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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 12:37:27 조회 : 3353         
   새로운 심령 19090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새로운 심령 (에베소서 4:21-2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dnzRem2V9DA, Hit:28
 이근호 19-09-08 13:35 
새로운 심령

2019년 9월 8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21-24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예수님이 가미되면 모든 것이 초기화되어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이 손 댈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내부에 이미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 빼놓으면 인간의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 욕심이 준해서 인간은 탐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로운 심령’이나 ‘새 사람’은 모두 덫이요 미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초기화로 돌려세우려는 계획의 일환입니다. 인간은 좋다는 것은 뭐든지 챙기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산 자’로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자신이 어디가 문제인지, 왜 문제인지를 전혀 모르고 산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가 누군지?’ 알려주는 이는 없습니다.

고만고만들 합니다. 각자 살아 있다고 우기는 자들입니다. 산 사람의 특징은 일단 다들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그리고 그 교만함을 유지하기 위해 뭐든지 좋다는 것은 다 소유하고 소지하려고 합니다. 셋째로 이런 행위가 스스로 정당하다고 우깁니다. 욕심이 잉태하고 죄를 낳는데 그 죄의 모습은 ‘자기 정당함’입니다.

달리 말해서 “나는 절대로 망해서는 아니 되고 죽어서도 아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밤에 공동묘지인 줄도 모르고 폭신한 잔디밭 위에서 단잠을 잤던 나그네가 아침 햇살이 사방에 널려 퍼지게 되면 비로소 여기가 공동묘지인 줄로 아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다같이 죽어있으면서 다들 살아있다고 우깁니다. 그러니 자기 형편이 어려우면 교회에 전화해서 살기 힘든 나를 더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애초에 살 권리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을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평생을 애쓰고 노력해봤자 결국 남는 것이 자기 묫자리 하나 뿐입니다.

에베소서 4: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과연 우리가 예수님에게 뭘 배웠습니까? 아니, 배우려는 생각이라도 갖고 계시는 겁니까? 과연 예수님으로부터 뭔가 배울 점이 있다고 여기시는 하시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은 균등하게 보십니다.

다 죽은 자들이니까요. 이는 개인 대 개인의 경쟁과 비교를 일체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 속에 예수님마저 스스로 부분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되는 사실은,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죽이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필히 다른 신, 다른 예수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므로 모든 인간들은 다 죽은 자라는 것으로 확정지어졌습니다. 이것이 최종성입니다. 이 사실기 위해서 등장되는 것이 ‘새 심령’이며 이 새 심령을 입은 자가 ‘새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고 살아나심을 증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아나셔서 자신의 죽음을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모든 인간에 대한 복수감행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 홀로 죽었다고 살아남은 그냥 예수님 자신의 ‘자기 구원’일 뿐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새 심령을 받은 자들이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참으로 정당한 조치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 심판의 대상 가운데는 그 인간이 전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당연히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새 심령은, 인간들의 옛 심령의 추이를 따릅니다. 인간들의 욕심과 교만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취득하므로 서 충족시키려 하게 되면, 이런 자신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같은 작업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이것은 예수님이 벌리시는 계획에 의거해서 자기 백성을 소유하시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여기십니다.

이 과정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따라서 새 심령이란 이 수모와 핍박성을 띠고 나타납니다. 인간들이 끝까지 빼앗기거나 놓기 싫어하는 것을 주님께서 건드리게 되면 인간은 불만을 필히 터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새심령이란 옛 심령 속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에, 자기 부인에서 나오지 않는 모든 말은 말이 아니라 소음에 불과합니다. 새심령에 합당한 말이란, 자신의 죽음과 망함에서만 도출되어야 합니다. 망한다는 것은 숨길 수치심마저 더 이상 없음을 두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행되는 인간 세계에 대한 보복과 복수를 참으로 마땅히 행사되어야 될 타당성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심지어 가장 귀한 내 자식이 비록 그 심판 속에 섞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옛 심령 속에서 새 심령을 자아내십니까? 예수님의 장례식은 3일장이 아닙니다. 장례식 없이 죽음 속으로 들어가셨고 그분은 이 세상에서 자기 묫자리가 애초부터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이 묫자리로 삼으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새사람이요 새 심령입니다. 이런 성도들의 마음은 중앙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靜(정)中(중)動(동) 상태가 됩니다. 즉 고요함 속에 중앙만 홀로 움직이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예가 됩니다.

