. 시체 된 존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어요. 시체가 될 때만 어비야, 하고 하나님께 더럽습니까? 우리는 조금씩 시체로 썩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씩 주저앉고 있는 거거든요. 살아 있으니까 큰 소리 쳤지만 실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지 않습니다. 추잡합니다.

몸만 추잡한지 알아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가미되니까 그 몸에서 율법 지킨다고 싸대는 그 모양, 그 모습을 통해서 인간에 숨어 있는 내면의 정신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 정신을 향하여 율법이 화살을 쏘아댑니다. 폭격을 해대요. 육신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정신도 더럽다고. 생각도 더러운 거예요. 더러운 육신에 더러운 정신까지.

그 더러운 정신을 욕망이라 하는데 그 욕망은 내가 행복하고 살고 싶은 겁니다. 그 의지,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남 말고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그 의지, 그것이 욕망입니다. 무슨 권리로 그걸 주장하지요? 어디에 근거해서 그런 것이 정당화되는 겁니까? 없지요. 성경 어디에 봐도 없어요. 성경을 안 보잖아요. 내 기분에 맞춰주는 것이 없으니까 안 본다는 말이지요.

성경하고 점점 더 멀어져 가요. 아침에 거울 볼 줄은 알지만 성경은 안보잖아요. ‘와, 잘빠졌다. 오늘도 행복하여라.’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신약의 주장은 그겁니다. 개인은 과거요, 천국은 현재요, 그리고 미래라는 겁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을 빼보세요. 그러면 ‘나라’가 남아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은 과거고, ‘나라’는 미래고, 현재는 그 개인과 나라의 경계고, 이중성이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나라’라는 것은 개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개인이라 하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유재산이나 소유가 있을 때 개인이 성립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나라고 우길 수가 없어요. 은행가서 돈 빌려달라고 해도 “당신 개인재산이 얼마입니까?” 묻고 주는 법이거든요.

가진 것이 없으면, 소유가 없으면 개인이 성립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내 것이 될 수 없는 환경까지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무리 교회 나와도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 그 내 것을 가지고 ‘나라’에는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내 것이 뭉개지고 없어져야 내 위주가 아니고 나라 위주, 집단 위주가 되는데 평소에 우리는 계속 훈련받기를, 이 세상에서 내가 나를 훈련시키기를 ‘나만 잘되면 돼.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야.’ 나를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구약에 사랑이라는 말이 거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아까 한 아가서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아가서에서 남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그렇게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든요. 인공적인 것, 인위적인 것을 걸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만든 그대로가 다 나온 겁니다. 이 남자나 여자가 인간의 자질과 능력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든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게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게 아가서예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도 말합니다. “당신도 만만치 않아. 당신도 하나님의 작품이야.” 양쪽 다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문화적, 예술적, 자기의 노력, 성과. 자기의 행함을 걸치고 다니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지요.

“내사랑하는 자야. 내 사랑하는 누이야.” 원초적으로 우리는 가족이고 그 가족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어요. 구약에는 사랑이 없다. 그러나 신약에는 사랑이 나온다. 물론 구약에도 헤세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신약을 내다보면서,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미래 이야기를 앞당겨 보여주는 차원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구약에는 없는 사랑. 그러면 구약의 내용은 간단하지요. 왜 너희들은, 인간들끼리는 서로 사랑할 수 없는가? 왜 사랑이 안 나오는가? 그걸 제가 간편하게 말씀드리면 인간의 모든 정신과 태도는 자기의 몸의 더러운 본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자기의 영향권밖으로 벗어나지를 못해요. 내가 남을 사랑한다, 좋아한다, 당신이 보고 싶어요, 하는 그것도 나의 영향권, 내 중력권 안에서 도로 되찾게 되어 있어요.

