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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0 12:46:54 조회 : 3967         
   행함과 믿음 190310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행함과 믿음(에베소서 2: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OUPqoK7BbmI, Hit:50
 이근호 19-03-10 13:33 
행위와 믿음

2019년 3월 10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9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무심코 나오는 모든 의도와 생각이 모두 행위입니다. 행위는 근원적인 인간성의 발로입니다. 따라서 행위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말은 태어난 인간성으로는 천국에 적합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심코 내뱉는 모든 것은 오직 ‘내가 내뱉었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그것을 변호하려 둡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 행위는 그 누구로부터 질책당할 이유없다 는 식입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1970년도에 나왔던 노래, 둘이걸었네‘라는 가사에 이렇게 시작됩니다.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따라 우산도 없이
 오늘밤에는 가로등불이 유난히도 반짝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명백하게 ‘행함’입니다. 왜냐하면 최종 관심사가 자기에게도 쏠릴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무심코 내뱉은 의도와 생각의 관심사가 주님에게로 쏠려있지 않습니다. 평소에 아무렇게나 습관대로 행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은 이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가려면 이런 인간성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체적으로 바뀔 그 어떤 시도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개체란 생태계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세계라는 생태계에 인간들은 악착같이 적응하는 식으로 자아를 구성해왔습니다. 진리고 뭐고 간에 살아남는 것이 전부다로 다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건덕지가 없습니다. 자기 행함과 자기 본성을 근원적으로 질책할 수단을 인간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항상 ‘나에게 과연 무엇이 실익인가’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약속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이 현실에 맞는 객관성으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나오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요? “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즉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다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누구도 예수님께서 자기네들과 함께 계시다는 객관성이 유지되었다고 여깁니다. 소위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철석같이 믿는 그 객관성을 자기들의 객관적 판단이 따라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들의 객관성이 주님의 객관성과 하나로 통합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즉 예수님의 기준으로 봐서 인간들은 ‘비-현실적’ 존재들입니다. 망상가들입니다. 진정한 객관이란 비-객관적인 인간들이 결정 지울 사항이 아니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혼자 살아도 산다가 된다’는 그 의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인간 내부에 이미 초월적인 것이 들어와 있습니다.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성경대로 하면, ‘선악지식 체계’입니다. 즉 인간들은 그냥 무심코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사이를 따지면서 행한다는 겁니다. 그냥 ‘나’가 아니라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 온 나’로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부는 지속적으로 선과 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내부의 다툼의 외부의 다툼으로 번집니다. 바로 인간의 행함 내부에는 인간이 만들어 집어넣지 않는 이 초월적 의식이 인간의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요물이요 영적 존재입니다. 선악 원리가 아니라면 결코 객관적으로 정리가 되기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궁극적으로 절대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선과 악의 지식으로 자신을 처단합니다. 그리고 재생시킵니다. 이게 바로 종교의 기능인데 문제 이런 종교적 기능이 그대로 이 세상에 모든 기계에 반영되어 있다는 겁니다. 컴퓨터의 작동하는 논리절차는 ‘되먹임’으로 성능을 향상시킵니다.

인공지능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도출한 결과를 다시금 도입부에 집어넣고, 그래서 또 도출된 결과물을 반복적으로 또 도입부에 집어넣어서 원하는 해답을 얻고자 합니다. 소위 ‘되먹임’ 작용입니다. 인간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행함을 다시 자기에게 적용시켜서 우수한 자아를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항상 최종 결승전에 자기와 자기를 맞닥뜨리게 해놓고서는 자기 힘으로 부족한 자기를 딛고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완을 반복해서 행사하게 됩니다. 이게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기계작동원리입니다. 스스로 결과를 보게 하고 그 결과 수정에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행위를 개입시켜 수정케 하라고 양심이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도출된 양상은 무엇일까요? 곧 ‘나의 행함’의 승리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믿음’이라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 인간 세계의 믿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생태계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른 세계를 몰고 오신 겁니다.

인간은 기계 맞습니다. 하지만 생산하는 것은 ‘없는 믿음’입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께서 천국백성으로 뒤바꾸는 방식은 ‘요나의 표적’입니다.(마 16:4) 요나서에서의 요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들기에 인간의 무능성을 보여줍니다. 그 무능성으로 요나는 죽음에 이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주신 그 계시 속에서 은혜를 나오게 하십니다. 결국 요나서에는 요나는 기계입니다. 은혜와 믿음과 영생을 생산하는 기계입니다. 이 요나 성도를 대표한다면 인간들은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현상을 보입니다. 즉 기계로서 전락하는 뭉개짐입니다.

