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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1 12:38:58 조회 : 9378         
   온전한 몸 19081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온전한 몸(에베소서 4: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nCUAIkqvcA, Hit:48
 이근호 19-08-11 13:33 
온전한 사람

2019년 8월 11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13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을 거리를 우리의 내부에서 끄집어 내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외부의 것의 가치를 전적으로 인정할 때가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부정, 부인하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외부의 작품이 바로 ‘충만’입니다. 충만의 끝을 제대로 말씀하시는 대목이 에베소서 1:23에 나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는 예수님의 몸 외에는 충만이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자체 충만으로서 이 그리스도 몸의 충만을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그동안 인간들이 자체 충만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을 가리고 왔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생각이 모두 자기 자신을 똑바로 챙기는데 집중되어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받는 모든 교육과 양육의 방향이, “너 자신 하나 잘 건사해라”입니다. 달리 말해서 “너만 행복하면 그만이다”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증거’로 나아갑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다고 했는데 세상은 온통 자기 증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충만 말고 다른 충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다른 충만’은 늘 미완성입니다. 여기서 근심과 걱정이 생깁니다. 근심과 걱정은 ‘찾아드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 생길까요? 그것은 본인에게 근심과 걱정할 할 자격과 권한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곧 나의 나다움을 수립하는데 있어 수월치 않고 원할치 않으니 걱정과 근심을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9:17에 보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만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담을 적절한 새로운 부대로 주십니다. 새로운 포도주의 진가는 부대가 공백이고 비워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공허하게 하십니다. 공허한 자에게는 근심이나 걱정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공허함에서 나오는 겁니다. 매일같이 제공되는 새로운 기쁨이란 과거와 단절된 채 주어집니다. 어제의 기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새로움도 없어집니다. 오늘 다시금 자신이 공허해지고 자기가 부인될 때에 비로소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느낍니다.

그러나 악마는 인간은 그냥 두지 않습니다. 악마는 다른 충만으로 인간을 몰아세웁니다. 시아야 5:14에 보면,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홀로 있고 싶어서 끊임없이 걱정과 근심과 미흡함에 시달립니다. 독립자라고 우겨도 독립자 아니고 자율을 외쳐도 자율자가 아닙니다. 악마는 자꾸만 인간은 개체라고 부추깁니다. ‘네 자신으로 절대자’라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악마의 술책에 인간이 철저하게 말려들어간 겁니다.

인간은 개체가 아닙니다. 도리어 악마의 사주를 받고 그리스도 몸과 대결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 나오는 하늘의 무지개를 봅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원리를 무지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눈에 보이는 무지개를 가까이 가서 분석해려는 순간, 무지개는 그 현장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시 멀리서 보면 보입니다.

사람이 뭔가 분석하려는 것은, 나라는 개별자가 믿을 만한 것으로 재정립하려는 시도입니다. 무지개의 구성요소가 물방일 것을 누구나 압니다. 하나님께서 물방울들을 모아 무지개라는 형상을 조성하신 겁니다. 무지개 안에서 물방울이 자신이 물방울인 것을 자랑하기 위해 무지개에 속했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는 지상에서 특별한 구체적인 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가 드린 정결한 짐승의 피입니다. 이는 곧 추상적인 하늘의 뜻이 지상에 구체적인 나타날 때, 지상의 구체성과 대결구조를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 때에, 애굽 가정에도 맏이가 있었고, 히브리인 가정에도 맏이가 있었지만 하룻 밤 지나고 운명이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그 구체성이 히브리인들의 맏이를 살려낸 겁니다. 물론 이럴 때 ‘살아난 히브리인 맏이’는 독자적인 구체성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개념이 되고 이미지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1을 봅시다. “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어떻게 신랑은 하나인데 신부가 열 명이나 되는 겁니까? 신부들은 각자 생각하는 그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신랑의 가치를 드러내는 개념들이요 이미지들인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몸의 충만성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절대적 개체로서 살고 있는 이 인간들이 그리스도 몸의 온전함을 가리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온전함을 따로 챙기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변화를 다 수용할 만이 인간의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변화는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지평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어떤 불량 청소년은 전국을 돌며 금은방을 털어서 몇 천만을 훔쳐서는 그것은 유흥비로 탕진했습니다. 그 청소년의 세계 범주는 기껏 유흥업소 정도입니다. 애국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국가라는 범주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충만은 ‘국가 충만’으로 끝이 아닙니다. ‘충만 위의 충만’입니다.

