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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12:42:46 조회 : 3511         
   몸 19070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몸(에베소서 4: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rFTQxg9kPp4, Hit:21
 이근호 19-07-07 13:31 
한 몸

2019년 7월 7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4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이 하나’다 라는 말은 대단히 비현실적으로 보일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숱한 사람들, 즉 숱한 몸들이 거리를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몸들이 여럿이다’라는 표현이 옳아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 숱한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한 몸’에 속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예수님 몸 중심으로 모든 말씀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뿐인 예수님의 몸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코 기존의 인간들의 몸이 구원되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제일 귀하게 여깁니다. 각자의 몸은 각자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일생은 자신의 몸을 지켜온 내력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모든 관심사가 자기 몸 관리에 쏠리게 됩니다. 세상에 숱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과의 만남이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상관없이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웃이란 내 몸을 위해 존재하는 ‘순간적 인물’에 불과합니다.

나를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그런 조직체와 공동체를 찾게 됩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인정해주는 자를 찾고, 나를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주는 그런 조직에 머물러 일원이 되고자 합니다. 나를 품어줄 수 있는 조직체를 우리는 원하고 있습니다. 가정이든 국가든 모든 조직이 이런 식으로 움직여갑니다.

그런데 그 국가라는 조직이 곧 ‘짐승’이라면? 악마의 몸통이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즉 인간은 자기 몸을 기꺼이 악마의 단일 몸에 소속되어 그 몸의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9:15에 보면,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인간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없애라고 통치자에게 요구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신들의 본성에 부합되는 통치지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 곧 짐승을 섬기는 몸으로 그들은 태어난 겁니다. 악마 외에는 달리 섬길 자가 없습니다. 악마의 지체가 머리되는 악마를 섬기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악마처럼 불멸을 원합니다. 그대로 절에 다니는 사람은 절에다 자기 이름을 넣고 제사지내주기를 원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자신을 천국의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달리 언급하십니다. ‘그리스도 몸 중심’에서 우리 자신의 이름은 지워한다고 말입니다.

이미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씻음은 받은 자들입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 나 구원받았다!”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남은 인생을, “도대체 내 몸에서 어떤 죄들이 계속 나오기에 주님께서 십자가로 해결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을 멀쩡하다고 우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네 대신 내가 죽었다”고 과격하게 나오시니 도대체 우리 몸에 어떤 것들이 주님으로 하여금 과격한 조치가 취해졌는지를 아는 자가 진정 자신의 구원됨을 아는 자입니다. 인간이 악마를 닮아서, 얼마나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하고,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보는지 그것을 확인하고 절실히 느끼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각자 남들을 이용하려 하지만 실은 남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여겨도 갈수록 점점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모든 인간들은 자기 영역에다 테이프를 붙이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밀폐된 나만의 세계 내부에서 부풀어 오르는 알지 못하는 죽음이 주는 공포심은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우리의 몸 자체가 죽음으로 내려앉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죽음이 싫어 내부적으로 격렬하게 반발합니다. 어떻게든지 죽음의 요소와 징후를 지워보려고 애씁니다. 이대로 내 몸을 포기 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에게 미리 잘 보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 14-16을 보게 되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신과 거래해서 자기에게 좋게 하기 위한 최종적인 방식을 주님께서 난입해서 엎어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도록 천국길을 막았지만 인간들의 악마적 본성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조직을 운용하면서 그 조직체가 영원하기를 원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악마의 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몸으로 건너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으로 만든 몸’입니다. ‘죽음 안에서 형성된 몸’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들어설 수 없는 영역입니다. 주님의 방식은 ‘둘이 하나’기 되는 방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아담을 위해 외로운 아담을 만들어 곁에 두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두 사람은 여전히 둘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남자가 되어야 하고 이는 곧 여자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구조입니다. 남자, 여자는 분명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두 존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의 연결성’ 뿐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한계를 상대로 인하여 들켜서 스스로 자인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나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여가서는 안 됨을 아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 된 성도의 모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같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백 명이 되든, 천 명이 되든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19-23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늘 지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7-08 17:16 
31강-엡 4장 4절(몸)1907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4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성경에서 하나의 몸을 제시합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하나의 몸을 향하여 예언하고, 그리고 성취했다고 이야기하고 거기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우리들은 어디에 몰입하느냐 하면, 나 자신, 내 몸에다가 모든 성경을 다 때려 붓습니다. 이상적인 나, 진정한 나, 초월적인 나, 내 구원을 위해서 모든 성경을 나에게 소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과 늘 동떨어지게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왜 성경말씀을 자기이상적인 나, 진정한 나, 참된 나, 나의 구원, 나의 초월, 나의 영생, 왜 거기에 모든 것을 집중하느냐 하면, 내 몸이 있는 여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걸 실제 있는 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라,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 거기가 현실이고 그게 실제에요. 우리는 내 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현실에다 예수님이 그냥 다녀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몸을 중심으로 해서 가시적인 세상이 펼쳐지고 있고 보는 거예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최종적인 결론이 뭐냐? 이래서 나는 구원받았잖아, 라는 쪽으로 자기한테 귀환되고 귀속됩니다. 이것은 방향이 잘못되었어요. 그리스도 몸은 살아계시는구나. 눈에 안보이지만 그리스도 몸은 이렇게 엄연하게 진정한 중심으로 살아계시는구나. 그쪽으로 정리가 되어야 돼요. 내 쪽으로 정리가 되면 안 되고.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힘들다, 어렵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나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분명히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그 하나, 이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 몸의 하나 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몸에 소속이 되었다면 더 이상 따로 내 몸을 챙길 이유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함이다.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것을 다 아시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죄를 용서를 했으면, 거기에 대해서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어떻게 느껴지고, 주님 몸 중심이라면 어떻게 느껴지는가, 그 차이를 제가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내 중심으로 하게 되면, ‘나는 이제 죄 없다. 나는 이제 죄 없이 천국 간다. 나 기분 좋다.’ 이걸로 느껴진다면 이것은 내 중심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이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치워주고 씻어줬다면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많은 죄가 들어 있고 담겨 있는가, 주님께서 치워줬다면 주께서 하신 일에 비춰볼 때 주께서 치워주지 않으면 나는 그냥 죄인이라는 뜻인데, 그만큼 내가 죄가 많다는 뜻인데 이제 슬슬 내 속에서 나오는 죄가 어느 정도인지 슬슬 한 번 펼쳐 봐?’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르지요?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병자를 고쳤다 이 말이지요.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쳤잖아요. 소경을 보게 하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소경이라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귀신과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씻어줬다면 이제는 우리 자신이 마귀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눈을 떴으면서도 소경인 행세를 하고 있는 그 자체를 앞으로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거예요.