어떤 말을 해도 고무줄이 달려서 놓으면 팅, 하고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요. 사람이 인간과 같이 있을 때는 사랑인 줄 몰랐는데 헤어지게 되면 환장합니다. 아, 사람이 헤어질 때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요. 제가 대중가요 중에서 가사를 읽어볼 테니 얼마나 절절한지, 얼마나 사랑이 처절하게 느껴지는지를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홀로 누워 천정을 보니 /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노래 좀 아는 사람 같으면 이게 김 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의 가사인줄 아시겠지요? 2절 가사는,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 오직 너만있을 뿐이야“

얼마나 처절합니까? 보고 싶어서. 또 어떤 노래가사는 이런 것이 있어요. “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나날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김 광진의 <편지>라는 노래입니다.

그대 있음으로 내가 힘들었던 나날을 내가 견뎌왔음을 당신과 헤어지는 마당에 감사하오. 그대 있음에 나는 힘들었지만 참아낼 수 있었다. 지금은 헤어지는 마당에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한다. 그대가 나와 함께 있어줬기에 이만큼 내가 지탱해 왔다는 것.

그 노래의 처음부분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이렇게 나와요. 이 세상 모든 노래들이 자기중력권, 자기영향권을 못 벗어나요. 나 외로우니 날 좀 사랑해달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조건하에 당신을 사랑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대중가요를 보면서 그렇게 슬프지는 않지만 동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일한 환경 속에 있기 때문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몰라요. ‘나’밖에 몰라요. 나 개인이 전부에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런 썩은 정신가지고 어딜 간다? 나라에 간다? 나라에 못갑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하는가? 둘이 만나서 쥐어뜯고 싸워서 그 걸쳐진 것을 벗겨내라는 거예요.

머리카락 붙들고 둘이 싸우라는 겁니다. 그 머리카락이 가발인 것을. 인생은 가발입니다. 인생은 전부다 꾸민 거예요. 위선이고 위장된 거예요. 잡아당기는 겁니다. 본 민낯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거 하라고 결혼시킨 거예요. 참 주례할 때는 이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요. 이혼식 할 때 이 소리 해야 돼요.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고요? 그럴 일은 없어요. 부모가 자식 사랑한다? 내 자식이니 사랑하지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롬 5:7)지만 어떤 인간도 죄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통해서 왜 이 세상은 지옥과 통하느냐? 지옥과 통할 때 어떤 출입문도 없어요.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탁류 흘려가듯이 그냥 흘러가요. 세상이 곧 지옥이고 지옥이 곧 세상이고, 서로 훤하게 바람 잘 통하게 되어 있어요. 위풍 잘 통합니다 지금.

그러니까 그냥 살다보면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가기 딱 맞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든지 나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그 마음자세가 썩어빠진 육신에서 나왔고 평소에는 그걸 굳이 억압하고 참고 있지만 아, 어떤 때는 그걸 폭발시키지요.

술이 달다는 말은 평소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말이에요. 괴롭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술 안 먹고 뭐 먹는지 모르겠어요. 초콜릿 씹는가? 이 세상은 구약을 통해서 증명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은 없다. 인간은 다시 원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다음 작업을 봐야 되지요.