모든 만물을 다 아우르는 충만입니다. 성도는 이를 위해 이동 중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죄성이 튜브를 통해서 유감없이 이 세상에서 쏟아내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발산합니다. 곧 자신의 잘남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몸’의 현존을 알리는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가치에 미련두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9-08-13 18:40 
36강-엡 4장 13절(온전한 사람)1908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을 이렇게 할 때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도의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현실 속에서 일을 이렇게 실시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일 벌여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지 우리가 일벌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여기에 믿는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믿는다는 말은, “제가 계획한 것 아닙니다. 제가 일 벌이지 않았어요.”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믿는다는 이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남이 했는데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런 경우가 생겨버리면 이것은 그분이 벌인 일 앞에 우리의 존재가치는 따로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되겠지요.

내가 나를 안 믿으니까. 내가 벌인 일을 내가 안 믿으니까, 그분이 하신 일을 믿으니까 그 순간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포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부인’이라 해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자기부인적인 매치가 되면서 ‘십자가 믿는다.’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하지도 않은 일, 주님이 벌여놓은 일을 내가 믿는다고 했을 때 그것이 믿음인데 그 믿음의 반대가 뭐냐? 믿음의 반대는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복 주세요.” 하여튼 교회에서 복 이야기가 나오거든 이단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복 나오면 무조건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복음은 복을 깨거든요. 그걸 거부한다고요.

복 달라는 것은 ‘나는 자기부인 할 맘이 전혀 없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나는 자기포기하거나 나는 양보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나는 내 일에 대해서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복을 주세요. 내가 잘되게.” 이것은 무조건 이단이에요. 기독교든 천주교든 무조건 이단입니다. 오늘 본문대로 이야기하면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는다든지, 왜 우리가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충만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13절에 보면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는데 인간은 자력으로, 자기가 노력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충만하게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충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렇게 봐서는 잘 모르겠지요? 사도가 하는 일이 늘 그래요.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일방적인 것 같아요. 일방적으로 툭툭 던지면서 “세상은 이렇게 된다. 믿든지 말든지.” 굉장히 무책임하고 우리에게 어떤 단어나 낱말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충만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 에베소서의 한 곳을 볼 건데요. 봐도 기대하지 마세요. 봐도 무슨 말인지를 모를 거예요. 에베소서 1장 22, 23절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여러분이 이 성경구절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냥 휙 넘어갔을 거예요. 뭐 백번 본다거나 원어분석해서 될 문제도 아니거든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건 또 무슨 트릭입니까? 말장난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알아듣도록 좀 이야기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이 구절 교과서에 안 실립니다. 수능에 이거 안 나옵니다. 당최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이게 믿으라는 말인지 믿지 말라는 말이지를 모르겠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이 말을 제 나름대로 정말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걱정근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걱정 근심하지 말라. 걱정과 근심을 하지 말아야 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인간한테는 걱정근심 할 권리나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핑계를 대냐 하면, “하나님, 걱정근심을 안하고 싶지요. 안하고 싶은데 꼭 걱정근심 되는 일이 생기니 안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나와요. 핑계를 그렇게 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충만한데서 충만’이기 때문에 네가 걱정근심 한다는 것은 그 충만한 것을 가려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모르지만 봅시다. 억지로라도 봅시다. 따라오세요. 교회는 그의 몸이지요. 그러면 몸이 내 몸 말고 딴 몸 따로 있잖아요. 친절도 이런 친절이 없습니다. 지금. 내 몸 말고 딴 몸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몸을 누가 가리느냐? 내 몸이 가려버리는 거예요.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내 몸 위주로 살아온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몸이 (뒤통수를 옆으로 밀면서) “좀 비켜줄래?” 하고 너를 좀 치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몸이 누굴 가린다는 생각을 우리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해서 걱정과 근심을 혼자 다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이고, 우짜노, 우짜노! 수출규제 우짜노! 반도체산업 망하면 안 되는데 이거 우짜노.”