주님이 병자를 고쳤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머리가 아프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환자로 살면 되는 거예요. ‘주님은 남의 병은 고쳐주고 왜 내 병은 안 고쳐주나.’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중심이라니까요. 죄를 씻어줌으로서 이미 너는 용서받았고, 이미 너는 구원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중심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걸 다시 내 중심의 구원으로 가져오면 안 됩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것이 성경에는 없어요.

성경에는 아예 나의 구원은 없는데 왜 교회마다, 너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합니까? 성경에 있는 구원은 예수님 구원이에요. 그리스도 몸의 구원이지 나의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절에 가는 사람들은 자기의 불멸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인간은 죽는다. 그러면 내가 사멸하기 싫다. 영원히 불멸하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 이름을 절에 얹으면 돼요. 절에 귀의해서 자기이름을 얹으면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교회 가는 사람은 뭐냐? ‘내가 죽으면 안 되는데, 내가 오래 살아야 되는데, 나는 영원해야 되는데, 나의 불멸성을 보장받아야 되는데 어떻게 하나? 옳지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천당 가면 되는구나.’ 천국 가는 것으로 자기불멸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교회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또 절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는데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우리가 그리스도 몸이 될 때는 내 이름이 지워져요. 내 이름이 지워진다고요. 나라는 그 자체가 지워져버려요. 내가 나를 계속 갖고 있으면 말썽의 소지가 되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죽지만 내 이름이 지워지고 죽어야지요.

내 이름이 지워지는 경우는 주의 이름이 대체할 때 지워져요. 그러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이것은 주님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눈물로 호소한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정말 그 심정이 제 심정이에요. 눈물로 호소하고 싶어요. 성경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전부 다 기적에서 시작해서 기적으로 말미암아 기적으로 끝나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기적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그건 기적이지요. 그것 못지않게 기적이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거예요. 그런데 지나 개나 다 믿으니까 이것은 분명히 거짓된 믿음이에요.

왜 예수 믿는 것이 기적이냐 하면, 내 이름이 지워지는 효과로서 믿음이 발생되었기 때문에 진짜 믿는다면 내가 나에 대해서 걱정할 대상자체가 내 몸에서 없어진 거거든요. 내가 지옥 갈지 천국 갈지, 어떻게 될지, 그것은 내게 속한 문제기 때문에 내게 속한 문제는 이미 주님께서 죄 씻어주면서 나 자신을 제거한 거예요. 이미 그걸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내 몸을 제거한 거예요.

지금 문제가, 내 몸이 내 몸이라고 우기니까, 내 몸이 있고 네 몸이 있으니까 이게 몸이 하나가 아니고 둘 되는 겁니다. 둘, 셋, 넷……, 무한의 n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중국이 인구는 14억, 인도의 인구는 13억, 한국의 인구는 5천만, 베트남은 1억, 하나가 아니고 숫자가 이렇게 많다는 말이지요.