그 다음 작업이 마태복음 3장 17절에 나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신약에 와서 비로소 하나님에 의해서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최초에요. 최초입니다. 어떤 인간도 사랑받은 인간이 없어요. 그런데 한 인간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처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예수님이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가 이질적사랑,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비가 되는 사랑, 대조가 되는 사랑의 펼침이라고 보시면 되거든요. 그 사랑의 특징은 있어요. 그 사랑의 특징은 뭐냐? 세상 악마의 권세가 그렇게 세고 힘들다 할지라도 악마의 세력을 뿌리치고 거기서 탈출이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악마는 인간을 ‘네가 잘했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그런 식으로 계속 협박했고, 겁박했고 그것으로 족쇄를 채워서 유리구슬을 관통하는 양심이라는 것,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 법적인 의식 같은 것으로 꿰어놓았어요. 어떤 인간도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잡아당기면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야고보서 2장에 그런 말씀이 있거든요.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라고. 과수원의 딸랑이를 설치해놨을 때 딸랑이 하나 건드리면 저 끝에 있는 딸랑이까지 소리가 다 울리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율법의 족쇄를 하나님께서 일부러 허락하시고 주신 이유는 어느 인간도 단독적으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율법의 저주에서 탈출을 했어요. 그게 긍휼입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탈출이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보고 나쁘다 소리를 하지 않고, 자기보고 옳다는 소리도 하지 않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이 옳았습니다.” 이야기해요. 주님이 옳았습니다. 굳이 나를 끄집어낸다면 “나는 무조건 나쁩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구약성경에 보면 주님의 사랑의 행적에 대해서 많이 예언들을 해놓은 것이 있어요. 구약성경을 언급하기 전에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수밖에 없고 그냥 놔두면 지옥갈 수밖에 없는 자에게 주님께서 사랑을 줄 때, 인간들은 이 사랑을 받게 되면 오해해요. 내가 예뻐서 사랑하는 줄 알고 오해를 하거든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니까. 나라가 아니고 인간은 개인이 전부니까 주님께서 사랑한다고 하면, 주님께서 구원한다 하면 나 좋아서 구원하는 줄 알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구약을 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간에게 달려듭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게 되면, 다리에 난 털을 제모 할 때 파스 붙여서 제모 하잖아요.

털 난 자리에 파스를 붙여서 뜯어낼 때는 우두둑, 벌겋게 털 뽑힌 흔적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뜯어내지요. 주님에게서 주어진 사랑환경은 기존에 내가 내 옷을 입고 내가 잘난 체하는 그곳에 파스 붙여서 뜯어내듯이 다 뜯어내 버려요. 쓰고 있는 가발을 벗겨낸다 그 말이지요. 뜯어내버리면 거기서 속살이 나오겠지요. 눈물이 나겠지요. WHY ME! 왜 하필이면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겠지요.

그게 바로 사랑이 임하는 자리가 비로소 노출된 거예요. “내가 죽었듯이 너도 죽자.” 그 말이지요. 말씀에 의해서.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에요. 못돼서 죽이는 것이 아니고 “네가 복된 자로다.” 하면서 죽여 버려요. “복된 자이기에 나와 함께 가자. 천국으로.” 하면서 죽여 버려요.

죽이는데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 위주로, 나 잘남, 나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들에 파스를 붙여서 따 떼어내는 겁니다. 생 털 뜯어내는데 이게 안 아플 수가 있겠어요? “주님, 이거 가져가면 안 됩니다. 못삽니다.” “살지 마라 인간아.” “이것만은 제발.” “어디서 이게! 손 떼” 파스 붙여버려요. 우리가 단독적으로 나의 잘남, 나의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들은 의도적으로 공격해 버립니다.

그게 오늘 본문 2절 끝에 나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예수님 자신이 파스거든요.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이게 뭐냐 하면,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부터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했다는 말이지요.

‘염소와 송아지’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로 했다는 말이 아니고, 염소의 ‘피’나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의 ‘피’로 했다. blood, 피, 혹시 놓칠까 싶어서 강조합니다. 자기 피로 했다는 것, 자신의 살과 피로 한 거예요. 예수님으로 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로 했다니까요. 예수의 멀쩡함이 아니고, 예수의 복주심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했다니까요.

‘예수님’이 들어오면 안 되지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와야지요. 그래야 내 존재가 인정을 못 받는 것이 되는 겁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든지 간에. 내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 도의라는 것, 도의적 책임, 그것마저 다 날라 가야 되거든요. 그렇게 모든 것을 파스 붙여서 뜯어내게 되면 비로소 영적세계와 육적세계의 경계선이 노출됩니다. 그게 경계의 미학이지요. 경계의 아름다움.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이 나오지요. 그 재판사건은 아이의 죽음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창기 두 사람이 있는데 둘이 동시에 아기를 낳았어요. 한 아기의 엄마가 애하고 같이 자다가 자기애를 깔아 죽였어요. 너무나 갓난애라서 저항도 못하고 죽었으니까 그 죽은 애는 어디에 숨겨놓고 옆에 있는 자기 친구의 애를 자기애라고 속인 겁니다.