근심걱정은 혼자 다하고 있어요. “좀 비켜줄래?” 좀 치워달라는 거예요. 우린 안 치웁니다. 치워도 또 있어요. 교회 나올 때는 좀 치운 것 같은데 유리문만 열고 나가면 도로 다시 가려집니다. 걱정근심이 팔자 같아요. “걱정근심을 왜 합니까?” 하면 천 가지 만 가지 핑계를 다 댑니다. “이러니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막 댑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이 충만인데 우리는 나의 충만이에요. 그런데 나의 충만은, 이사야에 보면 그게 어디서 나오는지가 소개되어 있어요. 왜 자꾸 내가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려고 하는지 그 이유, 원인이 있어요. 이사야 5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우리의 발바닥은 악마와 단짝이 되어서 악마의 소굴에 딛고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악마의 심성과 우리 심성이 동일하게 되어서 그 때부터 악마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보이잖아요. 우리는 악마의 대행자입니다. 우리가 악마의 대행자로서 존재하는데 악마는 우리에게 욕망을 크게 함으로서 악마가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충만을 가려버려라.’ 이것이 악마의 숨겨진 작전이고 전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니에요. 애들이나 어른이나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뭔가 입을 벌려서 나오는 음부, 악마의 소굴에서 나오는 그 욕망이 나에게 계속 유입이 돼요. 끊임없이 유입이 됩니다. 그러면 ‘나는 한 열 평짜리 아파트만 있어도 더는 소원이 없다.’ 이렇게 하다가 한 5년 살다보면 ‘그래도 한 30평은 살아야 인간같이 살지.’ 이렇게 하다가 ‘내 동창생은 이번에 50평짜리 아파트를 샀다는데 나도 주택부금 슬슬 넣어볼까?’ 계속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음부에서 나오는 욕망이 지금 이 수준을 유지하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네가 중요해. 네가 중요하다고. 쳐다 봐. 네가 제일 중요한 거야.’ 그래서 부모고 자식이고 간에 내가 중요한 거예요. 아내고 남편이고 간에 내가 중요한 거예요. 좀 여유 있으면 내 가정이 중요한 거예요. 좀 더 여유 있으면 내 나라가 중요한 거예요.

내 몸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악마가 배후에서 시키는 대로, 우리 입은 그냥 우리 입이 아니고 악마가 심어준 욕망이 마구 튀어나오는 출입구역할밖에는 안 해요. 그것도 끝도 없어요. 이사야 5장 14절에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이사야 당시의 유대인들은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호사스럽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충만에 대해서는 이미 벌써 충만했어요. 이미 충만했는데 우리가 왜 걱정근심을 하느냐 하면, 뒤에 있는 충만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서 그래요. 우리 뒤에 있는 충만을. 그러면, 우리가 충만의 충만을 믿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경품복권에 보면 바탕에 새겨진 액수가 은색이나 금색으로 가려져 있잖아요. 그 옆에 “동전으로 긁으세요.”라고 되어 있지요.

동전으로 긁어본다고요. 긁어보면 대부분은 꽝이에요. 다시 한 번 긁어보면 5만원이 나올 수도 있지요. 하나님의 이미 충만함이 배후에 있어요. 있는데 우리자신의 몸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자꾸 충만의 충만을 가리거든요. 걱정근심으로.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하느냐? 그걸 동전으로 긁듯이 긁어버리는 겁니다.

우리를 소멸시키고 제거하고 삭제시켜 버리는 거예요. delite, 없애버리는 겁니다. 없앤다는 말은 뭐냐? 우리 몸을 안 없앤다면, ‘우리가 열심히 기도할 테니 하나님이 우리의 걱정근심거리를 좀 없애 달라.’는 식으로 우리 몸을 건사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걱정근심이 나왔다는 것은 그런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걱정근심을 한다는 자체가 지금 네 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하게 해주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허하게 만듭니다. 공백이지요. 공허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공허한 존재가 될 때에 그게 무슨 법칙이냐? 새로움이 공허한데서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아무것도 없을 때 새 창조가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얻는 기쁨이라는 것은, 어제의 내가 없어졌음을 인식할 때 오늘이 오늘이기 때문에 비로소 새로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겁니다. 어제의 욕망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새로운 기쁨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맨 날 도 닦는 거지요. 도 닦고, 연구하고, 탐구하고, 성경공부하고, 그런 겁니다.

성경공부하고 도 닦는 이것은 뭐냐? 자기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제발 개선하려고 하지 마세요. 영어로 부탁할게요. please. 제발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고 하지 마세요. 인간은 개선되지 않습니다. 개선되었다는 그것이 화근이에요. 점점 더 충만을 가리고 괜찮은 자기로 복 받았다고 우기는데 그러면 그것으로 욕망이 스톱됩니까?