남들 보기에 분주하게 일하시만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합니다. 실제로 일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요동치는 이 세파 속에서 홀로 평온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자기 몸만 편안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런 혜택을 입기를 원합니다.

이 사람들은 사는 것 자체를 안 망한 상태이기를 고대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배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왜 이렇게 마땅히 망가져야 하는 존재이고 왜 지옥가야만 하는 존재인 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미래란 의미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쉬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살지 않고 이미 죽은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9-09 16:05 
40강-엡 4장 21-24절(새로운 심령)1909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21-24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21-24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용어 하나하나가 함축되어 있으면서도 연속되어 있지요. 앞에 것 지키려 하니 뒤엣것을 놓치고 뒤엣것을 지키려 하다보니 앞엣것을 수습 못할 것만 같은, 무게가 있는 것들이 계속해서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것부터 먼저 할까요?” 하는 질문이 절로 일어날 정도로, 이것도 지켜야 되고 저것도 지켜야 되고. 마치 율법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디에 초점이 있느냐? 새사람을 입으라.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여. 여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새로운 심령, 또는 새심령. 본문에서 이게 나왔을 때에 성경을 보는 사람이 여기에 눈이 번쩍, 하고 가게 되어 있어요. 새로운 심령이 경품으로 나왔다는 거예요. 떴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새로운 심령, 이걸 소유하고 싶지요. 갖고 싶은 거예요. ‘아, 새로운 심령이 있으면 이것은 확실하게 천국 간다.’ 그런 생각이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 것처럼 나타날 겁니다. 그 새로운 심령이 있을 때 그걸 가지고 24절에 새사람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새로운 심령이 있는 사람은 새사람이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가지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누가 뭐래도 나는 신자 맞고 천국 간다.’ 새사람, 그것을 내 것 만들기 위해서 작업에 나서겠지요. 그런데 이게 미끼라면, 이게 덫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질 수 없는 것을 제공했다는 것은 이미 새사람, 또는 새로운 심령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제시했는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성경에 나와 있으니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입으라.” 했으니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덤벼든다면 그것은 백프로 가짜입니다.

새로운 심령, 새사람은 가질 수 없어요.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는 이것이 덫인데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는 이것이 미끼인데 그 취지를 못 알아듣고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납니까?”라고 다시 태어나기를 시도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말씀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뭔가 곡해하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 4시쯤 되었는데 교회에 대해서 그런 곡해를 하는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집전화로 왔는데 “우리교회 목사님 되십니까?” “예” 전에 보성 2차에 살았다는데 지나다 보면 우리교회 라고 간판이 있잖아요. 거기에 전화번호가 있는 거예요. 053-983-7464. 전화번호가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전화번호를 보고 교회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해서 못 들어가고, 어머니 장례 치르고 난 뒤에 부도가 나서 마누라 도망가고, 애는 여섯 살 다섯 살짜리 있는데 집은 경매 잡혀 날라 가고, 영천에 지하 단칸방에 산다. 부도나고 난 뒤에 약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애들 봐서 못 죽고 …….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길게 하면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집에 쌀만 있고 반찬은 없고, 동사무소는 토요일이라서 놀고 목사님에게 반찬값이라도 달라고 전화를 한 거예요. 그래서 그랬어요. 약 먹고 죽으라고. 인간은 살 권리가 없다고. 사는 것을 무슨 권리처럼 행사하느냐고.

교회를 오해하고 있어요. 돈 뜯어가는 곳인 줄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인간은 살 권리 없습니다. 인간은 사는 것이 이게 죽음으로 것이고 이것은 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려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대뜸 화를 내면서 “어디서 설교질이야?”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설교도 안 듣고 돈을 바랐는가? 갑자기 전화를 탁 끊었어요. 끊고 난 뒤에 또 전화가 왔어요. “당신 뭐라고 했어? 그 따위로 하면서 목사야?” 하고 나와요. “죽으라고 했다. 왜! 약 먹고.” 교회는 살려주는 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죽이느냐를 아는 데가 교회에요.

산다는 것 자체가 옛날심령이기 때문에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여기서도 살고 천당 가서도 살고. 이게 옛날심령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살리는데 필요한 정보, 성경지식, 그거 끌어 모으려고 교회 온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인간자체가 질병이구나.’ 도대체 그 사람이나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우리가 몰라요.

