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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5 12:41:32 조회 : 720         
   무능자 19050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무능자(에베소서 3:4-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rkSuGlQiz0, Hit:76
 이근호 19-05-05 13:35 
무능자 

2019년 5월 5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3:4-6

(3: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전에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려주었답니다. 그게 뭐지요?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약속에 참예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칭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 진짜 하나님을 유일하게 안다는 그들로부터 참된 하나님께서 살해당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 오시기전까지 인간 세계에서 제대로 된 ‘하나님의 비밀’이 없었다 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품고 있는 의미를 알려면 ‘유대인들의 구원관’을 살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출애굽 당시의 애굽 상황에서 잘 드러납니다. 단지 히브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되는 혜택을 입었습니다. 사적인 노력들이 집대성되어 그들이 집단적으로 구원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의사보다 선행된 범주입니다.

이 범주가 바로 ‘혈통’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애굽인으로 부터 모진 수모를 당했던 겁니다.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격이나 인품 때문에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미 집단적인 대상으로 그 세계에서 분류된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맞추어서 모세를 보내십니다. ‘인품이 훌륭한 자들을 데려와라’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3:15에 보면, 하나님 자신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려 오셨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그래서 천사에 의한 폭격하듯이 애굽을 쑥대밭을 만드시는데 (10가지 재앙) 유독 히브리인들이 사는 동네와 그들에 대해서는 특혜를 베풀어 비켜갑니다. 이는 곧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품이 우선이 아니라 ‘소속’이 우선됨을 말하는 겁니다. 즉 현대인들은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나누면서 개인을 위한 공적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세계에서는 사적인 것은 처음부터 용납되지 못합니다. 구원은 ‘소속’ 여부로 결정나는 겁니다. 이처럼 히브리인이라는 이유로 말미암아 일방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공적 소속이 바로 ‘혈통’ 곧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했다는 사실입니다. 혈통이란 이미 태어난 개인적 입장에서 손쓸 수 없는 요건입니다.

이처럼 특정 누구의 자손이 된다는 단지 그 이유로 인하여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이 유대인의 구원관입니다. 이 집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이 구원되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혈통이라는 우선성을 제시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위반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보기에도 구약 자기네들 역사 속에서 변동사항이 빈번함을 압니다. 여기에서 대해서 유대인들을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구원손길에 대해서 자신들의 행함으로 제대로 협조가 되지 아니한 결과라고 여기는 겁니다.

구원했으면 구원에 합당한 행위를 보일 경우에는 구원이 실효성이 된다고 여겨야 구약 역사 속에서의 배반과 징벌을 무난히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그 유대인의 역사 전부를 예수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사건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할지라도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 본인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예선전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보다 자기네들이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결정적 결함이 발견되고 만겁니다. ‘혈통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따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적인 것의 무능성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미래와 자기 운명을 선택하는데 있어 자기 의사가 들어가야 한다고 여긴 겁니다.

사도가 전한 편지의 특징은, 사도는 일체 인간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의견을 내놓아봤자 그것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비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선택과 행함의 배경에는, 자신은 여전히 유능하다고 여기는 외침이 있습니다.

가짜의 특징은 자기 행함에 근거해서 주님과의 관계성을 수립하려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사적인 가치를 사수하려고 합니다. 즉 나로 인해 내가 구원받겠다는 고집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모르는 자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그리스도 비밀’은 무능하고 지옥간다고 할려진 그 이방인들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육적인 요소가 들통난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을 무능하지 않다고 여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무능한 이방인들을 동원시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곡해를 폭로하시게끔 하셨습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자꾸만 선택할 거리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선택을 하면서 인간은 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적인 것으로 본인이 살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무능성’입니다. ‘초월하지 못한 육의 한계성’입니다. 이 한계성을 뛰어넘게 하는 것은 새로운 소속의 초월성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무능성과 쓸모없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자가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즉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구원에 소속된 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다루시고 사용하시는 소품입니다. 소품은 자기 불행에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사적 고집을 피우지 않습니다. 죄지었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마저 ‘주님의 익숙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원래 인간은 구원될 자격없는 죄인들이요 주님을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옳은 선택이 나를 구원하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9-05-07 02:42 
24강-엡 3장 4-6절(무능자)1905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4-6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3:4-6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오늘 본문에 “이것을 읽으면”이라고 했는데 그 전에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서 이미 사도가 이야기를 해줬다는 겁니다. 이야기해준 그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사도바울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너희가 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안 그리스도의 비밀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듣게 되면 그 전에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느냐, 그게 다시 궁금해지거든요. 현찰 같은 것은 갖고 있으면 계속 그걸 갖고 있다는 것이 의식되는데 복음은 안다고 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현찰과 좀 달라요. 돌아서면 다 잊어요. ‘뭐였지?’ 그만큼 우리의 몸은 복음과 상관없는데 너무 길들여져 있고 우리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복음과 상관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가 거기서 배양된 겁니다.