천만의 말씀. 스톱되는 것이 아니고 더 마귀한테 농락당하는 인생, 평생을 다해도 얼추 되었다 싶지만 걱정근심은 계속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왜? 내가 나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니까 마귀는 좋~죠! ‘아이고 능력 있네. 새사람 되었대. 술 끊고 담배도 끊고. 그러면 이것도 한 번 해볼래? 저것도 해볼래? 선교사도 해 보지. 목사도 해보지 왜. 기도 발 되는데 서너 시간 기도 해보지. 이웃집 전도도 해보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더 압박을 주지요. 왜? 내가 온전해야 되니까.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되어야 구원받는다 하니까, 에베소서 4장 13절에 나와 있으니까. 네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장성한 분량까지 이루어야 되니까, 온전해야 되니까. “목사님 더 가르쳐 주세요. 그래서 그것을 내 것 만들어서 열심히, 열심히 장성한 분량까지 되어서 주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2천년이나 마귀가 교회를 속여 온 거예요.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속여 온 겁니다. 무려 2천년동안이나. 2천년도 더 된다. 무려 2천 하고 19년 동안이나. 속여 온 거예요. 내가 내 몸을 위해서 산다는 그 자체가 충만을 가리는 것인데, 우리는 가리는 것도 모르고 자기가 잘나면 주께서 나를 구원해줄 줄 알고, 그것이 하나님의 장성한 분량이 되는 줄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은 믿는 게 아니고 자기 믿는 거예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온전한 것을 가리는 것이 뭐냐? 그것은 주님의 증인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증인되는 것이 온전함을 가리는 거예요. 비온전함입니다. ‘나 이정도로 애썼다. 이 정도 수준에 올라가기 까지 내가 교회 20년 다녔다.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래서 이 정도 되었다.’ 이런 것.

자기 온전함을 증언하는 이것은 악령의 짓이에요. 어떤 사람이 담을 쌓는데 벽돌이 모자라더라는 말이지요. 벽돌이 모자라니까 이미 쌓아놓은 밑의 벽돌을 빼내서 위로 쌓는 거예요. 이것은 바보짓이지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바보거든요. 사람이 자기 온전함을 위해서 정보를 교환해봤자 내 몸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내 몸은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를 다 수용할 수 없는 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몸에 다 수용이 됩니까? 더 설명할 수 있어요? 해명할 수 있어요? 모르지요. 그러면 내 몸은 포기해야 될 몸이지요. 온전함에서 내 몸을 포기를 해줘야 돼요.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 우간다에서 일어나는 일, 이집트에서 일어나는 일, 내가 거기에 관여해야 됩니까? 모르잖아요.

일찌감치 왜 포기할 줄 몰라요? 자기가 공허하다는 것을. 새 창조는 공허함에서 오는데. 나를 놔버렸을 때 비로소 새로운 기쁨이 오는 겁니다. 오늘 대구 날씨가 34도. 덥지요. 그런데 작년 이 맘 때 대구 날씨가 39도였습니다. 그 때도 더웠어요. 39도일 때 ‘야, 세상에, 이것은 백년 만에 처음이다. 34도쯤이라도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요.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그 때 그 때 달라요. 따라서 온전함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우겨도 그것은 주님 앞에 안 통합니다. 자기핑계밖에 안돼요. 인간에게 온전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엄마부대’라는 것이 뉴스에 나와요. 주 옥순씨가 대표로 있는 엄마부대라는 것이 있어요. 엄마부대가 민간단체인데 주장하는 것이 뭐냐? 문재인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해서 아베 수상한테 사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일본은 서른다섯 번이나 사과를 했는데 사과도 제대로 안 받고 버팅기다 이런 사달이 났잖아.” 그러니까 이제라도 거기에 대해서 사과를 하라는 거예요. “내 딸이 위안부라도 나는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한국이 현재 잘못되었다. 빨리 박 근혜 대통령 풀어주고 문재인은 하야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데모를 하는 거예요.

문재인 대통령보고 사과하라고 할 때에 엄마부대 대표인 주 옥순 그 사람이 자기 몸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고의 범주를 생각해 보세요. 어디까지냐 하면, 국가까지가 끝이에요.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하는 만물의 충만이 아니에요. 그래도 주 옥순씨는 국가라도 생각하지. 우리는 뭐예요? 도대체 우리의 관심의 끝은 어디까지입니까? 그게 충만이에요?

10대 5명이 금은방을 털었다. 2천만 원어치 털었어요. 온 동네 금은방 돌면서. 금은방 털어서 그 돈 가지고 뭐 했나 보니 유흥업소에서 유흥비로 다 날렸다는 거예요. 그게 기껏 생각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충만입니까? 만물의 충만이에요? 왜 자신의 몸을 포기할 줄 모릅니까? 성경 앞에서.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요. 내가 벌여놓은 그 일을 믿는 것은 성경에서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행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벌이지도 않은 일이에요. 내가 밥상을 안 차렸어요. 내가 차리지도 않은 밥상, 남이 차려준 밥상을 내가 먹는 겁니다. 이게 은혜를 먹는 거예요.