전도서 12:3-5에 보면,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손)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다리)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치아)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눈)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귀)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성대)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흰머리)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전도서에서 인간을 통해서 생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허무’입니다. 곧 행함의 허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준 사람에게만, 인간은 행함도 모르고 믿음도 모르는 자임을 압니다. 주님이 생존이 강렬함을 느낄 때는 차라리 노안이 오고 장님이 될 경우입니다. 즉 자신의 선과 악 조차도 안 내세울 때 주님만 자랑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가 더럽다고 불평한 자격도 없습니다. 기계인 주제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십자가가 폭탄이 투하되게 하옵소서. 차라리 바보가 왜 합당한 조치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3-10 20:30 
16강-엡 2장 9절(행함과 믿음)19030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9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행함이란 자기의도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행함을 통해서 자기생각이 나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이 그대로 거기에 같이 딸려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는 사람이 바뀌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쪽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평생토록 몸담았던 이 세상이 우리가 가는 세상과 다르대요. 제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 그냥 소개할 뿐입니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세계에 소속되려면 이 세상과 달라야 되기에 이 세상 사람으로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가 저쪽 세계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되는데 그 바뀌어질 때의 원칙을 오늘 성경에서 제시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 아니요” 라는 말로서 그 취지를 말씀해요. “……는 아니다.” 그 말이죠. 행함은 아니고 믿음이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해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쪽 세계, 우리가 가야될 세계는 일체의 행함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오직 행함만 있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이 아니요, 행함이 아니요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으로 줄곧 길들여진 우리 자신이 이제는 행함으로 살던 그 생활이 청산되어야 됩니다. 거기서 만들어진 인간성은 이제 우리가 처분해야 됩니다. 잊으세요.” 곧 나를 잊으세요, 하는 그런 뜻이에요. 행함으로 점철된, 행함으로 연속된 나를 잊으세요.

그러면 내가 나를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믿음은 그 대상이 행함을 하는 나한테 믿음의 대상은 믿음이라고 간주를 안 해줘요. 그래서 저쪽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라고 우리가 반격을 가할 텐데요. 그쪽 세계에 계신 분이 일부러 힘든 걸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힘들게 이 땅에 오셨어요. 오셔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어요.

누가 믿었으리오. 이사야 53장입니다. 누가 믿었으리오. 믿음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믿었으리오. 이미 너희들은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잖아. 네가 믿는 구석이 따로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야기를 해도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거지요. 먹혀들지를 않아요. 싫어버린바 되었어요. 예수 좋아하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몰라. 전부 다 가짜 같아요. 예수님은 싫어버린 바 되었어요.

내가 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좋아진다는 그것은 가짜예수입니다. 주님은 어느 교회가도 싫어버린 바가 될 거예요.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어느 교단에 가도 싫어버린바 될 거예요. 어느 종교에 가도 싫어버린 바 될 거예요. 그래서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 할 때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슨 실천을 해도, 아까 이야기한대로 행함과 어떤 의도와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지금 나의 갖고 있는 이 본성을 내가 폐기처분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내가 믿지 뭐 내가. 내가 독하게 믿지 뭐. 열심히 믿지 뭐. 간절히 기도해서 믿지 뭐.’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폐기처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동대구역에 가면 꼭 화장실에 가는데 “청소 중”이라는 표시 해놓았는데 가보면 청소중이에요. 주님께서는 지금 이 세상을 청소중입니다. 거기에 바퀴벌레 같은 것도 나와요. 쓰레받기에 담아야지요. 바퀴벌레가 알아서 기어 나오는 그런 바퀴는 없거든요. 바퀴벌레는 자기 환경에 친숙한 것에 끌려서 거기서 살게 되어 있어요.

개체라는 것은 생태계에서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라는 개체는 이 세상이라는 생태계에서 참으로 풍성하게 거기에 잘 적응되어서 이만큼 인류문명이 발달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유일한 생태계이며 그 생태계가 있다는 말은 우리는 그것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우리가 유일한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한마디로 ‘행함’이라고 봐요. 그게 행함이에요. 아침에 교회 오는데 옆집의 80된 할아버지가 저에게 이야기해요. “아재 비오지요. 비 좀 더 와야 될 것인데.” 그게 행함입니다. 자기본성이 그대로 나왔어요. 관심사가 그대로 나와 버렸어요. 성경에서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행함을 따로 떼 내는 경향이 있는데 평소에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가는 모든 것이 행함이에요.