그 당시는 유전자검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99.99퍼센트가 일치합니다.” 그런 것이 그 당시에는 없었다는 말이지요. 애를 데려다가 자기애라고 우기니까 아무 일도 없고 아무 탈도 없었던 여자가 보니 자기애가 없어졌거든요. 하지만 그 여자는 그 애가 자기아기인지 아닌지 대번에 구분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옆에 있는 못된 여자가 우기는 거예요.

애는 말할 수 있는 증언의 능력은 없고요. 판사가 안 받아줄 거니까 솔로몬에게 왔습니다. 솔로몬이 뭐라고 하느냐? 그 재판을 할 때 그 속에 죽음을 집어넣습니다. “애를 둘로 쪼개서 반반씩 나눠줘라.” 죽음을 집어넣을 때 인간의 본색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게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살아 있으면서 ‘무엇이 논리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 그 따위 생각은 하지 말고 죽음을 집어넣는 거예요.

어느 쪽이 자신의 바닥을 쳤느냐?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는 쪽이 어느 쪽이냐? 그게 진짜 엄마라는 겁니다. 엄마는 자기 아이를 살리고 자기는 죽음 쪽으로, 자기가 파탄 난, 내 것이……, 아까 했지요, 내 것이 없으면 자아가 없다고요.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스스로 포기를 해버려요. 진짜 아기엄마는 개인됨을 포기하는 겁니다.

솔로몬이 내뱉는 하나님의 원칙 앞에서 나를 포기한 거예요. 나 개인의 이익과 소유권을 포기한 겁니다. 그게 천국의 법칙의 원리에요. 누가복음 12장에도 나오지요. 어떤 동생이 와서 “형이 내 유산까지 다 가져갔습니다. 내 재산 좀 찾게 해주세요.”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영생은 소유의 넉넉함과 관계없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어떤 농부가 풍작으로 너무 좋아서 창고를 짓고 그 밤에 하는 말이 이제 창고도 그득하고 나는 부자가 되었으니까 자기가 자기보고 격려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넉넉하니까 잘 먹고 잘산다.’ 할 때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그 영혼 데려가면 창고에 있는 곡식, 모든 재물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가 너희들이 가고자 하는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가기 전에 어떻게든 이 개인이 소멸되어야 될 필요가 있지요. 그걸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자기 것을 자기 맘대로 포기할 생각이 있어요? 없습니다. 사는 목적이 뭔데요? 사는 이유가 뭔데요? 내가 왜 삽니까? 내 것 챙기려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 꿈과 희망을 좌절시켜 버리면 이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지요. 아까 그 노래 다시 보게 되면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밤새도록 그리워한 거예요. 그 유리창에 자꾸 쓰는 거예요. 썼다 지웠다……, “널 사랑해.”

그러니까 남자든 여자든 이 사람은 내가 준 내 사랑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내게서 나간 사랑이기 때문에. 내게서 나간 사랑이니 어떤 결실을 갖고 돌아오겠다는 거예요. 만약에 김 광석 이 사람이 이 가사를 썼다면, 그리고 이 사람이 교회 나왔다 칩시다. 교회 나와서 복음 들었다 칩시다. 그래서 교회 나와서 기도 한다 칩시다.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예수님 사랑할 테니 저를 구원해주세요.” 이런 소리 나오겠지요. 그게 지옥가는 사람 아닙니까? 어느 대목에서 뜯겨야 돼요? 뜯겨본 적이 없어요. 요령을 부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할 때 예수님께서 단독으로 받았거든요. 유일한 개인이에요. 유일한 인간이고 존재고.