많다는 말은 각자 자기 고유의 이름을 붙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 내 이름을 위해서, 붙들고 있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니까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이 현실과 비추어볼 때 이것은 완전히 망상이고 비현실적이에요. 현실이 아닌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어디 있습니까? 보여주세요.” 하는데 그리스도 몸은 죽음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살았다고 우기는 우리한테는 눈에 안 보이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을 느끼려면 내가 죽은 자로서 느껴져야 느껴지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게 되면 또 속으로 피식, 하고 웃는 사람이 절로 상상이 됩니다. 푸흡! 그래서 기적과 기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말을 제가 미리 해 드린 겁니다, 성경말씀은.

인간이 수를 써서 얻을 수 있는 그런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아요. 산자는 성경말씀의 세계에 뛰어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되고 죽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죽는 이유가 죄로 인하여 죽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것은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모습, 주께서 “너의 역할은 죽는 것이다. 왜? 죄 때문에.”

죄와 죽음과 결부해서 우리 몸을 통해서 죄와 죽음을 마음껏 발산하면 그게 우리 역할이에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우리의 겸손도 주님은 꼴 보기 싫어요. 겸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죽어가면서 겸손 떤다고 더 살려주는 것도 아니고요. 살아 있는 것은 은혜 맞아요. 하지만 살고자 하는 것은 나쁜 짓이에요.

살려고 한다면 목적이 있고, 살고자 할 때는 어떤 덩어리가 있는데, 그 덩어리는 나 외에는 다른 덩어리는 없잖아요. 전부 나 때문에 내가 살잖아요. 그래가지고 몸이 하나요? 그러면 우리는 사도바울을 가르쳐야 돼요. “몸이 하나같은 소리하고 있네. 세계인구가 80억이 다 되어 가는데.” 이런 식으로.

75억이 되고 어쩌고. 그러면 우리는 “몸이 하나가 아니다. 사도바울아, 정신 차려라. 몸은 하나가 아니고 수억, 수십억이야. 네 시대는 한 5억쯤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대는 80억 가까이 돼.” 우리는 사도바울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몸이 하나”라는 말이지요. 네 몸은 몸도 아닌 거예요.

썩고 주저앉는 몸은 몸으로 치지 않습니다. 불멸성을 보장할 때 몸이라 하는 거예요. 이 세상 몸은 딱 두 개입니다. 하나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나머지 하나의 몸은 아담의 몸이고 딱 두 개에요. 그런데 아담의 몸의 특징은 뭐냐? 무너진다는 겁니다. 얼마,전에 강남의 5층 건물 철거하다가 무너졌지요. 그처럼 우리의 몸은 지금 중력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우리의 골조라 할 수 있는 이 척추도 무너지고, 나이가 들면 모조리 다 흙이 되기 위해서 주저앉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착하게 산다고 해서 되돌릴 수 없는 겁니다. 지금 주저앉고 있으면서도 나는 착하다, 해 봐야 이것은 진짜 망상가지요. 주저앉고 있으면서 나는 착하다? 착하다고 키가 더 큽니까? 착하다고 키가 더 젊어집니까? 시간이 역으로 돌아갑니까? 안돌아가잖아요. 무너지는 것은 그냥 무너지면서 주저앉는 거예요.

아담의 몸을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몸으로 격하시켰어요. 아담의 몸이 아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배후에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악마의 정신을 가지고 아담의 몸, 인간의 몸이 구성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지만 사람들은 여럿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외롭지 않기 위해서 자기 몸과 그리고 공동체를 찾아요.

공동체라고 할 수 있고 또 다른 말로 조직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소속감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성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이것은 우리가 평소부터 원했던 것’이라고 해서 이웃을 찾는데, 이웃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잠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이웃이에요. 순간존재가 이웃입니다. 계속 며칠 가는 이웃은 없어요.

늘 오래 붙어 있는 이웃은 아닙니다. 그 이웃이 언젠가는 웬수로, 원수도 아니고 웬수로 변해요. 괜히 안다고 해가지고 집에 들인 것이 실수였습니다. 낯선 사람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날 현대인은 아는 사람이 점점 더 낯선 사람이 되어 갑니다. 안다고 했는데 갈수록 더 몰라요. 나는 충분히 안다고 여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부부관계 아닙니까?

이만하면 내가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데 점점 몰라요. 사람이 어떤 조직, 공동체, 교회도 공동체니까, 가족도 공동체니까,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것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서로 인정받고, 서로 사랑받고, 서로 쓸모 있다고 하고, 서로 필요로 할 때만 나의 이웃으로, 한정적으로, 그것도 순간적으로, 임시적으로 내가 이웃으로 용납하는 거예요.

내가 용납해주는 거예요, 내가. 놀라운 사실은 남도 똑같이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웃은 내 옆의 순간적인 존재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건 놀라운 사실이에요, 남도 나를 일시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몰라요. 그 사실을 우리가 자꾸 놓쳐버려요.