제가 젊을 때 들었던 노래가 있는데 저하고 나이가 같은 여자가수가 있어요. 이름이 정 종숙입니다.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따라 우산도 없이. 오늘 밤에는 가로등불이 유난히도 반짝입니다.” 둘이 걸었네. 지금 아무도 이 노래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요.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아래 우산도 없이. 여러분 이걸 가지고 두 자로 행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그냥 들으면,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아래 우산도 없이. 여기에 시비 걸 건더기가 전혀 없어 보이지요. 좋아서 그 길을 걸었겠지요. 어제 그 길을 또 걸었겠지요. 너무 정다워서 우산도 없이 걸었겠지요. 비는 오는데.

이게 탓할 일입니까? 평소에 우리가 이렇게 안 살아요? 달라져야 됩니다. 이것마저 달라져야 돼요. 오늘 밤에는 가로등불이 유난히도 반짝입니다. 관심사가 왜 그 모양이냐 그 말입니다. 관심사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걸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까 당신의 관심사는 이 세상뿐이라는 거지요. 그런 것까지 시비를 걸게 되면 우리는 숨 막혀서 못산다고 이야기하고 싶겠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안 고쳐지고 못 고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냥 익숙한 대로 평소에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행함입니다.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 거예요. 내가 살아온 이 생태계를 무슨 수로 바꿔요. 거기에 적응해서 잘만 먹고 잘 살기만 하는데.

교회에서 행함이라고 하면, 기도하기, 헌금하기, 전도하기, 예배참석하기, 성경공부하기, 선교헌금내기, 목사섬기기, 교회 키우기, 그런 것을 따로 챙기는 경향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놓고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믿음에 따라서 주어진 행함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야고보서 2장에 그런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구라도 세상에 김 구라보다 더 쳐요. 이 세상에는 행함과 믿음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믿음이 행함의 일종이에요.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믿음 없는 행함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부 다 어떤 행함을 할 때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서 행해요. 나름 그래요.

그런데 그 믿는 구석이라 할 때 누굴 믿느냐? 본인을 믿는 거예요. 본인의 기도를 믿고, 본인의 예수 믿는다는 그 사실의 기억을 믿고, 본인이 선교한 것을 믿고, 본인이 목돈 내서 어릴 때 이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믿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믿고, 그리고 지금도 목사라이센스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이 세상에 나는 네 아버지라는 것을 믿고 너는 내 자식이라는 것을 믿고.

모든 발언 하나하나에 믿음이 실리지 않는 행함은 인간에게서는 쏟아지지 않습니다. 전부 다 행함이에요. 무슨 행함 따로, 믿음 따로, 그런 것은 없습니다. 따로국밥 시켜도 나중에 밥 말아버리면 그 국물에 그 밥이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사도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알아서 행함 따로 골라내고 믿음 따로 골라내라는 그런 식으로 하라고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그것은 성경을 주신 그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성경은 주님 따라 온 겁니다. 이 땅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에요. 믿음 좋아서 나중에 주의 종 되겠다고, 사명 얻었다고, 기도원에서 빡세게 기도해서 은혜 받았다고 해서 신학교에 원서 낸 사람들, 그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신학이라고 접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성경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이 만들었다. 그 논리가, 악마가 이미 신학교와 목사양성소를 다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신학교 교수가 박사 되려면 악마한테 영혼을 거래해야 박사학위를 받아요. 이런 세계를 아마추어 여러분들이 모르잖아요. 신학 교수한테 좋은 점수 받으려면 악마 같은 그 신학교수에게 고개를 숙여야 좋은 점수를 받고, 그래서 목사들이 양성이 되는 겁니다.

그쪽 세계가 다 그래요. 마귀가 “아이고, 신학교 무서워라. 안 들어갈래.” 이런 마귀가 없어요. 오히려 마귀는 더 좋아해요. 그런 것이 고상해보이니까. 경건해 보이니까. 성경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서 풀 수가 있고, 그리고 성경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성경구절 가운데서 적당한 것 뽑아서 온 고객들 만족스럽게 하게 되면 다시 한 번 그 사람은 재방문율이 놓아져요.