믿음, 단순한 거예요. 고맙다고 하면서 먹으면 걱정근심이 날라 가버립니다. 내 몸이 공허하게 되면 내 몸에서 나온 목적도 공허하고 날라 가버려야지요. 되지도 않는 목적을 왜 자꾸 만드는 겁니까? 그 스케줄을. 내가 공허한데 내 목적을 왜 세우는 거예요? 무슨 충만을 노립니까? 여기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의 충만은 오직 그의 몸밖에 없습니다. 끝. 이게 바로 에베소서 1장 23절의 뜻이에요. “그리스도 몸 그 밖에는 충만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믿지 마세요. 그리스도 몸만 믿으세요.”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주께서 그 일을 벌여놨다는 거예요. 그 일을 벌려놨다면, “성경은 진리를 말하는데 그 진리가 왜 우리에게 인식이 안 됩니까?”

내가 방해하거든요. 내 나름대로의 충만을 노리다 보니까 쓸데없는 걱정근심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죽으면 그만인데 안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죽을 권리도 없고 안 죽을 권한도 없어요. 일체 우리는 걱정근심 할 권한도 권리도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걸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성경 어느 대목에서 그걸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지요?

성경 어느 대목에서 이야기하는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내용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난해합니다. 난해한 이유가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가 하나의 고체가 되어 있어요. 고체라는 말이 어려우면 바꾸겠습니다. 개체가 되어 있어요. 또는 개별자, 개체입니다.

그런데 이 개체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잘 납득이 안 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빛이라 하는 것은 광학적으로 따져볼 때, 빛은 모든 물체의 내부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개체의 내부요소가 아니에요.

이 찬송가의 색인 녹색이잖아요. 녹색인 이유가 뭐냐 하면, 빛이 와서 녹색만 반사하고 나머지 색은 이 재질이 흡수해서 녹색만 반사되는 겁니다. 이 말은, 외부에서 온다는 뜻이에요. 빛은 물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 있어요. 외부에 있다면 이 녹색의 책은 뭐냐? 외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 겁니다. 빛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러나 찬송가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개별자고 주체에요. 내 몸의 온전함을 위해서,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봐서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 거예요. 이미지라는 말을 제가 사용했지만 이것도 무척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적절한 단어가 없어요, 지금. 전부다 내 복 받으려고 성경 보기 때문에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더구나 말이 안 되는 대목을 이야기해 드릴까요? 마태복음 25장 1절에 보면 천국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신랑을 맞으러 가는데 처녀가 한 명이 아니고 열 명이에요. 무슨 이런 결혼식이 다 있습니까?

신랑 하나에 신부가 열 명이에요. 열 명의 처녀는 전부가 하나의 신랑을 보여주는 이미지에요. 설명해도 모르면 그냥 갈 수밖에 없어요. 창세기 9장 12, 13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띄웠습니다. 무지개를 봅시다. 무지개가 저기 있다. 그러면 차를 타고 시속 80킬로미터로 무지개가 떠 있는 그 지점으로 갑니다. 가면 거기에 무지개가 있습니까? 무지개가 안보이지요. 내가 보는 빛의 시선의 각도가 틀려버리면 무지개는 현장에 없어요. 실망하고 다시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려서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오면 거기서 다시 무지개가 보입니다.

자, 무지개에 접근해서 무지개를 손에 잡으려고 하는 순간 무지개는 없어요. 왜냐? 물방울이기에. 빛의 반사입니다. 무지개 자체가 이미지에요. 자연자체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이미지의 종합입니다. 우리도 그중의 일부이고. 사진을 보면 윤곽이 드러나 있잖아요. 그 사진을 돋보기를 들이대서 봅니다. 더 가까이 봅니다. 또 더 가까이 갑니다. 그러면 거기에 사진의 윤곽이 있는가요? 없어요. 그것은 하나의 점으로 된 픽셀이에요.

점으로 되어 있다고요. 점으로 되어 있으니까 멀리서 보면 그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형상이 나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런 거예요. 무지개 같은 거예요. 이래도 성경이 안 어렵습니까? 아니 사실은 성경이 쉬워요. 나를 공허한 물방울로 여긴다면, 나를 공허한 것으로 여긴다면. 나라는 개체를 뭘 로 바꾸는가? 나라는 개체를 개체가 아니고 개념으로 바꾸는 거예요.

