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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3 12:44:03 조회 : 2704         
   선물 19030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선물(에베소서 2: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jBC94S1DQmg, Hit:26
 이근호 19-03-03 13:30 
하나님의 선물

2019년 3월 3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8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두렵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내뱉은 말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진리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하늘에 이미 앉게 된 자’가 누리는 위상에 대해서 인간들의 일체의 행함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선물’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선물’이란 누가 주어지기까지는 여기에 없는 겁니다. 이는 ‘내가 노력해서 내가 발생시킨 것’이 아닌 것에 해당됩니다. 내가 원해도 요청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 입장에서는 선물을 달라고 할 처지가 아닙니다. 선물이 선물답게 되기 위해서는 선물 받아주는 사람이 새로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은 후라도 선물받은 자의 자기 소유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생하게 선물을 일방적으로 준 취지가 그 받은 내부에 살아있게 됩니다. 여기서 성도 내부에 주도권 싸움이 일어납니다. 평소에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사귀면서 발휘해 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선택과 결심이나 각오나 다짐같은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대인관계에서 있어 자기에게 손실이 오겠다 싶으면 한시라도 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물로 맺어지는 관계는 이런 인간들의 자기 결심과 선택에 의해서 계속 가리워져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선물’이라는 단어 앞에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토를 달아야 했습니다.

선물관계 위에 덮고 있는 인간 행함의 관계설정을 걷어내는 조치를 말씀하는 겁니다. 즉 누구든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신 ‘주의 이름’의 공로를 가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대규모의 전쟁이 일어나고 난 뒤, 어느 나라에 ‘무명용사의 탑’이 세워졌습니다. 개인적인 이름은 여기에 없습니다. ‘무명(無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집단의 가치를 살아 있음을 알리기 위해 그 탑을 세워준 겁니다. 인간의 행함과 각오와 선택은 모두가 개인적인 자기 이름을 위해서 행해지는 겁니다. 곧 개인구원이지요. 하지만 이 개인적 목표는, 독보적인 예수님의 개인적 이름과 충돌을 야기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4:12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설치면 설치수록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의 행함을 잊을 수가 없게 되어있고 자기 선택을 버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성과가 자기 공로로, 자기 의로움으로 그 자신 안에 내부적으로 살아있게 마련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7-48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은 벌써 자기 백성을 아십니다. 어떻게 살아도 ‘간사한 것이 없음’이 됩니다. 이는 그의 모든 선택과 결심과 행함이 본인의 우수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본인이 있기 전에 먼저 자신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또한 그 ‘없음’으로 환원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날마다 없어지는 중이요 결국 모든 게 사라지고 없을 겁니다. 이게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이 ‘없음’을 유발하신 분은 더욱더 생생하게 살아계십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이 이 악한 세상에서 은혜와 사랑과 믿음이 되도록 이 악한 세대는 대기되어 있는 중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밤늦은 여고 기숙사를 생각해보세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있고서는 밤늦도록 수다를 떨고 있는 이 상태를 ‘이미 하늘에 앉힌 상태’라고 간주해봅시다.

온갖 살아온 이야기가 다 나올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천국까지 오게되었습니까?”를 누군가 묻게 되면 하나씩 자기 생애를 말할 겁니다. 어느 살인 강도는, ‘나는 사람 열명을 죽이고 그 천국에 앉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거기에 모든 이들이 ”까르르“라고 감사의 웃음보가 터질 겁니다.

어떤 창기는 남자는 100명 상대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각종 지난날을 꺼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 저런 죄를 다 입다물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구원하려 오신 하나님을 살해한 죄일 겁니다. 그래놓고도 천국에 온 것이 너무 좋아서 다같이 “까르르”고 웃을 겁니다.