뭔가 주사 맞듯이 주사의 효과처럼 잠시 찔러올 때는 느끼지만 그 주사약발이 떨어지게 되면 다시 복음 없는 생활로 일관되게 가는 겁니다. 사도가 뭘 이야기했느냐 하는 거예요. 사도가 이야기한 것을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다. 합체가 된다. 이거 이야기했습니다.

5절에 보면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후예가 된다,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사도바울이 하나님에게 받은 비밀이라고 우리한테 언질을 주시는데 그 당시 사람이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해서?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게 그렇게 중요한 내용일까?’ 중요한 내용인지 아닌지도 우리는 감 잡지를 못해요. 이게 뭐가 그리 중요하고 이게 하나님께서 꽁꽁 숨겨놓은 비밀이라는 말인가? 이게 무슨 비밀이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알면 천당 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 라고 이방인들이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이 비밀을 비밀답게 이해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사도는 내가 아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떤 뉘앙스를 우리에게 알려주느냐 하면, 내가 이 비밀을 앎으로서 나는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이고, 천국백성이라고 언급한다는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과연 구원받은자냐, 구원받지 않은자냐, 그 기준에 대해서 지금 내가 나에게 적용하는 동일한 기준을 너희가 너희 자신에게 적용시켜 봐라, 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누가 구원받았고, 누가 구원받지 못했느냐, 라는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들 하시는데 내가 나에게 정한 그 기준을 그대로 나는 여러분에게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고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이 상당히 궁금해 해요. 지금 구원받았으면 마지막도 형편이 필 것이다. 마지막에도 걱정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받았는지, 구원 안 받았는지 그 확실한 기준을 누가 나에게 알려줬으면, 통보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우리가 갖고 있지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미 언급을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비밀을 이미 너희들에게 알려줬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피 안에서,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그 이야기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5절에도 나오지만 2장 뒷부분에서 여러 번 나오거든요. 질문하는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과 답변이 어깃장이 나는 거예요. 잘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천당 가고 싶은 것이 목적인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나 천당 간다는 것이 주가 아니라 어떤 소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어느 쪽에 속했느냐를 지금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명칭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이 말은, 네가 궁금해 하는 “나 천당 갈 사람이에요, 지옥 갈 사람이에요? 내가 그거 궁금해서 미치겠어.”라는 그 질문자체가 하나님이 제시한 답변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너는 너 자신의 사적인 것에 치중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으로서는 탈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소속을 시켜서 집단으로 구원해줘요. 그러면 그 사실이 어디에 나오는가? 구약성경 유대인의 경전에 나오지요. 구약성경이 유대인의 경전이니까요. 성경에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예를 들어볼게요. 애굽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이 노예생활 할 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동일한 질문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 저 구원받았어요, 아니면 구원 안 받았어요?” 동일한 질문을 던질 때에 하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히브리인들에게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어요?” 이렇게 우리는 질문자체가 나부터 출발하거든요.

“나 구원 받았어요? 나 지옥 갈 거예요, 천당 갈 사람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하면 주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은 혜택을 입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결과로 히브리인들이 어린양을 잡으니까 그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애굽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거든요. 그 혜택이 애굽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어요.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소속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나부터 출발하니까 성경 해석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내 잘함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소속에 포함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덩달아서 합쳐져서 구원받는 거예요. 혜택을 입는 거예요. 은혜를 입는 겁니다. 개인구원이 아니고 단체구원이고 집단구원이죠.

여행갈 때 가이드 구한다. 가이드가 나 혼자의 가이드 일수도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가이드는 나 혼자의 가이드가 아니고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서른 명이고 그 집단을 위한 가이드가 되는 겁니다. 그 가이드로 오신 분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특정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인이라고 언급한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에요.