더 어렵게 되어 버렸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무지개를 둔 이것은 추상화된 거거든요. 그렇게 추상화 된 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노아언약 다음에 이루어집니다. 그 때 그 추상화된 원리가 하늘에 펼쳐지고, 그 원리의 추상화된 이미지가 구체화되면서 노아에게 임했고, 노아는 제사를 드렸고, 피를 내었고, 하늘에 있는 무지개의 충만함이 지상에서는 피라는 구체적인 어떤 인물의 ‘피 흘림’으로 구체화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그 보편적인 원리가 그 구체화가 이 지상에 떨어지게 되는데 이 지상의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내가 나에게 구체화된 존재입니다. 내구체화와 하나님의 구체화가 대결구조로 나서는 겁니다. 그게 뭐냐? 유월절이에요, 유월절. 유월절에 애굽 사람들은 잠을 잘 때 맏이와 같이 잠을 잤어요. 히브리인들도 그 날 밤에 잠을 잘 때 맏이하고 같이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체화가 뭐냐? 어린양의 피에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 문지방에 발라놓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애굽에 있는 모든 맏아들, 모든 개체는 다 죽었어요. 그리고 그 반면 히브리의 맏아들은 살았습니다. 개체로 살아난 것이 아니에요. 개념으로 살아난 겁니다. 어린양의 피흘림이 우리를 천국 보낸다는 그 원리를 보여주는 이미지화된 아들이 이스라엘의 맏아들이에요.

어디에도 개체는 없습니다. 어디에도 고체는 인정하지 않아요. 개체는 누가 주장하느냐? 악마가 주장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옛날에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가면, 요새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학교에 가면 시간표가 있지요. 월요일, 국영수체음, 이런 식으로 다섯 과목. 화요일에도 또 다섯 과목쯤 있지요.

그 모든 과목마다 가르치는 것이 뭐냐 하면, 개체를 가르치는 거예요, 개체. 네가 커서 훌륭한 민주시민이 되어라. 민주시민으로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인간, 그 개체를 키우기 위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모든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을 받습니다. 전부 다 개체를 만드는 거예요.

개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그 이야기에요. 그 개체들이 오늘 교회 나오셨습니다. 본인이 공허한 줄 몰라요.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몰라요. 나 복 받기 위해서 교회 나왔어요. 2천년동안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다 그랬어요. 그래놓고 에베소서 4장 13절을 봤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을 딱 보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딱 나네. 해놓고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어, 장성한 분량이라면 지금보다 내가 더 우수해야 되고 더 개선되어야 되고 훌륭한 사람 되어야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더 본받아야 되고 그래야 되겠네. 빛의 자녀가 되어야 되고 선한 일을 해야 되고 착한 일을 해야 되고 그래야 되겠네. 그렇다면 지금 내 할 일이 생겼네. 믿는 것으로만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않으면 나는 꽥, 이네. 지옥 가네.’

그 다음부터 찾아오는 것은 걱정근심인 거예요. 걱정근심. “목사님,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내가 더 높은 수준에 이르러서 주님 형상을 본받게 되어서 나중에 천국에 쉽게 골인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느 정도로 인격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 가도 상급을 많이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라고 교인들이, 교인이라는 말도 하기 싫다, 개체들이 개별자들이 목사보고 요구하고, 교회보고 그걸 요구하는 거예요.

그 개체중 하나가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었고. 그래서 둘이 서로 죽이 맞아요. 목사가 교인이나 장로나 집사나 죽이 맞는다고요. 누가누가 잘났나. 그거 시합하러 교회 나온 거예요. 대결구조입니다. 그게 바로 악마와 한통속, 짝짜꿍이 된 거예요. 성경은 일거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인간은 보편적이다. 네가 개체를 주장하려면 저 사람보다 더 낫기를 원하거든요.

내가 더 훌륭하다는 것은 옆의 다른 사람과 비교할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보다 낫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아주 막돼먹은 교도소에 갔다고 합시다. 내가 집에서는 맨 날 엄마에게 꾸중 듣지만 교도소에 막상 가보니 얼추 내가 훌륭한 사람 되어버린 거예요. 벌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어요. 모든 수준이. 모든 수준이 그쪽과 너무 차이 나니까. ‘아, 나 이거 교육 너무 잘 받아서 큰일 났다.’ 교육 너무 잘 받았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평소에 가정교육 받기를, “네 입에서 어떤 경우라도 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 술 담배는 기본이고, TV도 하루에 한 시간씩만 보고, 게임은 테트리스 같은 건전한 것 두 개정도 하고 나머지는 일체 못한다.” 세 살부터 19세까지 철저하게 가정에서 감시당하면서 교육을 받은 그 청소년이 대학에 갔다 합시다.