식당사업이 잘 되려면 다시 찾아오는 단골이 생겨야 되거든요. 단골생기면 교회 되고, 그 단골이 마음이 하나로 합치되면 교회는 더 클 수 있는 잠재력이 커진다. 다이너마이트처럼 힘이 커진다. 장사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봤을 때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친히 기르시는 것은 맞는데 인간 좋으라고 기르시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기르시는 거예요. 우린 청소대상입니다. 청소할 때 복음이 청소를 시키는 거예요. 청소하게 하시는,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제거하게 하시는 그것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라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거예요. 우리의 은근한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성경에서 ‘복음 안에서 기르신다.’는 말, 다른 말로 ‘예수 안에서 기르신다.’ 또는 ‘성령 안에서 길러진다.’는 뜻입니다. 성경 안에서 길러진다는 그 말입니다.

성경은 마치 뭐야 같으냐 하면, 우리가 생전 시청하지도 않은 드라마에 대해서 평을 성경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이 만약 드라마라면 우리가 그 드라마를 봐야 무슨 평을 하든지 하는데 우리는 성경에 있는 현실을 못 봤어요. 왜 못 봤느냐 하면, 나는 내가 살 궁리에 급급하다 보니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나 따로의 드라마, 나의 드라마, 나를 위한 소설책, 내가 잘되기 위한,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그걸 긍정적으로 봐주는 나만의 드라마를 새로 우리가 써왔던 거예요.

정신을 온통 나 잘되기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성경도 내 소설에 아마 도움이 될 걸,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자신이 특히 더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선배들, 유대사회의 유대인들이 다 그랬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거예요.

당신이 있어서 우리에게 보탬이 된 것이 뭐가 있나, 당신이 있어서 나한테 이익이 된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의 평생의 모든 사고방식과 기대와 희망과 이미 같은 것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 내 실익이 있고 내가 잘되는 쪽이라면 내가 당신 말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그런 식으로 이미 정리된 거예요.

부교역자가 어느 교회 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부교역자가 일 년 계약직이었어요. 당회장 목사님이 종용히 당회실로 불러요. 아주 칭찬을 늘어지게 하는 겁니다. “신학교에서 어느 교수한테 배웠느냐. 참 듣도 못한 귀한 말씀을 전해주니 나도 은혜 받는다.” 전제가 있어요. 그 목사님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놈의 인격이 문제라. “참 그 말씀에 은혜 받았다. 요새 젊은 목사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 그런데 장로들이 안 좋아하네.” 그 말은 “조용히 좀 나가줄래?” 그 말이에요. “네가 복음적인 것은 맞는데 그래가지고는 교회가 안 된다. 너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될 거야.” 이거 무슨 이야기지요? 제가 한 두 번 들은 것도 아니니까. 가는 교회마다 다 들었으니까.

이걸 정리하고 종합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교회 잘못 들어왔다. 이 교회는 복음을 위해서 있는 교회가 아니다. 그냥 무당집이다. 기도하면 복 받고, 장차 죽으면 천당 간다는 무당집이야. 네가 번지수를 잘못 알고 온 거야.” 그런 뜻이에요. 품위, 인격, 뭐가 아닌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는 장사를 안 하는 목사기 때문에 품위와 인격은 나름대로 챙기면서 한껏 저를 높여주고 칭찬을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가는 곳마다 칭찬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쫓겨나오고. 그 목사 어디 출신입니까? 교인들 출신이에요. 그러면 교회라는 생태계가 어떤 생태계입니까? 이미 그 생태계에 합한 개체들을 생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4대째 신앙, 3대째 모태신앙, 바로 그런 것들이 행함을 믿음이라고 조작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지어진 책입니다. 논리구조를 잘 들어보세요. 성경은 성령으로 지어졌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나와요.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지 않으면 절대로 이 땅에 오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지기 전까지는 성령이 누구한테만 왔느냐 하면, 오직 예수님, 그 아들에게만 왔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모든 성경말씀을 다 이루고 난 뒤에는 그걸 확대, 확산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에게만 성령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정된 사람에게만. 그래서 인자를 탓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되 성령에 대해서 탓하고 모독하는 사람은 오는 세대에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마태복음 12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논리구조를 아까 쉽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인간들이 듣도 보도 못한 드라마이야기를 성경이 보여주고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드라마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성경은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근성이 어떤 근성이냐 하면, 나 자신이 잘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적응하는데, 처음에는 가정에서 적응하겠지요. 말 잘 들어야 떡 하나 주니까.