그 히브리인이 오늘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에게만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없는 민족, 유대민족을 일부러 만드시고 키워나가셨다. 그게 옳은 겁니다. 이게 신약에 와서는, 이 땅의 성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성도는 존재하지 않는데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성도를 만들어서 키워내고 있다. 그것과 똑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나만 성도가 아니거든요. 나만 성도가 아니고 성도들이 많을 거잖아요. 그 많은 성도들에게,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리를 못하는 자들의 집단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나의 실력, 나의 기도실력과 나의 헌신의 실력, 예배참석실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일체 못하게 만든다는 말이지요. 내 실력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을 용납을 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혜택이라는 것은 성과가 아니기 때문에. 내 노력의 성과로 주어지는 것이 혜택이 아니잖아요. 소속 때문에, 내가 원치 않는 소속, 지난 시간에 했듯이 그냥 던져진 것이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된 어떤 소속 때문에 그 소속의 이름으로 내가 구원받는 겁니다.

21세기 오늘날의 현대를 살면서 이게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이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기 때문에 자기가 놀게 되면 그만큼 소득이 적어요. 일한 그만큼 소득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노동한 만큼 소득을 얻는 입장에서 노력을 내가 해야 되는 거거든요. 교회도 내 교회, 가정도 내 가정, 전부 다 내가 노력해야 된다고요.

내가 노력해야 되는데 그 사람들이 교회 와서 뭘 요구하느냐 하면, “목사님, 내가 무슨 노력을 하면 천당 갑니까? 예수 믿어드릴까요? 삼위일체 외울까요? 내가 교회에 헌신할까요? 십일조 할까요? 헌금할까요?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질문자체가 벌써 잘못된 거예요. “소속으로 구원받습니다.” 하면 “그러면 이 교회 소속되면 됩니까?”

이 교회는 자기 교회잖아요. 소속에 자기라는 것을 붙이면 안돼요. 교회 소속되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유대인들은 교회 소속이 아닙니다. 자기가 손댈 수 없는, 이미 던져진 것,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 소속입니다. 그게 뭐냐? 혈통이라는 겁니다. 유대인의 혈통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찾아오신 하나님의 혜택을 입고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될 수가 있었습니다. 탈출이 가능했던 겁니다.

내가 내 운명에 대해서 손댈 수 없는 형편과 처지에서 혜택을 입은 거예요. 혈통이라는 이름으로. 빼도 박도 못합니다. 아버지가 광산 김씨라면 아들도 광산김씨에요. 빼도 박도 못해요. 아버지가 광산 김씨인데 나는 백옥자 여사의 백씨로 할래, 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혈통적으로 규정된 겁니다. 그리고 그 혈통은 우리가 이끌어가는 혈통이 아니에요.

인간이 단결해서, 지혜를 모아서, 어떤 제도와 법을 만들어서 억지로 꿰어 맞춰서 유지되는 혈통이 아니에요. 이 혈통이 없을 때부터 관여하신 하나님께서 그 혈통을 혈통대로 이끌어 가시면서 그 혈통은 구원되는 혈통이 되는 겁니다. 이 생각이 구약을 통해서 나타났고 이 생각이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일관성이라고 여겨서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원받는다고 작심한 겁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구원관이고 유대인의 구원관은 철저하게 배타적이에요.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철저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유대인의 철저함이 하나님의 비밀의 전부가 아니었고 끝이 아니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혈통만이 구원받는다. 이방인들은 꺼져라. 가라. 혈통도 아닌 것이 어딜 기웃거려. 우리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작품이야.”라고 여겼던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숨겨놓은 비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것 안다고 해서,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안다고 우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 원칙은 원칙대로 살리면서 유대혈통이 아닌 이방인들이 그 유대인에게 약속했던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그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비밀의 마감이라는 거예요. 비밀의 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당연히 거부하지요. 우째 그런 일이?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쪽에서, 뒤에 와서 처리를 못하거든요.