대학에서 MT를 간다든지 오리엔테이션 가서 다른 친구들이 소주병 늘어놓고 ‘원 샷’하고 있으면 ‘무슨 이런 세계가 다 있나?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할 거예요. 6개월도 안되어서 자기도 그런 짓 하겠지만. 내가 말하는 충만함, 온전함, 그것은 내 가정에서 그런 식으로 나를 하나의 개체, 개별자라고 여기고 주입식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딴에 굉장히 윤리 도덕적인데,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우샤우샤, 하는데 바로 그게 남들보다 더 악마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절에 안가고 교회 50년 다닌 내가 더 악마적으로 변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도를 닦고, 자기에게 열중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기가 자기에게 지킬만한 것이 된다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지킬만한 것이 없어야 되는데 왜 자꾸 내가 지킬만한 것으로 변모하고 있어요. 주님의 온전함을 더욱더 철저하게 가리는 그러한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에서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보시고 누구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해 보세요. 마태복음 9장 17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 말씀은 포도주만 주께서 새롭게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포도주만 새롭게 주시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걸맞게 새 부대도 주께서 따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방식은, 악마의 방식은 뭐냐? ‘새 포도주, 예수님의 복음 좋지.’ 하지만 그걸 담는 부대는 나라는 이 부대를 그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 내 몸, 내가 평소에 해왔던 버릇이 그 버릇이에요.

내 몸만 지키면, 나만 지키면 그만이거든요. 나만 지키면 된다는 그 개체적 사고방식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담으려고 하는 거예요. 내 무덤에다 내 십자가 꽂는다고 내가 부활 됩니까? 죽고 나서 거기에 십자가 꽂는다고. 십자가는 개체용이 아닙니다. 이미지용이지요. 십자가는 개체용이 아니고 개념용이에요.

우리 자신을 우리 자체적으로 지킬 것이 없습니다. 지키지 마세요. 우리 자신을. 날마다 주께서 주신 모든 것들이, 주님의 새로움이 주는 이미지화를 하라고 새롭게 오늘 하루 주어진 모든 것들이에요. 그게 충만한데서 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앉아버리면 뒤에 충만한 것이 보이잖아요. 내가 너무 곧추서서 살기 때문에 주님이 가려진다는 말이지요.

내가 앉아버리면 주님 몸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그리스도 몸의 일부가 될 때는,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문질러버리면 사라질 몸이지만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우리는 이미지로서 충만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천국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국생활은 뭐냐 하면, 걱정근심이 없는 것. 말 잘 들어야 돼요. 천국 생활이라는 것은 걱정근심거리가 안 생기는 것이 아니고 걱정근심이 없는 것.

걱정근심은 내가 개체가 될 때 비로소 새로 발생 되는 것이 걱정 근심이에요. 내가 공허함을 잊어버릴 때 모든 것이 걱정근심이에요. 내가 지킬만한, 나를 지켜야 된다는 어떤 콘크리트 같은 존재가 될 때 걱정근심은 나와 세차게 충돌하고 나는 아파요. 아파도 너무 아파요. 왜? 내가 단단한 고체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액체가 되고 하나의 허무한, 공허한 기체가 된다면 걱정근심거리가 안돼요. 주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사건들이지요. 차가 박았다. 견적 한 5백만 원 나왔다. 주께서 주신 사건이지요. ‘주께서 박게 하셨구나. 이것도 일종의 무지개? 왜 박게 했을까?’ 걱정근심 하는가, 시험하기 위해서 박게 하신 거지요 뭐.