자신과 과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던 모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워줘 울음이 쏟아지지만 그 울음을 필히 큰 웃음으로, 다함께 동참하는 집단 웃음으로, 집단 감사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처럼 결국에는 집단구원으로 종결되지만 그 시작은 개인구원으로 출발해서 주님께서 인간의 행함으로 걷어내시는 조치를 취하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남은 자’만 남기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구원은 실시됩니다. 로마서 11:5-6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9:26-28에도 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세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마 16:4) 그것은 바로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고집과 집착에 푹 젖게 하시려는 겁니다. 서로 남 탓하는 그 지옥체험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피공로만, 예수님의 대표이름으로 작렬하는 선물로만 구원된 것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을 없는 존재를 위해 우리가 헛수고 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3-03 18:28 
15강-엡 2장 8절(선물)1903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주보 뒤에 나와 있지요. 선물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주신자의 의사가 그대로 유지되고 살아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선물을 받기 전에는 “고맙습니다.” 해놓고 선물을 받아놓고서 내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선물이 일종의 침투 같은 겁니다. 주의 주신 것이 받고 난 뒤에는 입 싹 씻고 이제는 내 것이라고 뒤바뀌면 안돼요.

선물은 계속 선물로서 생생하게 그 가치가 살아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물만 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의 내용은 뭐냐? 선물 받을 수없는 존재인데 이제는 선물 받는 존재로 바꿔줄게, 의 작업과 일관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천국도 선물이고, 영생도 선물이고, 몽땅 다 선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렵게 살아가는 겁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뭔가 미처 모르기 때문에 겁을 내고 있는 거예요. 이걸 이미 사도바울은, 물론 주의 뜻이지만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선물 받은 자는 벌벌 떨지 않는다는 것. 선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재벌집이라도 벌벌 떠는 것은 주께 받은 선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바뀌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면 다른 인간으로 바뀐다는 것은 뭐냐?

2장의 뒤에 죽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 내용을 앞당겨서 이야기하게 되면,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려면 뭘 동원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 행함과, 자기행동과 선택과 결심이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동원되어야 되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살아갈 때 항상 결단을 내리잖아요. 천국도 아마 그런 식으로 가는 줄 알고 있어요.

나 이제 부처 안 믿고 예수 믿을래, 한다고 해서 그것은 구원이 안 됩니다. 그것은 선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결심과 각오거든요. 그러면 그 결심과 각오가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끝나요. 개인구원에서 시작해서 개인구원으로 끝나버립니다. 울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성경어디에도 딱 집어서 ‘너’라고, “너는 구원되었어.”라고 하는 대목이 이 두꺼운 성경에서 어디에도 없어요.

“이 근호 너는 구원받았어.”라는 대목이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1차 대전 후에 독일에서 어떤 탑을 세웠는데 그 탑의 이름이 ‘무명용사의 탑’이에요. 무명용사거든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는데 이름이 없는 그 기념탑을 세운 취지가 뭐냐? 사적인 가치는 모르지만 집단적 가치는 우리 후대가 알아줘야 된다고 해서 세운 것이 무명용사의 탑이에요.

이름이 없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의 이름을 지워버립니다. 사적인 이름, 개인적인 이름을 지워버립니다. 왜 지울까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왜 우리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구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것은 모든 출발이 나의 구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경에서 개인구원은 없다고 아무리 제가 이야기해도 우리는 안 받아줍니다. 살아온 행세가 나만 챙기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어떤 인간도 개인구원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구원을 가진 그 사람을 주께서는 무명용사로 만들어버려요.

집단의 이름으로 바꿔치기 합니다. 그 대표이름이 뭐냐?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개인구원은 용납하지 않되 내 결심과 내 사랑에 의해서 건짐 받은 사람만 천국에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해당되는 안목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거예요. 너 당첨되었다고. 다시 말해서 너 선물 받았어.

너는 나에게 요청하기를, 나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께서는 그걸 거부하고 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를 구원하셨다”에 의해서 구원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구원이 복잡하냐고 물으신다면, 인간이 평소에 개인구원을 받고자 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항상 자기선택과 자기결심으로 인하여 그동안 인생을 살아왔기에 그런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 내 결심과 내 선택과 내 각오로서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이익이 될 경우만 당신과 관계하지 나에게 만약 손해가 온다면 언제든지 이 관계를 철회하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지 철회될 수가 있어요. 나 좋으라고 사랑했기 때문에. 귀찮아지고 부담이 된다면 “우리 그만 만납시다.”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뭐냐? 다른 사람과 대인관계를 할 때는 내 선택과 각오로 붙잡는 식으로 사람들을 상대했듯이 이 버릇, 심보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대할 때도 그걸 적용시켜요.