한번 결정된 혈통이 결정된 운명처럼 결정된 구원을 낳기 때문에, 천국을 낳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유대인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고 그것은 비밀의 마감이 아니라면 어떻게 혈통도 아닌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구원에 동참이 되고 포함이 되느냐?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라고 할 때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라고 하시면서 알려준 그 내용에 의하면 진정한 구원은 혈통을 초월해야 된다는 겁니다. 혈통을 넘어서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변경될 수 없는 확정된 혈통으로만 구원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걸 흉내 내고 모방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혈통적으로 고정되고 확정되었고 마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혈통이 전부가 아니고 그러한 마감재로 사용했던 혈통마저 그것이 깨어지고 그걸 넘어서는 요소가 유대인의 혈통 안에서 은밀하게 작동해 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유대인들이 몰랐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구원받는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다, 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충돌이에요. 둘 중 하나는 가짜지요. 둘 중 하나는 가짜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민족, 선택한 이스라엘민족을 따로 구원했다. 이게 준결승전입니다. 결승전은 그 유대인가운데서 ‘하나님이 혈통으로 구원했다, 라는 것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뛰어넘었을 때 이것이 결승전의 승자가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특정민족이 구원받는다. 예선전이지요. 특정민족이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특정민족이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었다. 육을 믿고 육을 의지하는 것은 결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그거예요. 뛰어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가 찾아옴으로서 그걸 앎으로 말미암아 육으로서 하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요.

육으로 하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간다는 말은 사적으로 자기구원을 관리하고 점검하고 절제하고 한번 준 구원을 자기 행함으로 붙들고 유지하려는 모든 획책, 모든 노력도 다 소용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선언을 해버립니다. 인간이 행함으로 뭘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 지킬 문서 자체가 찢어져 버렸다. 없어요.

혜택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혜택이지 그 혜택을 유지할 수 있게 섞어 넣을 수 있는 행함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배당을 짓는다든지 헌금을 한다든지 전도를 한다든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함, 착함, 경건, 이 모든 것도 전혀 자기구원에 소용없는 짓입니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에요. 사람은 행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사적인 관심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누가 했나?” “제가 했어요.” “누가 했지?” “내가 했어요.” 반드시 ‘나’ 결국 마지막에는 ‘나’가 뜨게 되어 있어요. “누가 키웠니? 이 엄마가, 내가 키웠어.” “네 인생 어떻게 살았나?” “내 인생이니 내가 노력했어.” 반드시 나를 떨어뜨리지를 못하고 있어요. 사적인 것. 그런데 주님이 하는 것은 공적입니다. 공적인 것에 사적인 것이 섞여 들어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것 때문에 혈통적으로 유대인을 구원한 겁니다. 손댈 수 없도록. 주님이 주신 구원에 인간이 뒤치다꺼리 못하도록, 추가적인 뒤치다꺼리를 못하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혈육을 초월한다는 그게 구약에서 무슨 의미냐? 그것은 출애굽기 3장에 보게 되면, 모세라는 분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되는데 만나면서 하나님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해요.

이야기 하면서, 내 종족 히브리인, 아까 말한 대로 소속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해준 히브리인이라는 그 소속을 위해서 내가 너를 애굽에 보내겠다, 라고 하면서 더 깊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면서 뭘 제시하느냐?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모세가 물었어요.

내가 또 귀신하고 이야기하고 마귀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나 않은지. 확실하게 진짜 하나님인지, 내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는지, 내가 착각하고 있는지, 내가 상상해서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여기고 착각하고 대화하고 있지 않는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아닙니까? 실제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신발 벗으라고 할 그 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말을 했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거기에 대해서 답변이 15절에 나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사람의 어떤 의견을 들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폭격하듯이 퍼붓는 하나님께서 자기만이 성취할 수 있는 계획을 갖고 그것을 이 땅에 펼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여러분이 늘 한 가지를 염두에 둬야 돼요. 사도바울의 특징은 사적인 의견을 듣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안 듣는다는 거예요. 일방적이에요.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그런 것도 없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다. 끝이에요. “나 의견 있어요.” “네 의견 안 물었어.”

왜냐하면 사도가 우리끼리 괜찮은 교회 만들자는 그런 것이 없어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가짜교회만 존재하기 때문에 거기에 교회라는 간판이 붙은 거예요. 다 가짜입니다. 그런 교회를 교회라고 하려거든 차라리 무당집을 교회라고 하세요. 다 같은 종교집단이기 때문에.