밤중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잔디밭이 있네.’ 하고 푹신한데 누워 잤다는 말이지요. 아침 햇살에 떠오르기 전까지. 그런데 아침 햇살이 떠오르고 보니 온 천지가 공동묘지에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듯이 빛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이것이 어둠인줄 몰랐어요. 공동묘지인줄 몰랐지요. 빛이 어둠속에 나타나니까 온천지가 다 어둠이고 공동묘지에요.

선배들 공동묘지, 이제는 후배들 공동묘지를 마련해놓고. 보람상조 있잖아요. 전부 다 결국 한평생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마련한 것은 내 공동묘지 하나. 내 묫자리 하나 마련한 그것, 그거 하려고 평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장례식을 몇일장으로 했지요? 예수님이 며칠을 장례식 했습니까?

에베소서 4장 20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했는데 여러분, 예수님한테 뭐 배웠습니까? 예수님한테 뭐 배운 적이 있어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증거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나서 자기 죽음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 말이나 그 말이나 아닙니까? 아니에요. 나는 죽었는데 살아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나신 분이 본격적으로 자기죽으심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야 인간들에게 복수할 것이 있잖아요. “너희 다 죽었어. 다 죽었어.” 예수님이 그냥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좋겠다. 구원받고.’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하고 상관없는 이야기가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살아서 자기죽음을 모든 인간에게 앞앞에, 각각 지적함으로서 너희들이 태생 자체부터 문제 삼겠다는 겁니다. 태어난 그것부터 문제 삼겠다는 거예요. “생일축하 합니다.” “그래, 많이 해라. 내가 문제 삼겠다.” 그걸 역사의 초기화라고 하는데 역사자체를, 살아있다고 우기는 인간들을 향하여 역사자체를, 그 인간을 가지고 도대체 인간의 역사는 처음에는 어떠했고 어디서 문제가 발생되었는지를 내가 문제 삼고 파헤치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실험실의 생쥐로 여기는 겁니다. 눕혀놓고 째고, 해부하고, 끄집어내고. 우리 속에 질병이 있거든요. 그 질병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주께서 우리 심령 째서 ‘여기 있네.’하고 드러내는 거예요. 그 바이러스와 그 병균을, 그 괴물을. 괴물한테는 그것이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요놈이에요 요놈. 요놈을 끄집어낼 때 몽땅 다 끄집어내면 그냥 빈껍데기라니까요.

안에 ‘요놈’이라는 괴물로 꽉 차 있어요. 마귀지요 뭐. 그걸 가지고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욕심이라고 합니다. 구습이라고 하고 욕심이라고 해요. 만두에도 피가 얇은 만두가 나왔다 하거든요. 마트에 가서 얇은 만두 사려고 잘 안보이던데 하여튼 그 피가 아주 투명할 정도로 얇은 게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만두는 그 안이 내용물로 꽉 차 있거든요.

그 내용물을 잡아당겨버리면 그 얇은 만두피는 그냥 허물어지지요. 그냥 껍데기니까. 몸이 빠져나오면 옷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잖아요. 우리는 욕심 끄집어내면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욕심 때문에 버티는 겁니다. 욕심, 다른 말로 하면 교만, 또는 오만. 그 욕심은 손톱처럼 매일같이 자랍니다. 자는데도 자라요.

밤에 잘 때 휴대폰 밧데리는 닳아도 손톱은 자라나요. 돌아서면 욕심이 또 나와요. 욕심이 나오게 되면 욕심이 제일먼저 하는 짓거리는 뭐냐? 소유에요. “새사람을 입으라.” ‘야, 그거 좋네. 나 교회 가서 새사람을 입어야지. 새심령 얻어야지.’ “성령 받으라.” ‘나 성령 받아야지.’ 내 소유로 하려고. 내 소유화하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내 욕심에서부터 시작해서 ‘나 예수 믿어야지.’ 그게 요놈이라는 괴물이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 내가 더 살기 위해서 그런 짓 하는 거예요. 약 먹고 죽으려고 했다는 그 인간, 그것이 상투적인 사기수법이거든요. 교회마다 몇 군데 돌면 하루 일당 나온다고요. 교회 하다보면 그런 사기꾼들도 밝혀낼 수 있어야 돼요.