나 예수님 좋아요, 하나님 좋아요, 나 예수 믿고 천당 갈래요, 하고 붙들지만 그 붙드는 선택과 결심은 나에게서 나온 겁니다. 이것은 선물이 아니에요. 뭔가 나에게 이익이 된다 싶은 거예요. 평소의 대인관계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토를 붙여요.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는 토를 왜 이렇게 의도적으로 붙이느냐 하면, 걷어내라는 말이지요. 대인관계에 있어서 뭔가 덮여 있는데 그것을 걷어낼 때 ‘아, 내가 그 때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 다녀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요소가 뜯겨져 나가야 돼요. 이걸 걷어내야 돼요.

걷어낼 때 나에게서가 아니라 주께서 이미 설정한 가교, 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서 주께만 영광을 돌리고 공로를 돌리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열심히 하세요.”라고 자꾸 명령을 하고 목사가 지시를 해버리면 무엇이 가려지느냐 하면, 누구 지시대로 명령대로 하다 보니 하나님의 주신 선물위에 삼겹살의 비계 끼듯이 두껍게 덮여 있는 거예요.

여러분, 눈 올 때 천국같이 보이지요. 하지만 녹으면 엉망진창이잖아요. 인간은 평생을 조작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 다 조작이고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천당, 죽어서 좋은 곳은 가고 싶고, 뭔가 내 쪽에서 해야 될 것 같고, 그래서 이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덤벼든 거예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선, 거룩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행하기 전에 이미 날라 다닌다고요. 하나님의 선과 거룩과 의라는 것은 이미 인간이 행하기 전에 있어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고, 내가 선하게 행동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비로소 그 때 선이 나오고 거룩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공무원인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제가 아주 신선한, 짜릿한 은혜를 받은 적이 있어요. 지금 승진 때인데 갑자기 티오가 많아져서 지금 승진하는 사람은 그저 잡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퇴직자가 갑자기 많다든지 유동성이 많아져서 승진티오가 내려올 때가 있어요.

승진하려고 애쓸 때는 승진이 안 되다가 갑자기 승진 시기가 된 사람에게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듯한 경우가 있는 모양이에요. 공직에서는 그런 경우들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표현에 자리가 날라 다녀서 그냥 잡기만 하면 승진이 다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행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영생이 날라 다니고 있어요. 왜 그걸 못 잡는가? 평소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꼭 내가 뭘 해서 성과를 가질 때 그게 나에게 의미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 안에 자기 잘난 맛이 담겨 있거든요.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 뭐가 날라 다녀도 잡을 마음이 없어요.

광야 같은 이 세상 살면서 참 괴롭다는 말이지요. 인생자체가 엉망진창이에요. 자기가 봐도 서글프기 짝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제공한 것은 너무나 간단한 겁니다. 놋 뱀을 만들어서 꽂아놓고 하는 말이 “쳐다보기만 해라.” 세상에 쉬워도 이렇게 쉬운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안쳐다 봤어요. 쳐다본 사람은 나았지만 안쳐다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안쳐다 봤을까요? 살아온 관성이 자기 잘났다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왔기에 ‘내가 뭐가 못나서 저 놋 뱀, 저 십자가를, 흉측한 저 작대기를 내가 왜 보느냐?’는 말이지요. 그걸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라고 하는데 안 봐요.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내가 학력이 어떻고, 경력이 어떻고, 내가 살아온 이력이 이런데, 내가 바보고 병신인가? 그걸 내가 왜 쳐다 봐?’ 사도바울도 그랬던 사람이었어요. 사도바울보고, 우리한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그런 식으로 하는데 사도바울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의로움 챙기고, 거룩 챙기는데 남에게 지기 싫은 사람이었어요. 남에게 뒤처진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의인 중 최고 의인인데 졸지에 죄인 중에 최고의 죄인이 되어버렸어요. 그것도 기쁘게 즐겨.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두렵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께서 어디까지 막가느냐 하면……, 막 나간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옳지 않지만 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데요. 이미 너희는 하늘에 앉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막나가는 거예요. 이미 하늘에 앉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에 앉혔다고 하니까 이것을 하나의 연극으로 쉽게 꾸며봤어요. 16, 17, 18세의 여고 기숙사를 상상해 보세요. 방과 후에 트레이닝이나 분홍색 잠옷 입은 기숙사 애들이 10시에 잠자리에 들라고 해도 안자잖아요.