사람이 돈을 내서 유지하는 그런 교회는 주께서 애초에 만든 적도 없고 그런 것을 생각한 적도 없어요. 교회가 망하다니요? 무슨 그런 말이 다 있어요? 교회가 문 닫았다. 문 열린 교회가 문제지요. 교회는 문 열고 문 닫고 그런 것도 없어요. 사도는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 곧 주님의 계시이야기 할 뿐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 계시가 안 죽고 생생하게 그 모든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없어진다고 걱정을 하는 것은 뭐냐? 우리교회는 안하겠지만, 교회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교회 등록해서 다니면서 뭘 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 구원을 보장받았는데 교회가 없으면 어느 교회를 찾아가야 됩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전부 다 소속이 아니에요. 이미 그 사람은 소속이 없어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 안하면 아무도 책임 안 진다는 오직 사적인 자기만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공적인 것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나를 초월하는 것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계속 내 인생에 매여살고 있는 겁니다. 그게 교회뿐만 아니고 모든 일상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권사님인데 남편이 수십 년 동안 알코올중독이었고 도박을 해서 돈도 많이 날렸는데 이제 뒤늦게 복음을 알고 이혼했다는 겁니다. 그분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습니까, 할 때 제가 딴 조언은 안하고 그 이야기를 했어요. 노래 가사를 좀 보라고 했어요. 그 노래 가사가 뭐냐?

<하얀 민들레>
나 어릴 땐 철부지로 자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떠나는 것을
엄마품이 아무리 따뜻하지만
때가 되면 떠나요
할 수 없어요
안녕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며
두둥실 두둥실 떠나요
민들레 민들레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

나 옛날엔 사랑을 믿었지만
지금은 알아요 믿지 않아요
눈물이 아무리 쏟아져 와도
이제는 알아요 떠나는 마음
조용히 나만 혼자 손을 흔들며
두둥실 두둥실 떠나요
민들레 민들레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진미령의 <하얀 민들레>의 가사입니다. 어릴 때 철부지로 자랐지요. 엄마 품이 아무리 따뜻해도 떠나야 돼요. 민들레처럼. 그리고 돌아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 인간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온다고 해도 믿지 마세요. 떠나면 끝이에요. 옛날에는 사랑을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아요. 지금은 알아요. 지금은 믿지 않아요.

그 가사에 나와요. 복음이 나온다니까요. 이러다 이혼장려 전문목사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철부지처럼 눈물을 막 쏟아냈어요. 이제는 알아요. 그 눈물도 미련인 것을. 아무 소용없는 미련인 것을. 가사에 보면 두둥실, 두둥실 떠나요. 민들레처럼. 민들레 홀씨가 떠나면 안돌아오잖아요. 돌아오지 않아요.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남기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신 그 모습을 공적으로 자기 백성에다 그 소속에 있는 사람은 똑같이 예수님 운명처럼 만들어내기 위해서 주께서 만들어내시고 이끄신 겁니다. 이 세상을 떠나버리라는 말이지요. 미련 없이. 믿음, 소망, 사랑 아무것도 믿지 말고. 특히 너 자신도 믿지 말고.

사적인 것을 믿지 말라는 말이지요. 사적인 것을 믿지 않아야 될 것은 이미 공적인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공적인 소속이 뭐냐? 옛날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특징은 뭐냐?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너의 일을 하면 죽어요. 그러나 주의 일을 하면 살아요. 이게 이스라엘의 법칙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 일을 하고 있습니까? 눈만 뜨면. 그러면 소속이 없어요. 이미 주의 나라에 소속되고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게 되면 나의 일은 없습니다. 나의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소속에 맞는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육의 일을 하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의 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는 말, 그것은 이미 네가 속한 소속이 어떤 일이건 이미 주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도 사적인 것이 계속 올라오는 이유는 뭐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선택을 하게 해서 그 선택 자체가 자신의 무능성을 까발리는 계기로서 작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적인 것을 버리고 싶어도 못 버리는 이유가 아직도 자기가 유능하다고 보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혜택이지요. 혜택이라는 말은 아예 우리를 무능한 존재로 간주하고 모든 필요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채워주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유능하다면 절대로 이 유능함을 포기를 못합니다. 그러면 나의 유능함을 근거로 해서 나의 세계를 새로이 구축하려고 해요. 가짜의 특징은 뭐냐? 자기 행함을 근거로 주님과의 관계성을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 가짜의 특징입니다.