우리교회는 사찰이 없으니까 신경 쓸 것도 없지만. 산자가 죽은자를 향하여 전화를 해버리면 대화가 안돼요. 부부사이라도 한 사람은 복음알고 한 사람은 교회 다니면 둘이서 대화가 안 되는 이유를 알겠지요? 복음 아는 사람과 교회 다니는 사람은 서로 대화가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는 살았다고 생각해서 교회 가서 사는 인간이 더 살기 위한 정보획득을 위해서 교회 다니거든요. 산자들은.

그러면 죽은 자는? 죽은 자는 주님께서 괴물을 끄집어내기 때문에 빈껍데기밖에 없으니까 무엇을 더 얻을 필요가 없어요. 아직도 얻을 것이 남아 있나? 아니요. 뺄 것만 남아 있습니다. 빼기만 남아있지 더하기, 플러스는 없어요. 교회에서 맨 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헬프 미!” “뭘 살려줘. 뺄 것만 남아 있는데. 그것 봐. 하수구가 막힐 만큼 이런 덩치의 욕심이 들어 있잖아.”

이렇게 욕심이 손톱 자라듯이 자꾸 생기고 거기서 미흡함이 생기기 때문에 불안이 생겨요. 미흡함이 있으면 정신병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정신병자고 질병이니까요. 인간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정신병자에요. 미흡함을 못 견뎌요. 그것 때문에 불편해서 안 돼. 옛날 고등학교 때 학교 다니면서 제가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 있었어요.

“혹시 어느 선생님입니까?” 할 수 있는데 선생님이 아니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다 떠나고 난 뒤에 손전등 하나 들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학교를 돌아다니는 수위할아버지를 내가 그렇게 존경했어요. 왜 존경했느냐? 3층, 4층 건물이 있는데 옛날 학교건물은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어서 삐걱거리잖아요.

학생들이 청소한다고 궁둥이 쳐들고 머리 처박고 마루바닥 문지르고 했잖아요. 그 복도에서 밤중에 걸으면 삐걱거린다고요. 밤에 학생들 다 떠나고 혼자 남게 되면 청소년 입장에서는 무서워도 너무 무서워요. 학교 그 덩치가, 캄캄한 학교라는 덩치가. 그렇게 무서운데 그 수위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거길 돈다고요. 그 무서운 곳, 거기서 여고괴담도 나올 수 있는데.

텅, 텅, 텅, 귀신 나올 수 있는데 아무도 없는 그곳을 돌아다닌다고요. 왜 그러냐 하면, 할아버지는 이미 하도 많이 다녀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를 다 알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요령은 뭐냐? 죽은 자가 되면 모르는 것이 없어요. 이 땅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게 되면 죽은 귀신, 껍데기만 남게 되면, 그걸 최종성이라 하는데, 새심령은 최종성에만 나타나는 거예요, 최종성이 죽은 것을 알게 되면 왜 그렇게 법무부 장관을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가 다 나타나요.

산자들은 미흡함이 있지만 이미 죽은 자, 최종성에 도달된 사람은 더 이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도 없고, 그리고 남들이 어떤 수법에 의해서 저 소리를 하고 저런 짓거리를 하는지를 다 알아요. 사람이 내뱉는 말이 자기 부인을 거쳐서, 자기부정을 거쳐서 나오지 아니하면 그것은 소음입니다. 대화할 때 자기의 최종성……, 새심령이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모든 심령들은 다 공동묘지고 죽었다.” 하고 선언하시면서 비로소 제시되는 심령이 새심령이고 새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최종성입니다, 최종성. 예수님은 종결자고요. 이미 죽은 자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 교회를 오해하는 것은 뭐냐? 살아있는 자가 더 잘 먹고 복되게 살려고 교회 왔고, 죽어서는 천당 가려고, 살아있는 나를 그대로 인수인계해서 천당 가려고 오는데 그것은 산자라는 이 옛심령 한테는 뭐가 먹히지를 않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혀 먹히지를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한테 하등 배울 것이 없어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계속해서 심판과 저주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종성, 새심령을 만약에 여러분이 갖고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들면 여러분은 새심령, 새사람입니다. 뭐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는 참 합당한, 정당한 조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왜 새심령에서 그게 나오느냐? 새심령은 옛심령 속에서 핍박받고 배척받고 미움 받는 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옛심령 속에 있는 괴물한테 핍박받고 미움 받는 식으로 새심령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여러분들이 옛심령,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잘 하고 있어요. 옛심령은 뭐냐 하면, 욕심이 덩어리로 되어 있고 욕심이 발휘하는 것은 소유입니다.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조금 더 나다운 것, 조금 더, 조금 더. 그걸 시도하거든요.