한 방에 다 들어가서 밤새도록 이야기들 하면서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는 그 말이지요. 분홍색 잠옷 입고 침대에 걸터앉거나 의자에 죽 둘러앉아서. 이미 그들이 하늘에 앉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천국에 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저희끼리 수다를 떠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해서 천국에 왔어?” “나는 사람 죽여서 천국에 왔어.” “까르르……!” “너는 어떻게 왔는데?” “나는 창기인데 남자 한 백 명 상대했는데 구원받았어.” “까르르……!” “너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어?” “나는 병든 시어머니 방치하고 내 맘대로 살았는데 그래도 구원받았어.” “까르르……!” 너무 좋아서 막 웃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는데?” “나는 바람나서 애 둘 버리고 집 나갔는데도 구원받았어.” “까르르……!” “너는?” “나는 강도질해서 구원 받았어.” “까르르……!” 이게 하늘에 앉히심이에요. 그런데 그 중에 덩치 좀 큰 여고생이 있다가 “입 다물어! 어디서 내 앞에서 잘 난체 해.” “너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어?” “나는 하나님 죽여 버렸어. 나의 구원자를 죽여 버렸어. 그런데 구원받았어.” “까르르르……!”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죽였는데, 배신했는데 나중에 가보니 천국이에요. 이게 선물이에요. 개인구원은 없고 집단구원, 내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를 일체 묻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자기공로, 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무명용사의 기념비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이름, 내가 전투 잘했다, 내가 전쟁에 나가서 이겼다, 가 아닙니다. 우리는 패배해서 죽었다, 가 되는데 그게 이김이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교회가 10만군데 됩니다. 목사가 한 13만 명이 된다는데 나는 한 15만 명 봅시다. 그 13만이나 되는 목사가 강단에서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지금 살아있는 여러분이 죽어서 좋은데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천국보내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의 코디노릇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하면 천당 갈 수 있고, 천당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도 받아서, 죽어서는 천당이고 살아서는 복 받고 사는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요거 거의 13만 명입니다. “살아 있는 여러분이 이왕 살 것 더 잘 살아야 된다는 것, 이왕 살 것 제대로 인간대우 받으면서 인간답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뭐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게 13만 명이 하는 소리에요. 위로하고 싶은 사람을 위로해주는 하나님.

그 중에, 많이 봐줘서 그런데, 한 3, 4백 명의 목사들이 있어요. 그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믿고 우리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옳습니다.” 이게 한 3, 4백 명이에요. 복음학교부터 시작해서 좀 획기적인 소리 한다는 사람들이 한 3, 4백 명이 돼요. 유-튜브에 그런 소리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뭐냐? “예수 믿고 죽읍시다. 왜? 주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날 위해서 죽으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죽읍시다.” 이게 두 번째 부류에요. 3, 4백 명. 방금 막 신학교 졸업해서 의욕이 넘치고, 세상물정도 모르고, 이게 옳다고 외치는 사람들 포함해서 한 3, 4백 명 정도 돼요. 둘 다 복음 아닙니다.

복음은 뭐냐? 예수위해 죽겠다는 것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런 목사 있으면 제가 알아서 소개해 드립니다. 예수 믿겠다는 것, 예수 위해서 죽겠다는 것도 죄가 됩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돼요. 죄한테 주께서 뭘 원하십니까? 안 원해요. 그냥 선물로 구원했을 뿐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으면 자기행동과 선택과 결심만 나올 뿐이에요.

뭔가 고상하고, 뭔가 대단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고, 그거 속임수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죄에요. 그냥 지옥체험 하라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성경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했거든요. 기도할 때 아무리 봐도 아무도 없었어요. 자기혼자 기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말이 “나다나엘아, 내가 너 하는 것 알고 있다. 내가 보고 있다. 네가 무화과나무에서 혼자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간사한 것이 없구나.” 보세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주께서 알고 있잖아요. 우리가 뭘 더 할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몸짓이 필요합니까? 무슨 고상한 짓이 필요해요? 주께서 다 알고 있잖아요.