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친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친구가 어디 있어요, 친구가. 순간적인 존재지요. 나에게 필요한. 다시 말해서 사람의 가정이나 조직이라 하는 것은요, 인정받을 때 그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겁니다.

회사를 어떻게 꾸려나가는가? 사장이 사원들을 꾸려나가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경영학에서 인간관리라 하는데 인간관리, 인격관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너는 우리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조직에서 계속 인정해 주게 되면 그 사람은 조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회사를 꾸리든 가정을 꾸리든, 모든 조직에서는 그것 때문에 남는 거예요.

이 조직이 나를 인정해준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 좀 더 있을게. 딱 그거에요.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인 것을 내 주변 타인이, 주변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준다면, 그런 조건이라면 나는 당신을 내 친구, 이웃으로서 정을 나눌 용의가 되어 있다. 그게 조직이고 그게 골목식당, 그게 장사하는 것이고, 전부 다입니다.

그 중 하나가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나를 인정하지 않을 때, 곧 나를 사람취급 동안 붙어 있고 안 그러면 그 자리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간 사람의 나쁜 점은 뭐냐 하면, 이 모임을 교회라고 여겼던 그것이 착각이었습니다.

자,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성경은 뭐냐? 그리스도 몸 중심이에요. 그리스도 몸 중심이라면 사람들은 교회에서 뭘 찾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모습, 흔적을 찾기를 원해요. 요새는 아니지만 옛날 교회 같으면 여자전도사가 이 강대상은 청소하러 올라오지 못합니다. 왜? 여자기 때문에. 여자는 이 강대상에 올라오지를 못해요.

아랫 강단을 만드는 이유가, 아랫 강단에는 전도사나 여자전도사가 거기까지 올라오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는 남자만 올라가는 거예요. 남자는 꼭 기린 같아요. 위에서 혼자 키가 커서 내려다보는 위치가 남자여야 해요. 요새 나오는 미국 드라마 이라는 것이 있어요. 장로교를 모델로 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서 장로교교리대로 하는 드라마가 있어요. 캐나다 작가가 쓴 <시녀들>이 원작인데 거기에서 여자라 하는 것은 아기 낳는 가치 외에는 하등 가치가 없어요.

성경에서는 여자는 아래에 있고 남자는 위에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몸이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몸의 흔적을 내가 눈으로 찾아보겠다는 거예요. 성당도 마찬가지지만 교회는 모든 것을 거룩한 공간과 속된 공간을 자꾸 구분지어서, 그걸 온 몸으로 느끼면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함께 있다는 티를 내려고 하는 거예요. 성만찬, 떡 하나 주고 “이것은 내 몸이다.” 포도주를 주면서 “내 피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

자, 그리스도의 몸은 뭐냐 하면 그 모든 것을 체크하는 겁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을 체크하고 그것을 전부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내가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 없애버릴 때 그러면 거기에 뭐가 남느냐 하는 겁니다. 체크하고 소멸하면서 뭐가 없어지느냐? 그리스도의 몸을 내가 체험을 해서, 그것 가지고 내가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확정짓고자 하는 내 몸 자체도 같이 소멸되는 거예요. 같이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중심으로 박혀 있는 한 절대로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한테 포착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강대상에 올라오면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이 강대상이 몸이에요? 이 마이크가? 여기 어떤 신비로움, 성스러움이 같이 끼어있습니까? 교회가 부흥회 같은 것을 열면요, 어떤 신성한 기운 같은 것을 찾고자 해요. 그것도 분위기를 조장하고요, 부흥사가.

뜨겁습니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고요. 난로 피웠으니 뜨겁지요. 몸이 하나요, 라고 되어 있는데, 분명히 성경에서는 몸이 하나에요. 그러나 내 몸 있고 남 있으면 벌써 둘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과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몸이 하나이기 위해서는 내 몸은 내 몸이 아님을 계속 부정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야 되는데 그 증거는 우리 몸을 통해서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적이에요. 그러면 지금 있는 이 몸들 80억은 어떻게 하느냐? 그 몸들이 하나로 뭉쳐져요. 딱 하나로 뭉쳐진다고요. 자기의 불멸성을 위해서 인간은 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국가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따라서 그 몸에 대해서 성경은 단호히 이렇게 합니다. 그 국가라는 것이 뭐냐? 짐승의 몸. 다니엘에 나옵니다. 짐승의 몸이라고.

아, 대한민국이요? 짐승의 몸이에요. 안 믿지요. 우리는 못 믿습니다. 내 구원에 정신 팔려 있기에 못 믿는 거예요. 내 몸을 어떻게 천당 보낼까,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이상은 성경에 전혀 접근이 안 되는 상태에요. 성경, 다니엘 천 번을 읽고, 요한계시록을 만 번을 읽어도 내 몸을 구원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전혀 해석이 안 된 거예요.