그렇게 시도하게 되면 노리는 것이 뭐냐? 정당성이에요. 나는 정당하다. 첫째는 욕심부터 시작해서 소유로 되고, 세 번째는 나는 정당하다. 새심령은 이걸 그대로 빼다 박았어요. 예수님의 요구사항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요.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즉 예수님이 우리를 소유하게 되고, 그 예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14장 1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취소 안돼요. 반드시 오게 되어 있어요.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오신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입장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너희는 남의 땅에 떠돌아다니는 고아 같은 신세로 내가 반드시 만들고야 말리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살고자 하는 집단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그래서 예수님만이 정당합니다. 예수님의 조치와 처리와 심판과 저주, 그리고 예수님의 긍휼과 구원은 합당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은 우리를 소유하시고, 예수님은 자기의 욕구대로, 의지대로 마구마구 다루시고, 그래서 그것을 자기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서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자기소유로 삼았고, 그것이 예수님의 의라고 했는데 그 의에 의해서 천국 가거든요.

그 맞은편으로 갑시다. 맞은편에 가게 되면 맞은편에 누가 있느냐? 나는 살고 싶다. 살기 위해서 나는 소유해야 된다. 교회 와서 한 수 배워야 되고 바르게 살아야 되고,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 용돈도 줘야 된다는 그런 것들 있잖아요. 그리고 내 이런 조치,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뭘 하고, 뭘 믿고, 하는 그 모든 행동, 착한 일을 하는 이것은 나에게는 정당하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그 짓하게 만든 거예요. 마귀가, 우리 속에 있는 욕심덩어리가 그 짓을 하게 만들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옛심령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이 탁 등장하거든요. 얼마나 이게 유혹거리입니까? 얼마나 유혹거리인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벌써 우리는 막 바빠요. “저요, 저요! 저보고 이야기하는군요.”이러거든요.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제가 전에는 절에 다녔어요. 전에는 제사도 지냈어요.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을 줄 주께서 아시지요?”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자기가 폼 내고 있는 거예요.

23절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이제 난 교회에서 살련다. 교회에서 살래.’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야, 이거 대학교선교단체 일거리 생겼네. 의와 진리, 자기 전공과목, 화학이니 건축이니 다 버리고 오직 학교 다니는 내내 성경공부만 하면 되겠네요. 여러분 안 해본 얼굴이니 그냥 넘어갑시다. 대학 다니면서 선교단체 안 해본 사람은 그냥 넘어갑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파키스탄 선교하고요. “새사람을 입으라.” 뭐 이거 가슴이 두근두근 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목표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게 다 욕심이라면 어떻게 할래요? 이게 다 악마의 유혹이라면. 덫이라면? 가짜라면? 만약 이 식대로 여기에 필요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나에게 장착되고자 한다면, 그 인간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 인간은 자기부인을 경유한 고백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입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은 합당하고 정당합니다.”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이 불심판 받는 그것은 너무나 정당합니다. 내 아들, 내 딸이 지옥가는 것도 정말 잘한 조치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내 아들만큼은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니 지금까지 이야기를 해보면, 제가 다시 말합니다, 도대체 내가, 남 말고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근원적으로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근원적으로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도통 알 길이 없어요.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어떤 문제도 모르고 그냥 왔다갔다 해요. 다른 교회 같으면 ‘12시 반에 결혼식 있는데 빨리 끝내줘야 되는데.’ 이렇게 하고요.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만.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욕심, 옛심령을 못 빠져나와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나를 쥐고 있기에 나는 그냥 만두피라니까요. 투명한. 괴물이 꽉 차 있는데 다른 생각, 나를 부인한다? 미쳤어요? 내가 뭐가 못나서 부인해요. 내가 얼마나 잘났는데. ‘나는 정당하다. 나는 관대하다.’ 이러고 있는데.