자기 행함, 자기기도, 자기헌금, 교회세운 것, 강의한 것, 이런 것을 근거로 해서, 자기 목사된 것,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이쯤 했으면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겠지’ 이게 가짜의 특징입니다. 이미 유대인을 통해서 그걸 알려준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은 자기가 뭐가 문제인지를 몰라요. 자기 행함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수립할거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 유대인을 무능하게 만드는 방법은 뭐냐? 율법도 모르고 참 하나님도 몰라서 아무것도 한 적도 없는 이방인을 가지고 유대인을 쳐버리는 거예요. 우리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사적인 인식이 유대인으로부터 완전히 개무시되고 도외시되는 그 쪽이 와서 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미처 그 무능함을 깨닫지 못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작을 사적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전부 다 선택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내용이라든지 또는 목사한테 상담하는 모든 내용이 사적인 거예요. “목사님,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하는데 법대 쪽으로 갈까요, 의사 쪽으로 갈까요?” 그런 선택을 두고 고민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 애는 무능한 것이 아니고 유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애 그리고 나는 공적인 것은 모르겠고 사적으로 복 받으면 천당 간다. 그저 우리 가정만 천당 가면 그만입니다, 하는 욕심을 내비치고 있는 거예요. 의대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또는 짬뽕을 먹을까요, 짜장면을 먹을까요? 주의 뜻은 간단해요. “네가 그것을 왜 묻느냐?”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왜 살려고 하는데?” “저는 유능하니까요.”

계속 자기가 유능함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사적으로 유능함이 되어버리면 공적인 세계, 주의 세계에서는 안통해요. 그것은 주의 일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어떻게 살았어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주께서 그런 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도는 지금 그리스도의 비밀이 아닌 것을 제일 싫어해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누가 가렸느냐? 사적인 자기의 잘남과 유능함과 자기의로움, 자기경건함, 내가 열심히 교회에 바치고 헌신한 이것 가지고 천국가려는 이 시도, 그것이 유대인들이 하던 짓거리를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의식과 동일한 의식이 되는 겁니다.

왜 무능이 주는 자유함을 왜 몰라요? 우리가 왜 그걸 만끽하지 못합니까? 무능이 주는 자유함을. 내가 쓸모짝 없는 자유함을 왜 우리는 놓치고 있습니까?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시간적, 공간적 원근법이라는 것이 있어요. 상당히 어려운 단어에요. 함축된 단어인데.

우선 시각적 원근법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시각적 원근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저 지평선이나 수평선 혹은 모래사장이 있다는 말이지요. 모래사장에서 조개나 예쁜 돌을 주울 때 인간에게 어떤 심리가 있느냐 하면, 여기는 예쁜 돌이나 조개껍질이 없지만 내가 보고 있는 저 지평선, 수평선이 맞닿아 있는 저쪽에 가면 여기에 없는 것이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원근이지요. 멀고 가까움. 가까운 데는 없지만 먼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실험을 해 보세요. 자기가 멀다고 여기는 그 지점으로 시간 들여서 걸어서 그 지점에 가 보세요. 그 지점에 가서 내가 처음에 멀다고 여겼던 그 지점을 돌아보세요. 그쪽이 마치 예쁜 조개껍질과 돌이 거기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멀리서 보면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고 파랑새가 있고 행복이 있고 꿈이 있는 것 같지요. 그쪽이나 이 쪽이나 똑같아요. 성경에서는 그 원근법이 너를 계속해서 꾸준히 속여 왔다는 거예요. 그 장소적 원근법이. 그게 야고보서 4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돈을 벌겠다 하는 인간들아. 어느 도시라는 공간이 특별한 공간이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내가 거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지중해 푸른 바다위에 하얀 집을 짓지요. tv 보면서 “여보, 나중에 은퇴하거든 크루즈 타고 유럽 지중해에 가서 즐기자. 거기 휴가 가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거기서 원피스 입고 돌아다니는 것 상상하면서 가보기를 원하지만 비행기 타면서 싸우기 시작해서 올 때까지 싸운다니까요.