적응과 적응의 연발과 연속이었어요. 사는 게 남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진리고 종교고 때려치우고 마지막 남는 것은 어쨌든지 살아남아야 해, 끝! 그게 전부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그 인간성으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그런 안목으로 보니까, 오늘 본문 같은 경우를 보세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니까 이제는 ‘나는 행함으로 내 자랑질을 안해야지.’ 왜? 주께서 그런 것은 교만하다고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 ‘나는 예수만 믿어야지.’ 누가요? 내가. 내가 예수만 믿는데.

하, 또 자기소설에서 한발자국도 이탈한 적이 없어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것에서 그 믿음은 인간세계에서는 없던 거예요. 그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할 때 심지어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이 땅에 믿음이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신 방식이 믿음이다. 나한테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안 믿으면 돼요. 나를 포기하면 되는 겁니다.

나를 포기하는 방법은 뭐냐? 그동안 나는 나 혼자 살아왔다고 생각하거든요. 나 혼자 사는 것이 현실이라고 여겼는데 성경에 보면 나 혼자 산다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 없어요. 나라는 몸뚱이부터 모든 사이사이에 주님이 주신 은혜가 가득하게 계속 제공되고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나 혼자만 의롭다고 까불다가 혼난 그 대목이 구약성경의 욥이었습니다.

욥은 사이사이를 다 놓쳐버린 거예요. “내가 주님 앞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더는 못합니다. 나에게 더 어떤 것을 요구한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태어나지 말아야 했지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라고 짜증을 부리는데 주님께서는 그 빠진 대목을 하나하나 다 지적합니다.

네가 이걸 아느냐, 이걸 아느냐, 이런 것들이 지금의 너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너는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왜 너는 네 행함으로 오늘날의 네가 되었다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세우고 우기느냐 하는 겁니다. 그걸 네가 다 챙겼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라 하는 것은 그 안에 뭐가 들었느냐? 초월적인 요소들이 전부 다 들어 있어요.

성경 보겠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해보라는 식으로 따지고 들 것인데 그런 사람에게 사도행전 1장 9절을 읽어드리고 싶어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있을 때 실제로 이 땅에 있다고 객관적으로 제자들이 알았어요. 알았지만 주님은 잡히지 않는 객관이에요. 공중으로 가는데 따라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객관적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던 그 사고방식에 문제성이 생기고 한계가 밝혀진 겁니다. 객관적으로 주님이 확실히 있다는 그 주님이 공중으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남아 있는 인간들이 객관적이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제자들이 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지금 헛바람 들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해야 돼요. 왜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합니까? 공중에서 사라진 그 분과 비교 안하고요. 공중에서 사라지니까 저것은 헛바람이야, 저것은 헛거야, 누가 누구보고 지적질 합니까? 드론 띄워서 주님 보시기에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한 우리 자신이 평생토록 헛바람 들은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나를 잘못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혼자 살았다고요? 혼자 산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은혜에 칭칭 감겨서 살았어요. 그건 누가 주신지 압니까? 모르지요. 모르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아침에 봤다는 그 옆집 할아버지 이야기 했지요. “비가 더 와야 되는데.” 할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안 되지요. 주께서 비를 이만큼 주셨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야 되지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절에 다니는 분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그게 행함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의 행함은 내 이익을 위해서 출발해서 돌아오는 것도 내 이익으로 돌아와요. 이 말은 뭐냐?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혼자 살 거야. 혼자 산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든 예수를 믿든 그 결과는 반드시 내 실익이 되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나는 나답게 살아가는 것, 이게 내가 살던 생태계라는 말이지요.

주님이 보여야 어떻게 믿지, 라고 하거든요. 인간 속에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 것이 들어 있어요. 그게 뭐냐? 자기는 모르지요. 로마서 7장의 양심이라는 것이거든요. 양심이라는 것을 엘지에서 만들었어요, 삼성전자에서 만들었어요? 한진그룹에서 만들었어요? 한화에너지에서 만들었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초월적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요물이고 영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어야 초월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기 전에 이미 우리가 영물이에요. 질이 더러운 영물이지만. 악마를 닮은 영물이지요. 우리는 몰랐는데 성경을 보니까 창세기 3장에 선악이라는 것을 따먹어서 그렇게 요물이 되었다는 거예요. 선악은 뭐냐? 다른 말로 하면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의 특징은 뭐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을 내가 판단하는 것을 양심이라 해요. 그래서 양심도 진화하는 겁니다. 양심도 이 사회의 생태계에 따라서 달라져요. 어느 나라에 사느냐에 따라서 양심도 기준이 다 달라요. 어쨌든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이 초월적으로 우리 내부를 장악하고 그 내부에서 우리는 날마다 선과 악 사이에 전투를 벌이고 싸우게 되어 있어요. 계속해서 갈등을 유발합니다.