잘난 내가 왜 못났어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못난 구석이 없는데 어떻게 그걸 못났다고 합니까? 물론 억지로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 마음에도 없는 소리거든요. 남들이 어떻게 하고 조국이 어떻게 해도 조국을 비판하는 나는 정당하거든요. 갑자기 조국이 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 그 많은 유-튜브들 많아도, “나는 못났고,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나는 쓰레기입니다.”그렇게 올리는 유-튜브 봤습니까? 저는 못 봤어요, 저는. 살아 있는 것을 정당한 권리로 보는 거예요. 마땅히 살아야 될 것처럼 그런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가끔은 벌 받을까 싶어서 ‘욕심내면 안 돼.’ 하지만 자고나면 욕심은 또 크는데요.

욕심하고, 묘지에 있는 그 풀은 왜 그리 잘 자라는지. 또 시간 내서 벌초 가야 돼요. 추석 닥치는데 시간 내서 벌초가야 돼. 동생보고 가라니까 동생은 안 간대고, 형도 안가고 또 내가 가야 돼요. 귀찮아 죽겠어요. 이럴 것 같으면 부모님을 벌초가 필요 없는 장소로 매장할걸. 내년에는 아예 바꾸시기 바랍니다. 벌초가 필요 없는 곳으로.

새심령이라 하는 것은 우리 심령이 아니고 주님만 새심령입니다. 왜? 그 심령 안에는 옛심령을 고발하고 부정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가 들어 있는 심령이 새심령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옛심령이라는 만두피에다가 새심령이라는 만두 속에 들어와야 돼요.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주님의 묫자리입니다. 움직이는 묫자리.

고정된 묫자리가 아니라 모든 오고 오는 세대에 자기백성의 속에다가 예수님심령을 다 집어넣는 거예요. 붕어 방에 앙꼬 날려서 집어넣듯이. 툭, 툭, 툭, 넣고 돌리고, 또 툭, 툭, 툭 넣고 돌리듯이. 주님께서 자기심령을 죽죽 날리는 거예요. 옛심령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네가 이것밖에 안되어서 네가 이런 시도를 한 거야. 성경보고 네가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이런 짓거리를 한 거야. 이것 때문에 네가 교회 다닌 거야.” 이렇게 죽죽 던지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다른 세계가 없다는 거예요. 왜? 최종성이니까. 십자가가 최종성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했지만, 묘지가 묘지인지도 모르지요. 그냥 푹신하니까 잠 잘 잤다는 말이지요. 깨보니 햇살이 내려쬐이고 온 전체가 다 공동묘지에요. 이 세상 전체가. 조금 까불어도 나중에 죽어 있고 그렇다 그 말이지요.

우리의 최종성은 산 사람은 파악이 안돼요. 특히 남자들, 저도 남자지만 그런 오기 같은 것이 있어요. 남자들은 은근히 어떤 환상 같은 것이 있어요. 여자들은 그런 것이 없는데 남자들은 그런 것이 있어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는 그런 것. 졸장부라는 말이 남자에게는 아주 굴욕적이고 제일 듣기 싫은 거예요.

“에이, 남자가 쩨쩨하게.” 이러면 남자들은 지갑 다 풉니다. 남자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이 있어요. 장렬한 최후. 인상적인 엔딩. 영웅적인 결말. 프랭크시내트라가 불렀던 노래 마이웨이, 그런 것. 어떤 관객이 노래하는 여가수, 휘트니휴스턴에게 총을 쏘니까 “웬 다이아……” 노래 깔리면서 보디가드가 탁 나와서 막아주는 그런 것.

여자는 또 끝까지 쥐는 것이 있어요. 아름다움. 86세 되어도 아름답대. 늙어가도, 후패해도 아름다워. 남자는 객기. 여자는 아름다움. 둘 다 공동묘지의 묫자리 마련하려고. 예수님의 특징이 뭐냐? 이 세상에 유일하게 묫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유일하게 묫자리가 없다는 말은 그 나머지 묫자리가 있는 인간과 극한대비가 되는 겁니다.