왜냐? 둘 다 똑같은 인간이 갔기 때문에 풍경 다 버려놔요. 거기 가면 번데기 먹고 싶고, 떡볶이 먹고 싶고, 거기는 단팥빵도 팔지도 않거든요. 크림빵도 없고 먹고 싶은 누른 오징어도 없고 쥐포도 없고요. 외국에 가면 좋겠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나 좋지 막상 거기 가면 “나 돌아갈래~!” 나 돌아버릴래. 박하사탕 마지막 장면처럼, 나 돌아갈래.

돌아간다는 것이 원근법이에요. 나훈아가 무대를 치면서 청춘을 돌려다오, 하잖아요. 백세인생? 지금도 불행한데 백세 되어서 더 불행하지요. 인간은 이 원근법에 속아 넘어가요. 이게 공간적 원근법이고 시간적 원근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언제쯤 되면 내가, 20년 후가 되면, 내가 연금타면 행복할거야. 내가 은퇴하면 하고 싶은 대로 돌아다닐 거야. 우리 교회 그런 사람도 있지만.

시간적인 원근법인데 그것도 착각입니다. 사람들이 사적으로 계획하는 본인이 바로 지옥이고 그게 주께서 만든 심판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인간은 과정이 아니고 그 매일매일이 끝이에요. 과정이라는 것은 그 끝과 끝이 연결된 것뿐이에요. 오늘은 오늘로 끝이고 내일은 내일로 끝이에요. 내일 더 나은 희망 같은 것은 없습니다.

결혼해서 행복하려거든 그냥 결혼하지 마시고 이혼했다 치고 결혼하세요. 이혼했다 치고 결혼하면 그 결혼이 행복하지 한순간도 우리 결혼했다 생각하면 그 결혼은 파탄 났습니다. 이걸 가지고 이 문열 교수는 이렇게 했어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사람이 절망을 느끼는 것은 자기가 유능하다고, 나에게는 멋진 날개가 있다고, 이 날개 가지고 희망을 꽃피운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매일같이 추락을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방인들이에요. 우리는 무능한 자에요. 우리가 구원받을 권한도 없고 천국 갈 권리도 없고 자격도 안 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질문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지 인간나라 아닙니다. 인간이 하늘나라 가는 것은 특혜지 당연히 들어갈 장소가 안돼요. 못 들어갈 곳에 넣어주는 거예요. 그것도 주님의 빽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빽으로 하나님만 사는 그 동네에, 천사들만 사는 그 동네에 넣어주는 거예요. 마귀가 자꾸 들쑤셔서 천당 간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부 다 마귀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애초에 천국 갈 자격이 안돼요. 인간은 인간나라에 살아야지 무슨 천국을 가요? 버림받아야 마땅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이미 지옥이고. 딱 우리한테 적합해요. 각자 지옥에서 자기 물만 마시고, 원래 지옥에는 물 한 컵도 아쉬운데, 물이나 마시고 거기서 살다가 그냥 저주받는 거예요.

종말론적으로 보게 되면 이미 산다는 자체가 저주에요. 산다는 자체가 못 죽는 게 한 맺혔기에 사는 거예요. 죽는 게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안 죽어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에요. 빨리 죽여주세요, 하는 이것이 진정 자기 삶을 아는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고함입니다. 인간은 유대인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오해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소품이었습니다. 무대장치에 소품들을 이용하잖아요. 냉장고 놓고, 탁자 놓고. 소품 배치하듯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장차 오실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품으로 활용한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그들이 우상 섬길 때는 쓸모짝이 없어서 갖다 버린 것이고.

자기가 소품이라는 말은 단독적으로, 사적으로는 무능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제목이 ‘약속의 참여자’인데 제목을 바꾸고 싶어요. 무능한 자로. 유능하지 않은 자. 쓸모없는 자. 찬송가 가사에도 나오잖아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이 쓸데없는 자. 자기가 아무 쓸데 없다는 것, 그걸 아는 순간 그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입니다.

자기한테 기대하지 마세요. 쓸모없다는데 무슨 기대를 하고 무능한 자에게 무슨 기대를 합니까? 자기한테 희망을 걸지 마세요. 살아온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누가 자기를 다루는 어떤 공적인 사회, 이미 소속에서 필요해서 비품으로, 소품으로 사용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자기불행에 몸부림치지 마세요. 자기슬픔에 애통하지 마세요.