우리가 엉망진창 산 것 다 알고 있어요. 그걸 회개 반성한다고 해서 새 인간 되는 것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따져보게 되면 주님의 이런 사랑 모르고 자기 잘났다고 시건방지게 살아온 것이 돌아보면 참 진짜 나쁜 놈이고 울고 싶지요. 우세요. 울되 그 울음이 뭐로 바꾸어야 되느냐? 울기만 하면 안돼요. 그 울음에서 웃음으로 바뀌어야 돼요. 까르르, 바뀌어야 돼요. 그게 이미 하늘에 앉힌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 이렇게 개판으로 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나를 이미 하늘에 앉혀 줬다는 거예요. 우리가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선물이에요. 무명용사 자체가 내 작품이 아니고 주님의 작품이고, 주님의 선택이고, 주님의 결과물입니다. 우리 자체가 이미 성전 된 거예요. 잡는 것도 필요 없어요.

요한복음 1장 47절, 나다나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중에 어디 있느냐고 하지 마시고요. 알려 드리는 거예요. 그 대목에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너는 참 이스라엘이다. 이유가 뭐냐? 내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다시 말해서 네가 있음은 나를 대표로 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개인구원에 집착해 있습니다. 우리는 단체의 대표가 된다는 것, 하나하나가 이미 구원받은 하늘에 앉힌 사람의 대표가 된다는 생각을 이해 못하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천당 가고, 지옥가고, 내 결심, 내 행동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창세기 1장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창세기 1장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계시다, 입니다. 그게 믿음 아닙니까? 나 있기 전에 주님 계시지요. 내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계셨다, 가 이게 믿음이잖아요. 제가 지금 헛말 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면 우리는 뭐냐?

여기 제가 서 있어도 여기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말을 희한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젊을 때의 사진, 열아홉 살 때, 스무 살 때의 사진이 집에 있을 거예요. 그 사람 어디 갔습니까? 그 때 그 모습 갖고 있는 사람 어디 갔습니까? 그렇게 예쁘고 얼굴에 홍조가 피었던 그 사람 어디 갔어요?

지금은 화장발로 대신하지만 그 예뻤던 그 사람 어디 갔어요? 없지요. 늙수그레한 그것 말고, 예쁘고 팔팔했던 그 사람이 지금 어디 갔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없는 거예요. 나를 붙드는 것은 없는 존재를 붙드는 거예요. 생각을 조금만 더 해보세요. 우리는 없어지는 것을 붙들고 있고, 없는 것에 집착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이 자체가 망상이에요. 그 자체가 망상이라고! 내가 없어지는데 뭘, 없어지는 것을 내가 왜 붙들어요? 제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내가 배고파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는 것이 배고프다고 시그널을 보내는 거예요. ‘밥 먹어야 되겠네.’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배고픔이 나에게 밥을 쑤셔 넣는 겁니다. ‘아프네.’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아픔이 찾아온 거예요. 그러다가 우리는 사라지는 겁니다. 내 인생은.

사라지는 인간이 무슨 내 믿음이 있고 내 사랑, 내 소망, 무슨 쓸데없는 그런 것을 왜 갖고 다녀요? 다 없어지는데. 선물로 구원받아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선물로 구원받는다 하면서 반드시 토를 다는 것이 뭐냐? 없어질 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영원히 계신 주에게서 나왔다. 그게 성과고 성과자체가 바로 너 자신이라는 겁니다.

내가 착해진다고요? 말씀 지킨다고요? 말씀을 듣고 지켜야 된다고요? 안 그러면 선이 없고 하나님의 의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거룩이 없고 영생이 없습니까? 꼭 내가 설쳐야 되겠어요? 설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주신 그 가교, 다리를 삼겹살 비계로 덮는 것, 하나님의 공로를 덮는 것 밖에 안돼요.