어떻게 이 몸이 그냥 몸이 아니고 이것은 악마의 몸이라는 것을 지적해 낼 수 있어야 돼요. 그 몸은 죄인 된 몸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것은 성령이 와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그냥 몸이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고, 당신은 참 필요한 존재라고 인정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조직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우리 본성상 나를 부정 못하는 몸을 지니고 살아 있다니까요. 만약에 누구라도 나를 건드리면 누구라도 반발합니다. 왜? 그게 악마의 본성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그 증거를 많이 보여줬어요. “바라바를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할 때에 요한복음 19장 15절에서 그 많은 군중들이 뭐라고 외쳤습니까?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두 번이나 강조했어요.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세 번째입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짐승의 왕 외에는 우리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짐승의 대통령 외에 우리는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차기대통령, 차기대통령, 차기짐승, 차기짐승, 우리는 차기짐승만 원해요. 왜? 나는 내 중심이니까. 나 살기 편하면 그만이니까. 전혀 성경과 동떨어져서 살아가는 겁니다. 교회에다 부흥사 동원해서, 목돈 내게 해서 멋있게 고딕건물 세워놓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복음이고 뭐고 관심도 없어요.

이 예배당, 이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전, 이 성전을 누가 키우고, 누가 돈 많이 내고, 누가 교인수를 채워서 부흥시킬 것이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차기짐승, 그 다음 당회장, 그 다음 당회장, 짐승만 계속 원하는 거예요. 그저 내가 목돈 낸 이 교회 예배당, 크게만 해준다면 어떤 짐승이라도 우리는 관여하지 않겠다. 이게 교인들이 집단적인 요구사항입니다.

만약인데 제가 이 교회 나가고 난 뒤에 우리 교인들이 차기당회장을 원한다면, 그래서 후보감 신문에 내서 후보가 와서 “제가 기도원에서 이 교회 맡으려고 40일 금식했습니다. 응답받았습니다. 2년 내에 3백 명 채우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오고, 그 다음에 또 이상한 사람이 와가지고 “이런 개 같은 사람이……” 한다면 둘 중 누구를 뽑겠어요?

누굴 뽑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채워준다면 기꺼이 내가 당신 말에 복종하고 동의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를, 우리 몸이 있는 이상은 그것을 계속 하소연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자신이 짐승의 몸이에요. 짐승의 몸은 두 개가 아닙니다. 달랑 하나입니다. 어떻게 80억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방금 제가 증명해 드렸지 않습니까? 인간은 모두 다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요한복음 2장 13-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주님께서는 교회를 엎어버린 거예요, 교회를. 하나님의 신성한 장소를 엎어버린 거예요. 신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너 스스로를 신성화하는 이상은 어떤 신성도 악마가 있는 공간입니다. 나 자신을, 무너져야 할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이상은. 나 자신을 신성하게 여기게 되면 마귀의 굴레에서 우리가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인간하고 안 싸웁니다. 마귀하고 싸웠어요. 인간의 모든 생각을 통일시키는 그 악마의 생각, 그게 교회가 되었든 절이 되었든 관계가 없어요. 국가가 되었든 그게 뭐든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자기소속감을 얻고 거기서 불멸성과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누가 나를 인정해준다면, 누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기꺼이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가짜 예수, 가짜 하나님, 가짜 여호와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합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진정으로 죄 씻음 받았다면 주께서 나를 긁어냈잖아요. 긁어내보니 죄가 아닙니까? 그러면 내 몸이 도대체 어떤 기능, 어떤 본질이기에 끄집어내면 죄에요. 모든 것이 죄에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과 같이 죄를 보여주면 되잖아요. 그리고 무너지면 되잖아요. 죽으면 되잖아요. 내 이름을 지우면 되잖아요. 뭐가 그리 어렵습니까?

자꾸 주춤주춤 뒤로 물러가고요. 내부적으로 완전히 차단하고. 나중에는, ‘이웃이고 뭐고 가라. 나는 나대로 살련다.’ 나대로 살려고 아예 랩을 가지고 자기 집을 완전히 포장을 해버려요. 어디 택배 보냅니까? 완전히 그렇게 포장을 해도 내부에서 올라오는 공포심은 어떻게 할 건데요? 내부에서 올라오는 폭탄은 어떻게 할 거예요?

주님께서, 악마의 몸을 성령이 와서 그리스도 몸으로 이동시킵니다. 이제 인간의 몸은 그 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바꾸세요. 악마의 몸, 악마의 몸의 일부입니다. 악마의 몸을, 또는 점잖게 말해서 아담의 몸, 악마의 몸을 이제는 그리스도 몸으로 바꿉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인간을, 우리 자신의 이름을 없애는 방법으로 바꾸는 거예요.