아예 약을 먹고 죽겠다는 것은 뭐예요? 장렬한 최후, 엔딩 아닙니까? 잘 못살았어도 죽을 때는 남자다웠다는 그 말 아닙니까? 하지만 그 장렬함, 그것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곡해하고 오해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결코 장렬한 최후가 아니고 남자라면 제일하기 싫은, 비참하고 온갖 수치를 다 드러낸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뭐 배웠어요? 뭘 배웠습니까? 남자를 대단한 남자로 쳐주는 그것 배웠어요? 주님께 도대체 뭘 배웠어요? 안 배웠지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안 배웠지요. 배우기 싫지요.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 숨을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 최종성이 되게 되면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 앞에 숨길 수 있는 그런 방호, 토치카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노출 다 됩니다. 그게 최종성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남아 있는 미래도 없다는 뜻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남아 있는 미래를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없어요. 그냥 공동묘지의 연속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심령, 새로운 심령, 새사람이 왜 미끼고 덫이냐? 우리가 소유하니까 옛심령이 있고 거기에 또 새사람을 입고, 새심령까지 장착하고 탑재하게 되면 나는 천국 간다, 라는 이것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느냐? 산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따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누구나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산사람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의 율법이 주는 그 따끔함, 그 가시를, 저주의 소낙비를 아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냥 낮추면 되는데, 그냥 죽었다, 하면 되는데 자꾸 살았다고 으스대니까 온 화살과 총알을 다 맞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옛날 이스라엘이 이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사람이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부터는 힘들고 고통을 느끼게 되고 감지하게 되어 있어요.

아침에 눈만 뜨면 모든 것이 힘들어요. 사는 것이 힘들고 아파요. 왜?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냥 고요하게 지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소원, 오늘도 조용하게 지나가는 이것이 소원이에요. ‘오늘도 무사히.’ 따라서 주님께서 일하실 때 산자에게는 계속해서 율법의 저주가 그냥 유황불처럼 쏟아진다는 것을 감안해야 됩니다.

그러면, 죽은자가 되면 죽은 자에게 뭐가 오느냐? 여기에 복음이 와요. 복음,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내가 살았다고 자꾸 우겨버리면 기쁜 내가, 기쁜 예수님을 대신해버려요. 예수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살아 있는 나를 굉장히 기뻐해요. 살아 있기 때문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요소를 스스로 자청하고 있는 거예요.

엎어지고 자빠지면 되는데 안 넘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니까 망하라는 말이에요. 매사에 망하면 돼요. 아까 이야기한 그 사람이 약 먹고 자살한다고 하는데 진짜 우리는 약 먹고 자살하면 안 되고 예수약 먹고 자살해야 돼요. 매일같이 자살해야 돼요.

약 대신 예수님 먹고 매일같이 자살해야 돼요. 죽어야 됩니다. 죽기 위해서 살면 돼요. 왜 죽기 위해서 살아야 되느냐? 우리가 죽은 것이 맞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우리한테 어울려요. 성도한테만 어울리는 이야기에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자꾸 미루고 있느냐? 그러면 어떻게 옛사람에서 새사람 되는가? 그 이야기를 지금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왜 미루냐 하면, 그런 방법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걸 내가 알아서 새사람이라고 까불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보나마나. 새사람, 새심령을 입으라는 것은 나중에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에베소서 4장 20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부터 해서 21절에 보면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되어 있어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할 때 사람들은 또 생각하기를, ‘예수 안에 있다는 그 진리를 지식으로 오해해서 그 지식을 내가 알면 되지. 그 지식을 내가 소유하면 되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이제부터는 우리를 진리차원으로 다루겠다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 복음이거든요. 복음이 진리입니다. 복음이 진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문자 한번 쓸까요? 정중동(靜中動). 조중동, 그거 말고요. 조선, 중앙, 동아일보, 그거 말고요. 정중동. 이게 뭐냐 하면,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다는 거예요. 고요함속에 움직임. 이걸 누가 시범을 보였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시범을 보여줘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그렇게 고생하고, 강도의 위협이니 도적의 위협이 그렇게 설쳐대도 그것자체가 죽은자한테는 그냥 죽은 자의 현상이기 때문에 그냥 고요에 속하는 거예요.

그 사도바울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반대로 생각하고 교회 올 때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세상은 분주해도 나는 도를 너무 닦아서, 나는 초월을 해서 나는 고요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몸 편하고 마음만, 심령만 편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고요한 분은, 우리가 고요하면 안 되고 우리속의 예수님이 고요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최종성입니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지금 얼굴들 보니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는데 최종성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을 주님 보시기에 십자가 앞에서 균등하고 본다. 전부 다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그 죽은 자 속에 우리가 들어 있는 겁니다.