네가 ‘나는 복음만 생각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안합니다.’ 주께서 ‘그런가 한 번 차 박아놓고 보자.’ 차 박아놓고 보니까 “아이고 내 차!” 이렇게 되지요. 쑤셔 보니까 지식이지요, 지식. 그냥 지식으로 버틴 거예요. 도 닦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이 개체를 버리는가, 마지막으로 그 설명을 안 하면 큰일 나겠지요. 어떻게 하면 이 개체를 버리는가? 개별자를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 12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10절에 봐도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우리 몸은 지금 그리스도 몸으로 이동 중입니다. 이동 중이라는 말은, 새로운 환경이 와서 우리의 이삿짐을 싣고 거기로 데려간다는 뜻이에요. 새로운 환경. 새로운 환경은 뭐냐? 내가 공허해질 때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이 새로운 환경이에요. 내가 공해질 때만. 쉽게 해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관에 누웠다고 생각했을 그 때 비로소 내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 보이는 것들은 주께서 새롭게 우리에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게 자녀가 되었든, 세상이 되든지, 집이 되든지, 모든 것이. 그렇게 이동 중인 것 같으면 우리가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어연구 할 필요가 없고요. 성경공부해서 뭐 되겠다는 것은 이동을 안 하겠다는 뜻이에요. 도를 닦겠다는 거예요. 이 자리에서 내가 얼마나 위대한, 더 멋있는 존재로 탈바꿈을 하겠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에 지금 그 사람은 꿈쩍도 안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하루를 살면 매일같이 이동하는 중입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우리 각자 인간은 나름대로의 언어가 있고 인간은 자기언어 만들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언어 만들기 참 쉽지요?” 하면서 언어 만들기를 보여드렸지요? 각자의 언어만들기. 거기서 동사의 시제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다들 기억하고 계시지요? 한 주일 밖에 안 지났으니까.

거기 보면, 시제에 대해서 완료와 미완료를 이야기했어요. 녹취에 보면 다 나옵니다. 완료라 하는 것은 과거를 말하는데 과거란 하나의 점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미완료란 변동하는 추이를 보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어시제입니다. 완료는 아무리 대단해도 이미 하나의 점으로, 소실점으로 끝난 거예요.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옮겨지고 있습니다. 이동하고 있어요.

이동할 때 우리는 뭘 로 이동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키를 낮추듯이, 몸을 낮추듯이, 그래야 뒤에 계신 분이 보이니까, 동전을 긁어내듯이, 우리를 낮추는 거예요. 낮추는 방법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주제넘게 걱정근심 할 잽이 못되는 것, 그런 권리가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튜브를 가지고 짜는 거예요. 우리가 튜브라면 케첩 튜브 짜면 빨간색 나오지요. 마요네즈 튜브 짜면 하얀색 나오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하루하루 살게 하면서 계속 밟아서 치약 짜듯이 짜게 되면 거기서 죄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네가 이런 죄를 짓고도 네가 걱정근심 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 너는 걱정근심도 오감타(분에 넘친다). 봐라. 이 튜브의 벌건 이 죄밖에 안 나왔잖아.”

죄가 나오는 것은 천국으로 이동 중이고, 짜는데 하얀 마요네즈, 착한 것만 나와. 그것은 지금 지옥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오늘 한 번 눌러서 짜보세요. 내 착함이 나오는지. 헌금했습니다, 오늘 교회 참석했습니다, 오늘 음식당번 내가 했습니다, 오늘 청소 했습니다, 오늘 두 명이나 전도했습니다……. 내 튜브를 발가지고 밟아보세요. 애 이만큼 잘 키웠습니다…….

착함이 나온다면 그 튜브 그거 케첩 아닙니다. 마요네즈 튜브에요. 지옥 갈 마요네즈입니다. 적어도 죄와 더불어서 피가 나와야 돼요. 벌건 게 나와야지요. 어린양의 이미지가 되어야 되고 어린양의 벌건 피의 개념이 되어야 돼요. 실체 없는, 그냥 개념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주께서 쥐어짜게 하기에 우리한테는 계획이라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계획 백날 짜도 소용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기생충이라는 그 유명한 영화, 그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무계획으로 사는 송 강호에게 아들이 무슨 제안을 하는데 그 때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너는 계획이라는 것을 다 세우는구나. 희한한 애가 다 있네. 그런 식으로.

계획이 없으면 걱정근심도 없잖아요. 주께서 우리 계획 무산시켜 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그래서 늘 감사합시다. 걱정근심 할 자격조차 안 되는 인간인 것을 다시 한 번 파악하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합시다.

감사하고 돌아서봐야 또 걱정근심이 오더라도 또 주께서는 케첩이니까, 주여, 이것도 나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이미 잘되고 있다는 것, 우리는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심히 충만한 것의 한 요소고, 충만한 것에 이미 개입되어 있고, 천국생활은 가서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벌써 시작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는 계속해서 튜브 안에서 나오듯이 벌건 피와 더불어서 죄만 나오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뭐하고 살았습니까?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남에게 안 뒤지려고, 남한테 이기려고, 쓸데없는 게임이나 하고 퍼즐이나 맞추면서 ‘나 이렇게 훌륭하게 살았노라.’고 자랑 질하려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게 악마와 단짝이며,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짓인 것을 이제는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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