죽과 리조또의 차이점이 뭐냐? 죽은 삶은 쌀로 만드는 것이 죽이고, 리조또는 생쌀로 끓여서 만든답니다. 리조또는 제가 먹어 본 적은 없는데요. 맞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그냥 내질러 보는데. 맞다고 치고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죽으로 만들거든요. 죽으로 만들면 1이 해체돼요. 내 몸이 해체된다고요. 내 몸이 해체되어 죽이 되면서, 너는 저 타인과 저 이웃과 다를 바가 없는 한통속이라는 것을 일단 알려줍니다.

한통속임을 알려주는 멋진 방법이 뭐냐? 구약에 애굽과 이스라엘을 대비시키는 거예요.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이 망했는데 그 망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세를 똑같이 해요. “시키는 대로 살겠습니다.” 그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망한 거예요. 주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본질을 알라고 그 본질을 드러내시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택함 받아서 구원받았다고 말씀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은 시키는 대로 되는 일이 아니에요. 말씀은 그리스도만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말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근원적으로 우리 안에서 짐승의 몸이 반응을 하기 때문에, 자꾸 자기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요한복음 2장에서 유대인들이 성전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기도하니까 그것을 엎어버린 거예요. 쉽게 말해서 그렇습니다. 촌에 있는 집을 보면,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쪽에 큰방이 있고, 작은 방이 있고 그렇잖아요.

가운데 있는 마루에 보면 사진이 걸려 있어요. 가족사진 있고, 가족사진 틀 귀퉁이에 돌 사진 찍은 것도 있고, 다른 여러 사진들을 끼워놓았다는 말이지요. 거기 보면 중간에 뭐가 있느냐? 돌아가신 아버지 초상화를 걸어놨어요.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의 사진을 걸어놓고 제사 때마다 쓰는 거예요.

지금 우리 마음에 누구 사진 걸어놓았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초상화를 박살내는 겁니다. 그 플라스틱 액자를 박살냅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예수나 여호와, 삼위일체 사진을 걸어놓았다면 그것은 죽은 자의 초상화에요. 죽은 자 만져보세요. 플라스틱이에요. 그냥 유리판이라고요. 지금 살아 있는 예수님은 그런 식의 유리판, 거울 아닙니다.

살아계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어요. 우리 몸 안에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가짜였으면 그런 식으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우리가 감정적으로 혹할 수 있는 것을 매개체로 설정해 놓았겠어요? 애가 젖 먹겠다고 운다. 그러면 애가 우는 것도 그리스도 몸 안에서 애가 울고, 거기에 젖을 주는 내 몸도 주께서 그리스도 몸 안에서 내가 젖을 준 거예요. 애를 울게 해서.

옛날에 우리가 마귀의 하나의 몸 안에서 80억의 쪼가리로 해서 살았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하나의 몸 안에서 우리는 그 몸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도저히 모르겠지요? 죽과 리조또의 차이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요한복음 1장 22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보고 “너는 누구냐?” 묻는 거예요. 너 누구냐고 할 때는 질문 자체가, 나는 누군데 너는 누구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 몸 따로 네 몸 따로 있는데 내 몸 따로 말고 그 바깥에서 설치는 네 몸은 누구냐고, 정체를 밝히라고 그렇게 질문한 겁니다.

“네가 엘리야냐” “나는 아니라”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 “그것도 아니라” “그러면 너는 누구냐?” 그렇게 물은 거예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나는 소리다. 나는 소리에요. 보이스에요. 나는 말씀이다.

질문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까? “나는 여호와의 소리인데 너는 누구의 소리냐?” 그렇게 질문하지 않았어요. “나는 바리새인이고 나는 지도자인데 세례요한아, 너는 뭐야? 선지자야? 아니라고? 그러면 뭐야? 너는 엘리야냐? 아니라고? 그러면 너의 정체를 밝혀라. 너는 누구냐?” 나는 어떤 몸의 소리지요. 오시는 분의 소리지요.

여러분, 어릴 때 소독차가 와서 모기약 치는 것 봤지요. 모기약 칠 때……, 모기약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기생충> 영화의 그 장면이 생각납니다. 모기약 칠 때 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소리부터 먼저 오잖아요. 윙~ 하고. 애들 다 뛰어나가서 안개 속에서 춤춘다고 막 뛰어다니고 하잖아요. 모기약 속에 파묻혀 가지고. 현실의 고민을 잊기 위해서 모기약 속에서 헤매지 않습니까? 현실이 고통을 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의 소속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리로만 살아야 된다 그 말이지요. 나의 불멸성이 아닙니다. 우리 몸의 불멸성이지요. 좀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책, 분홍빛 책, 아주 예쁜 책이에요.