들어 있는데 갑자기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면 그 예수님이 우리를 새사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와 한패인 것을 알려주는 그러한 안목을 주시는 것, 그게 바로 새사람이에요. 우리가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새사람이 내 안에서 움직이고 나는 바깥에서 죽은 껍데기가 되는 거예요. 옛날 악마가 내 안에서 살아 있고 나는 껍데기가 되는 것처럼 이제는 주인이 바뀌었어요.

예수님이 움직이고 나는 예수님이 움직이는 대로 내가 죽은자임을 바깥에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뭘 해도 이것은 내 중심이니까 나는 죽은자 맞잖아요.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부분이 전체를 움직인다고 하는 거예요. 부분이 전체를 움직인다는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게 되면, 땅콩 알레르기가 있지요.

땅콩 알레르기라는 것이 뭐냐? 사람이 멀쩡해요. 멀쩡한데 땅콩만 들어가면, 땅콩샌드나 땅콩버터, 그것만 먹으면 얼굴이 벌게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거든요. 부분이 전체보다 우세한 거예요. 성도는 예수님이 눈에 안 띕니다. 남들에게도 눈에 안 띄어요. 하지만 본인 안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땅콩 같은 요소가 예수님이에요.

법무부 장관되려고 그렇게 애쓰는데 그 딸내미 때문에 문제 아닙니까?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내 뜻대로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죽음으로 복수하려는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진즉에 망한자가 되는 거예요. 남들한테 우리는 멀쩡해요.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이미 망한자에요.

망한자는, 수치심이라 하는 것은 사치입니다. 수치는 사치에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예수 찾고, 삼위일체 찾고, 하나님 찾는데 그거 전부 다 바알을 찾는 거예요. 수요일 설교 들어보면 “아부쥐이~~, 아부쥐이~~.” 그것은 바알을 부르는,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충남 보령…… ‘잃어버린 우리 소리를 찾아서’ ……, “아버쥐이~, 쭈우여어~ 쭈여어~ 믿쑵니다~.” 이게 괴물목소리 아닙니까? 여고괴담에 나오는 소리. 바알을 부르는 거예요.

이게 옛심령이에요. “쌔~샤람 되겠쑵니다.” 새사람인지 쇠사람인지 분간도 안 되지만 “새사람이 되겠습니다.” 뭐하려고 새사람이 되는데요? “새심령 되겠습니다.” 구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야 여기 나오네. 의와, 진리와, 윤리, 도덕 동원 다해요. “새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내 자식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그런 것.

아직도 수치를 느낄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정신병 더 되세요. “주여, 이것만큼은 손대지 마세요. 차라리 내 목숨을 바치겠는데 이것 손대만 나는 정말 못 견딥니다. 정말 나는 교회 못나옵니다. 주여.” 그래서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 많아요. 아까전화번호부 봤는데 3분지 1도 안돼요. 왜? 그걸 건드렸으니까. 살고 싶은데 약 먹고 죽으라고 하니 교회를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그렇게 극한적인 말을 들으려고 나옵니까?

제가 극단이라고요? 주님은 더 극단이에요. 나하고 비교도 안돼요. 저하고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주님은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해요. 주님 생각해 보세요. 죽은 인간을 죽은 인간으로 다루는데 왜 그리 말이 많냐, 그 말입니다. 죽은 인간이. 비 오면 비 온다. 좌빨 들어서서 나라가 망했다. 왜 그리 말이 많아요?

좌빨인지 우빨인지, 뭐 어떤 치과를 가든지, 어느 이빨인지 관계없어요. 왜 신경을 씁니까? 공동묘지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누가 법무부장관이 되든지 그 죽은자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덜 망해서 그런 거예요. 아직 우리 자신이 어디서 문제가 되는지, 뭐가 문제인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기다려주세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기화시킵니다. “너희 조상 잘못 만났다. 악마와 한패되어서 너도 똑같은 질병, 바이러스를 물려받았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새사람 되었으면 마음대로, 넉넉하게 주님의 묫자리 될 수 있도록 ‘주님은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나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하는 주님의 묫자리, 주님이 움직이고 우리는 그냥 묫자리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반대로 생각했고, 거꾸로 생각했고, 잘난 맛에 살아갔고 ‘주여 이것만큼은 건드리지 마옵소서.’라는 위선자로 살아갔고, 어느 세월가지,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될지 주여, 차라리 우리가 이미 망했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주님의 정당성이고 십자가 증거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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