이 내부적 갈등이 바깥으로 나와서 외부적 갈등이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생존경쟁이라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비가 와야 될 텐데’ 아까 이야기한 노랫말,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따라 우산도 없이.” 이렇게 해놓고 “그게 뭐 나쁜 것은 아니지요?” 나에게 물었고, 내가 한 이 짓은 안 나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까 다른 사람도 “안 나쁠 걸”

어느 구석이라도 인간의 의도와 본성, 선악체계는 발현되고 발휘되게 되어 있어요. 이 노래 잘 끄집어냈다는 생각이 드네요.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따라 우산도 없이.” 탓할 것 없고 시비 걸 것이 없지요. 그런데 둘이 걸었는데 한 사람이 유부녀라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모자 쓰고 마스크 하고 cctv 의식하면서 걷겠지요.

그런데 부부인데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따라 우산도 없이.” 부부라면 모자 벗고, 마스크 벗고, 깔깔거리면서 걷겠지요. 인간의 모든 행위 속에는 선과 악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습니다. 기도를 하건 뭘 하건 항상 ‘나 교회 온 것 잘못한 것 아니지요?’ 아파서 못 왔는지 교회 못 왔는데 이상하게 나쁜 짓 한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인간의 행함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이미 행함을 행하여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이게 행함이고 선악체제라고 하는 악이에요. 이 악에서 우리는 못 벗어납니다. 잘했다, 못했다. 내부적으로 한시도 미세먼지 자욱한 여기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 가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잘난 내가 여기 있다. 또는, 내가 여기 있는데 얼추 그다지 나쁘게 인생 살지는 않았다는 이런 가치서술을 붙여서 그걸 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전에 교도소 위문말씀 전하러 더러 갔어요. 오만 것 다 해봤습니다. 그냥 가면 안 되지요. 빵 들고 가는 겁니다. 그분들이 맛있다고 잘 잡수셔서 주는 우리 쪽이 굉장히 기뻐요.

그런데 그 빵을 맛있게 먹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작은 배려라도 내 주제에서는 오감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출소를 했어요. 출소했는데 빵 주면 “날 거지로 아느냐”고 나오지요. 보세요. 모든 인간은 행동 하나 태도 하나에 “내가 빵이나 얻어먹을 입장은 아니야.”라고 나름대로 이미 자기의 위상을 얼추 높이는 거예요. ‘내가 아직도 재소자인줄 아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내가 망가지기는 했지만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이게 선악체제에요.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달라져서 천국갈 수 있겠어요? 못가지요. 선악체제에 완전히 갇혀 있어 버렸는데. 그래가지고 예수 믿습니다, 피를 믿습니다, 백날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믿어요? 내 가치를 격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거든요.

지금 못났지만 예수 믿으면 훌륭한 사람 될 거라는 하나의 꼼수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교회 오는 것 자체가 꼼수. 보다 훌륭한 자아상으로 거듭나기. 그래서 이 선악체계의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하면, 나를 선악으로 재단해서 나를 처단해서 나를 재생시키는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요. 기독교든 천주교든지.

내가 나를 처단해서 내가 나를 새사람으로 재생하는 것. 그걸 교회에서 흔히 거듭남이라고 보통 그렇게 이야기들 하지요. 그런데 과학의 논리적체계에 의하면 그걸 가지고 ‘되먹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공지능의 원리에요. 인공지능의 원리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 다 집어넣는 겁니다. 나에게서 도출된 결과를 다시 나에게 집어넣게 되면 예상 못한 새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것이 인공지능의 딥런닝의 원리라는 말이지요.

인공지능이라 하는 것은 인간머리의 시냅스의 논리를 그대로 기계화한 것이 인공지능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뭐다? 기계라 그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기계에요. 기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된다는 이야기에요. 제가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거예요.

기계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신경 안 쓰셔도 되는 겁니다. 박 근혜 전 대통령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들이 나를 더럽게 만든다고 했거든요. 괜찮은 나를 더럽게 만든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더러울 가치도 없어요. 더러울 가치도 없다. 왜? 기계인데 기계가 더럽고 안 더럽고가 어디 있습니까? 선악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게 더러운데, 주님이 보시기에 더러운데 안 더럽다고 발악하는 것이 잘못된 거예요.