그것 벗겨내려면 얼마나 얻어맞아야 되는지 모릅니다.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다시 할게요. 사람이 두렵다는 것은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알면 되지 않느냐? 알되 그냥 알면 안돼요. 내 목숨을 걸어도 괜찮은 것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그 말을 이어보면, 사람이 왜 두려운가?

내 목숨, 까짓 거 이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던져버릴 그런 것을 만나지를 못해서 두려운 거예요. 최종적인 것을 만나지를 못했어요. 이제부터 좀 어렵게 나갈 것이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사도바울이 하늘에 앉혔다고 이미, 진짜 누가 보면 막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확정을 지어놓고 그 다음에 무슨 단어를 끄집어냈느냐 하면, 세대라는 단어를 끄집어냈어요.

이 세대. 7절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더러운 세상이지만 이 세대가 필요한 이유가 점박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를 증거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하늘에서 던져주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구원할 것 같으면, 날 구원하면 그만이지,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 세대라는 그 바탕에서 은혜가 무엇인가를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 주셔서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 차이남, 달라짐,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섭게 살아가는지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세대를 언급할 때 여러분이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 더러운 세상이 결속된 특수한 세대가 이미 있어 왔습니다.

그게 구약의 이스라엘역사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되느냐 하면, 그 민족은 왜 망했느냐를 알아야 돼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에베소서와 그 뒤에 나오는 히브리서에서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나오고 이방인이 나오는 그 대목을 앞당겨서 약간은 언급해 드리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 잠간 해봅시다. 그냥 인간 대 인간이 뭉쳐 있는 것을 세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가 결합되면 세상이 안 되고 세대가 되어버려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세상에 살 때는 세상이지만 십자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때는 갑자기 이 세상이 세대가 되었다고요.

그 세대를 가지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해요. 그리고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에 함께 속하면서도 너희라는, 주께서 따로 챙겨놓은, 분류한 집단이 따로 있어요. 개인이 아닙니다. 집단이 따로 있습니다.

그 집단은 하나님의 선물로 인하여 자기 구원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거예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은혜인데 이 선물을 받으라고 할 때 우리는 ……, 8절에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사람들이 어디에 꽂히느냐 하면,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고 했기 때문에 이제는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여기에 꽂혀 있습니다. 누가? 13만 명의 목사들이. 원어적으로 어떻다고 하면서. 성경에 원어라는 것이 없어요. 히브리어 헬라어, 거기서 아무런 의미가 안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니까 내가 믿겠다는 거예요. 아까 예배 전에 누가 이야기했습니다만, 참 좋은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눈이 나쁘면서도 나쁜 줄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새 안경을 맞추니까 “세상이 이렇게 밝아 보여요.” 하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믿음이 믿음인줄 알고 있어요.

성경의 취지는 뭐냐? 앞에 믿음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가 뭐냐 하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선물을 받았으니 너는 안살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네가 스스로 살려고 아등바등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믿게 되면 믿어야 될 나를 또 살려야 돼요. 그러면 치매 걸리면 지옥가요. ‘예수가 누구?’ 이러면 지옥 간다니까요.

주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은 네가 믿음을 사적으로 소유하라는 말이 아니고, 집단천국에서는 기존의 네 믿음의 꼬리를 자르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과 행함, 인간의 선택과 결심은요, 처음에 보기에 마치 좋은 길로 가는 것 같지요. 하지만 나중에 그 줄이 하늘과 끊어져 있는 거예요. 한 두 시간 걸어갔는데 막다른 길이라고 하면 얼마나 허황됩니까?

우리네 인생이 똑같아요. 교회 와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길이 끊어졌어요. 어떻게 할 거예요. 자기가 좋다고 했는데 길이 끊어졌어요. 돌아보세요. 그동안 내 인생 이렇게 오기까지 그동안 하나하나 자국을 끄집어내 보세요. 그 의미는 뭐냐? 나의 결심과, 나의 고난과, 나의 선택과, 나의 힘듦과, 나의 수고와, 요령과, 지혜와, 예측력과, 나의 기술로 점철되어 있는 것들이에요.

결국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9살 때 버섯재배에 관심이 있고, 12살 때 공병 주워서 돈 벌고, 고등학교 졸업해서는 인테리어 사업하고, 그러다가 대패삽겹살 개발하고, IMF 사태 나서 17억인가 부도나서 빚 갚으려고 애쓴 것. 제가 어떤 사람의 예를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어떤 사람의 인생을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이지요.