그분이 가면서 열두 제자가 따라붙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뽑은 거지만. 열두 제자가 따라붙었는데 결국 십자가 질 때는 그 따라붙었던 열두 제자, 그 많은 군중들 다 떨어졌어요. 개인으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난 거예요. 하늘나라는 예수님 개인의 나라에요. 개인의 나라기 때문에 그 개인이 제공하는 사랑 외에는 그 천국에 들어갈 위인이 없습니다.

우리가 내민 사랑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가는 거예요. 그 사랑이 뭐냐? 파스에요, 파스. 우리 귀한 것을 뜯어가는 파스. 그게 오늘 본문에서 죽음이에요. 쉽게 말해서 “네가 한 것 없지? 그렇다면 죽음이 네 안에서 발산하고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 네가 방해하지 마라. 방해하면 다 터져버린다.”

그래서 성도는 현상이에요. 안에 있는 십자가죽음이 바깥으로 발산되고, 속에 있던 열이 바깥 피부가 벌겋게 하는 것처럼 십자가가 들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헐크라는 그 사람은 평소에는 몸체가 일반인과 같은데 화가 났다 싶으면 런닝구 다 째지면서, 근육질이 쫙쫙 찢어지면서 몸집이 커지지요.

성도가 헐크같은 존재입니다. 평소에는 남들처럼 살면 그게 인간이 사는 것으로 여기지요.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면 헐크가 돼요. 나 잘났다, 나 정당하다, 나는 이만하면 괜찮은 존재라는 것이 다 박살납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가 되면서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나오고 십자가의 보혈의 죽음, 피가 나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으니까 군말 말아라. 감사할 것 안할 것 고르지 말아라. 망해도 천국이다, 야. 그러면 되었잖아. 왜 망함에 초조하고, 망함에 겁박당하고 있고, 네 파괴에 대해서 네가 단도리 하려고 설쳐대느냐?” 그 사랑이 요한일서 4장 18절에도 나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끝난 거지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는다.

네가 두려움에 그동안 포로 잡힌 거예요. 그동안 법이라는 것에 사로잡힌 거예요. 내가 나를 질책하고 나에게 벌주는 식으로 살아왔던 그것이 내어쫒기는 거예요. ‘내가 이런 식으로 더럽게 살았습니다.’ 바르게 산다고 그게 바르게 산 것이 아니고 그게 더러운 것의 일종이에요. 바르게 사는 것이 더러운 것의 일종이고 정의를 외치는 것이 더러움의 일종이에요. 악하고 음란한 죄의 일종이라니까요.

내가 나를 따질 대상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그런데 우리는 그 올라오는 십자가의사랑을 극구 막습니다. 내가 나를 막아요. 마치 약속의 땅을 누가 막느냐?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가 가는 그 약속의 노선을 막아요. “못갑니다, 못갑니다.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있는 토착민들 힘이 너무 세기 때문에 못갑니다.”

그게 애굽이에요. 모세와 아론이 누굴 만났는가? 바로 왕을 만나지요. 천국과 애굽의 만남이에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줬는데 누가 성령을 근심되게 하느냐? 우리 자신의 행세, 평소에 하던 버릇, 습관, 인식이 “안 됩니다, 안됩니다.” 자꾸 우리 자신이 외치고 있는 거예요. 자기 가치를 논하면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이 세상은 덮개가 있어요. 고린도후서에서 세상악마가 세상에 뚜껑을 덮어놓았다 하는 거예요. 그 뚜껑이 우리 인간들 보기에 뭘 로 보이느냐?

마태복음 14장 8절에서 11절에 나오는데요. 거기 보면 세례요한이 죽을 때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죽지요. 세례요한의 역할의 마지막 대목이 목이 잘려서 쟁반에 담기는데 그게 뭐냐? 정치라는 권세, 세상권세가 최후의 덮개의 마지막 밑그림이에요. 천장에 보면 모자이크가 있지요. 그 모자이크가 정치적양상이에요.