그럴 자격이 안 됩니다. 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기 때문에. 남자가 결혼할 때는 보여줄 것 다 보여줘요. 더 궁금하고 보고 싶은 것도 없어요. 다 보여줬어요. 다 보여줬기 때문에 감출 것도 없어요.

그러면 결혼을 왜 하느냐? 신비로움 이런 것도 없어요. 그러면 결혼을 왜 하느냐? 보여주기의 반대말이 감추기가 아닙니다. 베푸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무능한 남편, 이 무능한 아내를 만나서 무능한 가정을 이뤘느냐? 무능함 속에서, 무능한 육을 통해서 육을, 이 잘난 나를 무능하게 만드는 그 과정 속에서 추가적인 육의 초월성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무능한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셔서 고맙다는 그 사랑을 드러내고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가정이라는 것을 만드는 거예요. 사랑을 위하여. 김 종환이가 불렀잖아요. 자기가 무능할 경우에만 사랑이 나와요. 왜? 이렇게 할 테니 얼마를 줄래, 라는 수지타산을 계산을 안 하니까 나올 것이 사랑밖에 없는 거예요.

고맙다는 말밖에 안 나와요. 고맙다는 말밖에. 남편 때문에 아내가 다치면 아내가 하는 말이 “이 무능한 나를 다치게 해서 고마워요.” 이렇게 나오겠지요. 서로가, 나 같은 인간을 아직도 안 버리고 살려주니 고마워요. 감사해요. 주례할 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끝이니까 매일같이 반복되어야 돼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목사님, 그렇게 하다가 우리가 실패하면 어떡합니까?” 이게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지난 시간에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이야기했거든요. 은혜의 경륜, 그리스도의 비밀.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어떤 인간이든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익숙함입니다. 하나님의 익숙함. 다른 말로 하나님의 당연함. 하나님의 마땅함.

하나님의 익숙함이에요. “저 죄지었어요.” 네가 죄짓는 것이 하나님의 익숙함이야. 너는 제가 죄지었다 하지만, 그래서 또 ‘나’를 집어넣지만 하나님의 일관성이 그냥 죄로 나온 거예요. 우리 죄 때문에 몸부림치지 마세요. 그것 반성한다고 난리치지 마세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설픈 행동을 해도 그 행동이 무능함이고 어리석은 행동이고 쓸모없는 행동이니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익숙함이에요.

그런 인간들 모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든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조직이에요. 하나님의 소속입니다. “내 앞에서 네 자랑하지 마라. 나는 죄인을 구원하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피를 흘려서 구원받았지. 너의 사적인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너를 칭찬하려고 너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우리 유능함 꺼리를 여러분이 찾아보세요. 여러분의 유능함 꺼리. 나는 이만큼 쓸모 있다. 나는 이만큼 잘났다, 하고 평소에 생각하는 어떤 증거물들이 있을 거예요. 자식 둘 다 의사라는 그런 것들. 이제는 그것이 장애가 돼요. 내가 키운 것이 아니고 무능한 나를 통해서 주께서 저렇게 주님의 익숙함으로, ‘내 아들은 의사가 되어야 해’라는 익숙함으로서 그렇게 한 거예요.

자식이 혹시 교도소 갔습니까? 누비옷 집에서 만들어주세요. “엄마 나 죄지었어.” “엄마는 아들의 죄를 모른다.” 추운데 누비옷이나 만들어서 철장에 넣어주면서 “이 옷이나 입어라.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자식이다.” 왜? 우리끼리는 공적인 사회니까. 너의 사적인 죄 같은 것은 아예 공적인 데서는 애초부터 물은 적도 없고 물을 생각도 없다. 너는 어떤 소속이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소속은 육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날마다 우리의 선택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무능하며, 나의 욕심밖에 챙길 줄 모르며, 나는 스스로 내 꾀에 빠지는, 쓸모도 없으면서 쓸모 있는 척을 하는, 그 정도로 아무짝도 소용없는 인간인 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알았던 그 비밀, 도저히 하나님나라 갈 수 없는 이방인을 통해서 유대인을 치시는 그 비밀, 이제는 세상을 통해서 우리를 쳐주시옵소서. 우리가 너무 잘난 체했습니다. 멋있는 짓 했습니다. 우리를 대단히 가치 있는 존재로 착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의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주여, 그걸 다 무능함으로 바꿔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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