그 책 192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외롭다면 똑같은 아담을 만들면 되지 왜 여자를 만들었을까? 똑같은 인간을 만들면 되지 않았겠는가? 똑같은 인간은 하나가 아니고 두 놈이 되어버려요. 따라서 똑같은 인간이 안 되려면 남자 아담을 뭘 로 별로 변화시켜야 되느냐 하면 남자로 바꿔야 돼요. 아담은 사람이지 남자가 아니에요. 아담을 남자로 바꾸려면 아담을 남자로 할 수 있는, 즉 남자 자체로서는 1이 될 수 없는, 뭐가 다른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여자를 만들어서 ‘남자 + 여자’가 돼야 이게 한 몸이 되는 겁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거예요. 몸이라는 것은 여기 덩치가 하나 있고 또 다른 덩치가 있다고 해서 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게 되면 이게 80억이 되든, 50억이 되든, 둘이 되든지, 셋이 되든지, 열둘이 되든지 그게 전부 다 하나로 쳐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중요한 것, 남은 것은 뭐냐? 사랑이 남았지요. <완전한 사랑> 116페이지에 보면, 이렇게 하니 갑자기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요. 사랑이란 자기내면의 한계를 자인하는 것이다. 사랑이 오게 되면 “나는 못났습니다. 부족합니다. 나는 자체로서는 구원을 요구할 입장, 처지가 못 됩니다. 나는 나 하나의 불멸성, 완전성을 요구할 수 있는 잽도 못됩니다.”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남자가 있을 때 여자는 여자로서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 앞에서 아는 겁니다. 남자도 마찬가지고. 여자가 등장했을 때 여자와 사랑을 맺음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거예요. 사랑이라는 말이 나와서 한 마디 더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에스더에 보면 참 이상한 대목이 나와요.

아하수에로 왕이 그 당시 바사, 페르사 왕인데요. 지금의 이란 왕인데 그 나라 법에 어떤 법이 있느냐 하면, 왕비라 할지라도 남자가 먼저 부르지 아니하면 절대로 오면 안 된다. 왕비라도 죽여 버린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 법을 정한 이유가 있어요. 왕에게는 하도 여자가 많으니까 남자의 몸의 기력이 쇠하게 되면 나라를 제대로 통치 할 수가 없어요.

그걸 조절하기 위해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 할지, 또는 왕의 욕정에 의해서 필요할 때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서 궁전에 들이고 그 다음부터는 대기상태에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왕도 하나의 몸이니까, 허약해지면 안 되니까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대로 인간의 조직에 있어서 인간의 조직은 각자의 몸을 살리기 위해서 국가라는 몸을 만들고, 그 조직에서는 협의와 의논으로서 조직체가 유지되는 겁니다. 합의와 토론, 이런 것을 통해서 하는 거지요.

그런데 에스더에서 유명한 것은 뭐냐 하면, 사촌오빠가, 사실은 양 아버지지요, 그 사촌오빠가 하는 말이 “지금 유대인들이 다 죽게 되었다. 그래서 네가 가서 왕에게 이야기해라. 하만이라는 인간이 유대인 다 죽이고 있다고 이야기를 좀 해라.” 하니까 에스더가 난처해하면서 “법에 의하면 왕이 먼저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 가면 왕비라 할지라도 가면 죽습니다.”

그럴 때 모르드개가 윽박지르지요. “네가 왕궁에 있다고 안 죽을지 아느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데 이왕 죽을 것 네 할 일 해라.” 그 때 에스더가 하는 말이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한 거예요. 에스더가 한 말은 “현재 인간의 몸, 악마의 몸, 짐승의 몸에서는 법이 중요하기 때문에 법대로 하면 우리는 죽는다.” 거기에 대해서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냐? 우리가 죽는 것도 법대로 죽었다. 법대로 죽는데 법대로 좀 살아도 소용없다. 나가라.”

그래서 벌벌 떨면서 나갔지요. 나갔는데 그 때 왕이 “그 바깥에 누구냐?” “접니다.” “누군데?” “에스더입니다.” 그 순간이 성경에서 희한해요. 보는 순간 왕이 자기 왕비에게 반해버려요. 그 아름다움에. 정신이 나가버립니다. 뭐라고 헛소리를 하느냐 하면, “나라의 반을 달라고 해도 줄게.”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한 아름다움인지 모르지만 남자가 혼이 나가버렸어요.

그건 누구 뜻이겠습니까? 주님의 뜻이지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평소에 우리의 모습은, 교회 유리문만 밀고 나가면 평소 우리의 모습은 다시 짐승의 몸 됩니다. ‘오늘 2시에 누구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막 바빠요. 되게 바빠요. 누굴 만나는 것이냐 하면,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준다는 조건하에 그 사람 놓치면 아깝다는 뜻이에요.