세례요한이 죽은 것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민족의 안정성을 로마한테 보장받자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인간의 모든 의식과 이성이 마지막 도달되는 것이 뭐냐? 정치에요. “검찰을 개혁하라.” 정치에요. “조국은 물러나라.” 정치입니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정의로움의 마지막, 정치에요. 그 정치가 국가적 정치만이 아닙니다. 모든 조직에는 정치가 다 스며있어요. 하나의 가정에도 정치가 있고요.

특히 교회에서 정치가 있어요. 교인들이, 말씀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는 겁 안내고 목사가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그걸 겁내고 있어요. 왜? 정치적으로 몸이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회는 정치적으로 그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을 원하거든요. 제가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가 그겁니다. “계란으로 바위 친다고 바위가 깨지나? 계란으로 바위 친다고 계란이 깨지지 바위가 깨지나?”

예수님께서 왜 죽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발이 모자라서 죽었습니까? 사도바울이 말발이 모자라서 죽었습니까? 사도들이 말발이 모자라서 죽었고 스데반집사님이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죽었습니까? 죽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들 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죽는 것이 기뻐서 죽는 거예요.

“이 정치에 갇혀 있는 인간들아! 그것만이 아니야. 그 바깥에 딴 세계 있어.” 영적세계 있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주는 그 사랑의 세계가 있다고. 그런데 악마는 이것을 가두어버렸습니다. ‘사람은 너 하기 나름이다’ 이런 것으로 가두어놓았어요. ‘네가 바르게 하면 복 받고 천당하고, 네가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 이걸로 가두어 뒀습니다.

인간 안에 법이 가득 차 있어요. 어떤 용서가 들어있지 않고 어떤 긍휼도 없어요. 오직 나 잘났다는 정당함만 가득 들어 있어요. 그것만 수집해서 그 안에 모아놓았어요. ‘이 잘난 나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이런 식으로요.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목사가 장로 건드리면 장로가 ‘너 오늘 죽었다.’ 교인이 목사보고 ‘목사, 너 죽었다.’ 목사가 집사보고 ‘집사, 너 오늘 죽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겁니다. 가정도 인간이 만들고 육으로 만든 거예요. 더러운 육체들이 오줌 싸고 똥 싸는 더러운 인간들이 만든 것이 이 세상이에요. 왜 그 세상을 두게 하는가?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빠져나오는가? 파스지요. 십자가파스. 아파도 너무 아파요. 내가 자랑할 것만 표적공격을 합니다. 내 자랑거리, 내 잘남을 증명할거리만 표적공격해서 뜯어내지요.

그러면 우리는 머리카락 완전히 털려서 대머리돼요. 후딱 가발가지고 씌워버리지요. 그러면 교회의 만남은 뭐냐? 교인들이 만나야 돼요. 만나고 대화해서 서로의 가발을 벗기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네가 얼마나 잘났는가 보자. 네 민낯을 드러내라.’ 벗기는 겁니다.

오늘 본문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사람이 아니고 현상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 사도들이지요. 나중에는 성령 받은 자.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하나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땅에 와서 죽었지요. 네가 죽는자에 합세하고. 그런 뜻입니다. 죽는 이유를 알고. 그런 뜻이지요.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의 주님이 우리를 죽게 만들지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피와 사랑을 주신 거지요. 너희도 그 피와 사랑가운데 거하라. 이거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우리는 이거 할 능력 없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왜? 우리는 죽어가지만 우리보다 말씀이 지금도 더 세기 때문에. 주님이 더 세기 때문에.

주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기어이 이것을 성취해내고야 맙니다. 그렇게 성취할 때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이게 바로 믿음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주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이지요.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은 이 사랑으로만 나타나는 겁니다. 썩어질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것이 마구마구 나오는데 우리가 거기서 막고 싶어도 막을 수가 없어요. 성도는 어쩔 수 없이 구원되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미래의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징조로서 이 땅에 성령을 줬기 때문에 나도 여러분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나 개인의 자랑을 하고 싶어도 주께서 용납을 안 해줘요. 오직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나라,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생축이 있고, 우리 안에 죽었던 분이 계시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용서와 사랑이 터져 나오니 저희들이 나서서 말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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