제가 아직 믿음이 뭔가를 설명 안했습니다. 행함을 충실히 설명해야 돼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자기 백성을 건지러 오셨는데 건질 때는 바꿔야 건진다고 말씀드렸지요. 바뀔 때 주님의 방식이 있을 것인데 주님의 방식이 뭐냐? 그 방식이 마태복음 16장 4절에 나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이 나와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취지는 어디서 나왔느냐? 요나에서 나온 거예요. 요나의 생애 속에 십자가가 담겨 있고 주님의 십자가지심의 취지는 요나의 취지의 완성으로서 십자가지신 거예요.

요나의 표적이 뭐냐 하면, 구약의 요나의 일대기를 보게 되면 요나는 무능의 시간이었어요. 무능함. 요나가 무능해요. 선지자면서 늘 거부하지요. 요나의 행함을 통해서 요나가 구원받을 건더기가 전혀 없는 것이 요나에요. 그런데 요나가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고 요나가 보여준 것은 인간의 한계, 믿음 없음, 요나의 행함의 몸부림,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행함, 선과 악으로 자기를 위로하는 행함의 극단을 요나가 보여주는 겁니다.

요나가 선지자거든요. 선지자라는 말은 뭔가 요나가 대표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요나가 어떤 것을 대표하느냐? 인간이 기계라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전도서 12장 3절-5절에 나오는데요.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에서 네가 손 떼라. 너는 태어날 때부터 속성이 속성대로 기계니까 자동적으로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은 기계인데 뭘 생산하느냐? 허무를 생산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공장장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냥 기계설비에 지나지 않아요.

이렇게 가면 돼요. 이렇게 가게 된 것을 두고, 내가 보약을 안 먹어서 그렇다, 내가 로얄젤리를 안 먹어서 그렇다, 그러지 마세요. 도라지에 배즙을 안 갈아먹어서 그렇다고 하지 마시고 인간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3절을 다시 보게 되면,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집을 지키는 자, 손이거든요.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는 것은 다리를 말하고요.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맷돌질 잘 아시지요. 치아, 이빨.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이것도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눈.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귀.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성대. 인간은 그 자체가 기계에요. 노후되는 기계에요. 믿음은 뭐냐? 이게 보편화된 거예요. 전도서의 이 이야기가, 잘 먹고 잘 살고, 부자냐 가난 하냐, 학식이 얼마냐, 학력이 어디까지냐, 그런 것을 묻지 않고 모든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그렇다면 전도서 12장 3절에서 5절 말씀은 누구에게도 공히 적용되게 되어 있어요. 이걸 보편성이라 합니다.

인간은 이게 전부 다 보편화되어 있어요. 그 보편화된 이유를, 초월적인 이유를 대표로 하는 것이 선지자고 그 선지자가 요나가 되는 겁니다. 요나는 이런 보편화된 인간성을 그 원인과 이유를 집약시킨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왔어도 요나는 자기 행함으로 그걸 거부했다. 하지만 요나의 마지막은 뭐냐? 인간의 행함과 무엇과 대비시키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대비시키는 거예요.

지옥 간다는 니느웨 사람들이 다 회개했잖아요.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은혜, 하나님의 행함과 믿음조차도……, 말씀 잘 들으셔야 돼요. 어려워요. 인간이 행하고 주께서 믿음 주시는 것이 아니고요. 인간이 행함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그걸 아는 그것도 이게 은혜에 속하고 믿음에 속한다는 그 말입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믿는 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땅에서 기계대로 행하기만 하면 돼요. 그걸 믿음이라고 처리하는 것은 내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이에요. 왜? 우리의 눈은 노안이 되어야 되니까. 사람이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차라리 노안 되세요.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마세요. 차라리 장님이 되세요.

“자꾸 남들이 내 욕하는 것이 들립니다.” 차라리 귀 먹으세요. 외부에서 자꾸 내 선악을 자극시키니까 갑자기 죽었던 자아가 또 되살아나는 거예요. 누구 말대로 내가 등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등신 만들어 주실 겁니다. 주께서. 소원대로.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있어요. 주와 함께 있으면 내 쪽에서는 등신 되라고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노안 되라고. 주님께서 “너 뭐 들은 것 있나?” “저는 귀가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들려요.” 그게 가장 나를 없애고, 잊어버리고, 주님만 강렬하게 그 존재가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그게 믿음이라고 우리 힘으로 어떻게 조절이 안돼요. 그랬다가도 내일되면 또 헤헤거리면서 ‘나 믿는다’ 자아가 또 되살아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줄곧 죽을 때까지 행함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어제 그 길을 불빛 따라 우산도 없이 걸으시면 되는 거예요. 비가 오면 ‘비 좀 더 오지.’ 무심코 내세우시기 바랍니다. 다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이게 바로, 내가 기계이면서도 기계 아닌 척 하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나는 홀로 살고 싶은 악마적인 본성인 것을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아는 순간입니다.