모든 만남은 나를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내가 쓸모 있고 내가 가치 있음을 증명해줄만한 사람들이에요. 짐승의 몸은 80억이 되든 90억이 되든 전부 다 뭐냐? 짐승의 존재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내가 절대자고, 나는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고 뭐고 내가 더 중요해.’ 내 몸이 나를 말해줘요. 내가 옳다 그르다, 그것은 나중의문제고요.

일단 내 몸이, 천상천하에 나보다 더 중요한 몸은 없다고 내 몸이 나에게 날마다 그 소리를 한다니까요. 말릴 수도 없어요. 내 몸이 그렇다는데 누가 말려요. 나도 내 맘대로 못하는데. 나도 나한테 주변인인데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예수 믿는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해버리면 한순간, ‘내가 하나님보다, 예수보다 더 귀해’라는 것을 하나의 소리로서 내가 느끼게 했다는 거예요.

왜냐? 평소에 우리는 나를 늘 감추고 살거든요. 감추고 사는데 성령께서, 평소의 모든 행동이, 나는 나만 챙긴다는 것, 주님이 왜 오셔야 되는지, 왜 그리스도 몸이어야 하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최고다’ 하는 식으로 살게 했다는 그 연결고리가 성령을 통해서 퍼뜩, 하고 느껴질 때 우리는 주님의 여자입니다. 주님은 나의 남자고.

그래서 이미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퍼뜩. 성령 받았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나를 책망하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거든요. 내가, 평소의 내 모습, 이게 바로 악마의 마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미 그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주님과 한 몸이에요.

뭐, 할 것 없어요. 지킬 것이 없다니까요. 지금 성주에서 데모를 하는지, 무슨 시위인지 플래카드를 붙인답니다. 서쪽으로 죽 가면 성주가 있어요. 여기서 한 40킬로쯤 됩니다. 뭘 로 데모를 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ktx역사를 세워 달라”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어요. 역사 세우니 뭐합니까? 철도가 없는데. 교회 세우니 뭐합니까? 성령이 없는데.

역사만 덜렁 있고 아무 연결고리가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 몸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과 내 몸의 연결고리, 성령이 더 중요한 거예요. 몸은, 그리스도 몸은 하나 뿐 입니다. 그리스도 신자가 몇 명이냐 관계없어요. 몸은 어떤 몸이라도 전부 다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ktx 역사와 역사 사이가 철로로 연결되어 있듯이 주님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 사랑이 뭐냐 하면, 이미 죄를 씻어준 거예요. 이게 주님의 몸이 하는 일이고 주께서 하고 싶은 일이, 내 피로 너희 죄를 씻어줬기 때문에 이제는 너의 할 일이 뭐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죄가 녹처럼……, 녹 같으면 벗겨내면 그만이지만 이것은 녹이 아니고 악마의 몸이니 늘 죄를 생산하거든요.

무슨 죄가 생산되었기에 주께서 이미 죄를 다 긁어내고 씻어주셨는가, 하는 겁니다. 그 죄가 뭐냐? 그 죄는 악마가 주님에게 대든 죄, 바리새인의 죄, 하나님을 나의 이웃으로 여겨서 하나님 덕분에 내가 영원히 불멸의 존재가 되겠다는 것. 주께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지만 그거 개무시하고 나는 영생나무, 나만은 천당 가야 되겠다, 누가 죽든 말든 나는 지옥에 안 가겠다, 하는 그 본심, 그 사고방식, 그게 바로 악마의 마음입니다.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잘살든, 못살든, 그건 문제 아니에요. 내가 앞으로 이렇게 살겠습니다. 미리 예단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단할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소리입니다. 주께서 어떤 소리를 지르도록 부딪치게 해요. 개별적인 나의 절대성과 주님의 십자가의 피가 늘 부딪히면서 그 사이에서 주님의 소리가, 주님을 증거 하는 소리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우리 성도의 모습은 마치 여인들의 머리카락 같아요. tv에 나오는 여자들 보게 되면 카메라 앞에서 가만있지를 않아요. 맨 날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하고 있어요. 고개를 흔들든지 손으로 만지든지 해서. 이미 정리는 잘 되어 있는데 어느새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고 있고. 아예 짧게 커트를 하든지 하지 길게 길러서 맨 날 그러고 있어요.

우리의 몸은 이미 구원받은 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몸인데 그놈의 치렁치렁한 악마의 머리카락이 계속 우리의 얼굴 앞으로 쏟아져서 가리니 맨 날 그걸 쓸어 넘기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잘난 것이 있었으면 우리보고 성경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는 것, 이것을 성경에서는 복음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복음! 이제부터는 그 복음으로 성경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만 보지 않고 복음만 들리지 않으면 다시 악마의 몸으로 변신되어서 세상을 내 중심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나에게 뭐 해줬느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에게 섭하게 하는지 대듭니다. 이 모습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내시는 주님, 십자가 피가 얼마나 고귀한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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