백종원이 이야기입니다. 골목식당 백종원이. 그 이야기를 죽 보세요. 그 이야기를 분해하면 뭐냐? 나의 수고와 애씀, 그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늘나라 줄이 끊어져 있다니까요. 이게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그것은 이미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요.

인간의 선택과 인간의 결심과 고난과 고생. 고생 안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이 땅에 사연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사연들 다 있어요. 울었던 이야기, 고생했던 이야기. 하지만 끝내는 까르르 하고 웃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웃지를 못해요. 끝을 모르니까. 모르니까 두려운 거예요. 끝을 모르니까.

어떻게 살고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데 지금껏 살아온 것이 뭐냐 하면, 나쁜 짓 하면 벌 받고 착한 짓을 하면 복 받더라. 선악적인 마귀의 논리에 빠져가지고 그것만 쥐고 밧줄 올라가는 거예요. 그리고 돌아보면 어제는, 3월 2일은 없어지고. 내일 되면 3월 3일은 또 없어져요. 점점 더 쇠퇴하고 쇠약해지고. 인간자체가 허망하기 짝이 없어요.

도대체 뭘 위해 살았어요? 누굴 위해 살았습니까? 붙잡을 것이 없으니까 자기만 붙잡는 거예요. 어디가도 나의 가치, 나의 품위, 나의 명예, 집안의 전통, 가문, 자기의 건강, 그것만 지키자. 이것이 바로 악마의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대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려고 했지만 결국 망했습니다.

그 망하는 것, 그것을 보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 똑같은 꼴로 가는 거예요. 이미 그들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그 예언이 사무엘상 2장 6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2장 6절, 제가 이 말씀을 읽어드리고 여러분 보고 “믿으세요.”라고 할 거예요. 그 말을 여러분이 이제는 똑바로 알아들으세요. 이 말씀이 여기 있으니까 여러분이 “죽으세요.” 하는 말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지옥이죠,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믿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가 안 지켜도, 차라리 안 지켜서 이 말씀이 생생하게 지금 날라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지켰다고 이것이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에요. 나와 관계없이 그냥 말씀이 말씀대로 살릴 자를 살립니다. 선물 줄자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제발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 보낼 자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자 지옥 보내십니다. 왜? 내가 살아있지 않고 주님만이 영원토록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앞에서 사라지는 존재, 있다가도 없어질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결심과 각오를 믿지 마세요.

이렇게 합시다. 믿습니다, 하지 말고 안 믿습니다, 나를 안 믿습니다, 하고 정리하는 것이 제일 간편하겠네요. 그러면 성경에서 이 집단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느냐? 집단구원을 표현하는 단어가 성경 로마서 9장과 11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9장 27절에 보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반드시 망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사적인 집단을 원했기 때문에. 영원한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해야 돼요.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

여기에 집단구원의 새로운 명칭이 등장했네요. 무명용사의 이름이 있네요. 남은 자. 이 남은 자에 대해서 이사야 6장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남은 자가 갖고 있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내 식대로 했으면 잘려야 했는데 주님의 선물로 인하여 남게 되었습니다, 라는 내용을 캡슐 안에, 그러니까 고기만두 안에 속처럼 담겨 있는 거예요.

고기만두 속을 딱 깨보면 내식대로면 나는 잘려야 되는데 주의 선물로,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이렇게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를 보여주는 그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남겨진 자, 남은 자가 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머리 깨지는 이야기고요. 주의 말씀이 궁금한 사람한테는 이것은 사이다 같은 말씀이에요.