이게 악마다. 인간의 선악은 결국은 최종 상대를 누구하고 결승전을 하느냐? 남들하고 안 해요. 본인과 본인이 최종결승전을 벌입니다. 미친 거예요. 그래서 결승전을 해서 나를 처단하고 재생된 나를 최종 승자로 만드는 그 작업에 우리는 아주 바빠요. 굉장히 바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선악체계가 아니고 사랑입니다.

선악체계가 만들어진 가운데 자기가 강화되지요. 선악은 갈수록 나 자신이 강화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다음에 그 십자가가 소이탄을 우리 속의 악마의 적의 전략부에 투하시켜버립니다. 소이탄이라는 것은 불살라버리는 폭탄이에요. 무서운 폭탄이지요. 아예 불살라버립니다. 뭘 불사르느냐? 악을 불사르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 동시에 다 불살라버리지요.

내가 의식되지 않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내가 종속된 상태에서 산다는 것,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땅에는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약속하지 마세요. 이 땅에는 약속이 없어요.

사람이 약속하려고 들면, ‘몇 시에 모이는데? 어디에 가는데?’ 무심코 내뱉은 모든 행함들이 나로 하여금 ‘약속 지키면 나는 선한 행동하는 사람이고 약속을 안 지키면 나는 욕 들어도 마땅하다’는 선과 악을 또 작동을 시키는 겁니다. 선과 악을 작동시키면 돌아오는 결과가 뭐냐 하면, ‘역시 내가 잘났어. 나는 이 정도야.’라고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만드는 계기가 되어버려요.

이것은 바로 행함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께서, 인간세계는 약속이 없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이 땅의 원리대로 약속 없게 만들어줘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 일찍 갔다. 일찍 가보니 상대방이 30분 늦게 오잖아. 봐라.” 네가 약속을 지킨 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우리의 가치를 갉아먹어요. 누가? 이 말씀이.

“주여, 기도했습니다.” 하면 그 기도한 것을 갉아먹어요. 모든 것을. 왜? 청소중이기 때문에. 없애버립니다. 나라는 것을 이 땅에서 지워버린다는 말이지요. 전도서 12장의 그 대목을 다시 말씀드려야 됩니까? 결국은 이렇게 하다가 주님만 공중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약속 따라서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약속은 이 땅에 없어요. 주님한테만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주님은 주님 독자적으로 약속에 준해서만 우리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우리 곁에 계시고 함께 계신 분이 우리에게 줄 때는 약속만 하는데 그 약속의 내용이 뭐냐? “너는 좀 사라져 줘. 네 자아는 사라지되 너는 나를 증거 하는 하나의 생산기계야.”

뭘 생산하느냐? 주님을 경유해서 주님입장에서 보기에 행함은 이렇고, 믿음이 이렇다, 라고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함이라는 그걸 할 사람이고, 주님은 그 행함을 믿음으로 바꿔줄 분이기 때문에 그 차이남 속에서 오직 누구만 자랑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 오직 주님만 자랑한다는 것이 에베소서 2장 9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아주 간단한 문장이에요. 누구든지 제자랑 못하게 만드는 이 절묘한 초월적작업, 이것은 내가 못하고 주께 지금도 우리에게 해주시는 겁니다.

아로나민 골드 먹는 날과 아로나민 골드 안 먹는 날이 차이가 나지요. 저는 안 먹어봐서 모르겠습니다만 광고에 보면 차이가 난대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 있고 주님 안에 있음을 느끼는 그 날과, 나에게 이익이 뭐지, 라고 생각하는 그 차이를 이 말씀이 생산되는 말씀 속에 있는 기계 같으면 우리는 매일같이 그 차이를 느끼면서 살 겁니다.

아, 이 내 자랑이 바로 행함이고 나는 노안이 되어서 “주여,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주님의 행함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지 내 인생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 할 때 그 날은 아로나민 골드 잡수신 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뭘 골라잡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요나의 표적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제는 성령 받은 저희들이 깨달아서 오직 주님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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