끝났네. 그것을 게임 오버라고 합니다.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습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더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과 합치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11장 4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 값에 관심이 있어요. 내 아들 예수님이 이렇게 피 흘렸다는 그 피 값이 내 구원보다 우선되는 거예요. 울산강의에서 창세기 9장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 노아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주께서 첫 번째로 준 계명이 뭐냐?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피 먹으면 죽여 버린다. 인간이 네가 생각할 때는 네가 귀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가 더 귀한 거예요. 왜? 피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에.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행함이 범접하지 못하는 그 경계선 그 바깥에 있는 거예요. 그 바깥에서 주께서 홀로 온전히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내용이 우리에게 접촉될 때는 선물로 올 때만 우리에게 접촉되는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뭐라고 합니까? 수제자라 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수제자인데 베드로가 예수님 당시에 같이 있으면 한 것이 뭐였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했어요. 계산원이 계산대에 쌓인 물건을 죽 찍어서 얼마라고 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평생 산 것 계산 다 해서 땡, 하고 나온 것을 보니까 그것이 뭐였습니까?

“나는 당신을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하고, 당신도 나를 모르는 존재로 봅시다.” 수제자 베드로의 입에서 기껏 토해낸 고백이 뭐냐 하면, 나는 당신의 존재를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미션임파서블>에 나오는 첫 번째 장면 같아요. 사명 줘놓고는, “당신이 하는 일에 대
해서 우리는 일체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아무리 자기 딴에 헌신을 다 했고, 주를 위해서 죽겠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13만 명의 목사들 중에서 대략 3, 4백 명의 목사가 하는 것처럼, “주를 위해 죽읍시다. 한국 교회 썩었습니다. 돈만 챙기고, 나쁜 교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거듭났기 때문에 이제는 주를 위해서 희생합시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그게 바로 죄에요. 그게 죄에요.

병원도 사고 나면 정전될 수 있거든요. 까치가 변압기 건드리면 사고 나지요. 그런데 병원에는 긴급한 상황을 위해서 보조발전기를 돌리지요. 아……, 우리한테는 그런 보조발전기가 있으면 안돼요. 여차하면 나의 가치를 또 다시 재생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카드, 그 카드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두려워요. 혹시 나 지옥가면 어떻게 하나, 하고 두렵다니까요.

정전 될 것 같으면 아예 까맣게 정전 되어버리세요. 어차피 우리는 사라지는 중입니다. 결국 죽어요.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의 없었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나 있었어? 없었잖아.’ 없었던 쪽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용서받은 자로, 주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부활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합니다.

그 때는 흙에 속한 아담의 형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대로, 하늘에 속한 형상대로 새롭게 창조한다고 고린도전서 15장 45절부터 죽 나와 있어요. 여러분이 세상에 대해서 아직도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아직도 세상이 지겹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빨간 스포츠카가 부럽지 않느냐고 하는데, 저는 NEVER!, 전혀 부럽지 않다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을 알려면 깊숙하게 세상 속에 사세요. 직장생활도 하시면서 그렇게 살아서, ‘나도 개판이지만 너도 어지간히 개판이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남 탓하지 마세요. 지옥에 가면 전부 남 탓해요. 천국에는 까르르, 웃기만 하면 됩니다. 그걸 찬송이라 하는데 까르르, 실컷 개판 같은 인생 이야기해놓고 까르르르, 웃으면 끝나는 거예요.

제가 또 이런 이야기하면, 그것은 교회가 먼저 앞장서서 죄를 확산시킨다, 사람이 죄를 지어놓고도 뻔뻔스럽게 정당화시킨다는 온갖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그런 말 하기 전에 세상살이 어떤가 한번 해보세요. 세상은 절박함으로 살아가고요,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세상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리고 그 절박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살면 세상은 살벌해요.

세상은 딱 두 단어입니다. 절박함과 살벌함과. 무슨 인정? 우정? 개나 줘버리세요. 사랑? 부부의 정? 아이고, 말도 안 되는……, 습관적으로 사는 것이지 뭘 기대해요? 기대가 나빠요. 기대 많이 나빠요. 이 세상에 기대나 목적 두지 마세요. 이 세상은 지옥체험을 실컷, 나중에 천당 가면 못하기 때문에, 실컷 삶의 체험, 지옥체험을 하면서 까르르르, 오늘 제목은 ‘까르르르’, 까르르르, 웃으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계속 두면서 자랑질,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을 생각 못했습니다. 한평생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자기 자랑질, 시건방지게 남에게, 주님 앞에 자기 의를 내세웠습니다. 주여, 그런 장난질에 수십 년 교회 다니면서 당했는데 이제는 그만 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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