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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3 12:48:54 조회 : 1272         
   공중 권세 잡은자 19020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공중 권세 잡은 자(에베소서 2: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61NRleovQqg, Hit:36
 이근호 19-02-03 13:36 
공중 권세 잡은 자  

2019년 2월 3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2-3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사도는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단일체제를 견줄 수 있는 세상적인 단일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단일구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종교를 버린 이유는, 이 세상이 여러 가지 변수와 복합적인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기에 단일 요소로서 설명하는 것을 미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납득이 되려면 사람을 하나의 힘으로 묶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전체주의를 싫어합니다. 독재를 싫어합니다. 누가 자기 위에 우월하게 자리잡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 가치관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세우는 것이 맞다고 훈련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배후에는 아무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은 다릅니다. 누군가 있다는 겁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공중권세 잡은’ 악마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게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고 충실히 하므로서 예수님에게 순종 안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운명이나 일생에 대해서 오로지 자기에게 충실하게 가져가는 이유는, ‘자기 의미성’ 때문입니다. 즉 나 자신이 무의미하기 싫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어 외부는 이용의 대상입니다. 그 결과가 오로지 자기에게 집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즉 나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오케이라는 겁니다.

악마라는 것도 자기에게 재앙을 내리고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재앙’이라는 것도 ‘나쁘다’는 것도 자기를 유-의미한 것으로 간주한 채 이해하고자 합니다. 사도는 이런 세상에 대해서 ‘교회’란 단일체‘를 내세웁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여기에 등장하는 교회는 ‘세상 마지막’이 되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겁니다. 즉 이런 교회의 등장으로 인하여 세상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음이 확정되는 겁니다. 이런 교회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필히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에 속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 현상을 보다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 왜 굳이 ‘마지막’이 되어야 하는지가 필요합니다. 사도는 ‘공중권세 잡은 자’ 아래의 단일체제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일종에 찜통이요 압력 밥솥입니다. 자력으로 이 권세 아래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원인조차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정신 때문입니다.

선악과 나무가 있던 시절로 돌아가봅시다. 아담은 하와는 선악과 나무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과연 인간이 자기를 자책할 근거가 될까요? 악마는 자력갱신을 부르짖게 됩니다. 그딴 선악과나무이 실린 의미를 버리고 네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데 의미를 두라고 부축입니다.

졸지에 인간 자체가 유-의미가 된 겁니다. 신처럼 행세하고 싶은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 기대를 실어보고 싶어합니다. 내가 없으면 신도 가족도 세상에 의미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심어놓으신 이유는 인간을 탓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수님을 위한 기획이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이라는 개념이 예수님 중심의 통일에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천국이나 사랑은 ‘마지막’이라는 환경조성 안에서 나옵니다. 그 사실은 구약 욥기에 나옵니다. 1:9에 보면, “악마가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반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안다는 겁니다. ‘까닭없이 하나님 믿는 자’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어떤 이익과 효용성을 얻어 자기에게로 가져오기 위해 하나님 믿는다고 악마가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즉 악마가 이미 모든 인간을 자체적으로 의미있게 살게 만들어 놓은 것에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하고 내기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욥을 시험토록 합니다. 그가 가진 것과 그의 건강을 빼앗가도록 합니다. 나중에는 목숨을 잃게 될 징후를 나타내게 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제대로 순종하는데 있는 마지막 장벽은 바로 ‘자아’입니다. 이 속에서 ‘나로서의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목숨을 뺏는 대신 욥의 자아로부터 죄가 나오게 활용하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에게 유-의미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중심주의를 위하여 욥을 멋지게 활용하신 겁니다. 욥의 존재 의미란 예수님의 통일성에 복속되어 정해지는 겁니다. 욥의 단독적인 의미란 없습니다.

이 욥의 경우가 신약에 와서 그대로 예수님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중 권세잡은 악마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식은 ‘저주’받은 겁니다.

타고난 죄 때문에 저주만이 우리 자신에게 합당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즉 우리는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악마가 싫어하는 주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그동안 인간은 악마의 사주를 받은대로 자기 자신을 의미있는 존재로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볼 때, 그것이 바로 주님에 대한 불순종이었던 겁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를 훼방질하는 악마의 일이었던 겁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계획대로 움직여지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반발은 곧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내 존재가 가리는 겁니다. 천국은 지옥이 구성되고 난 뒤 현장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사랑도 저주가 형성되고 난 뒤에 나옵니다.

내가 배고파 죽는 것이 최종적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종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주의마저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활용하시는 주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일이 완성됨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2-04 07:01 
12강-엡 2장 2(공중에 권세 잡은 자)1902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2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세상모두를 싸잡아서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있다고 하는 이러한 것을 알려주는 일이 사도만의 일이겠습니까? 사도만 관심가지고 세상을 그렇게 봐야 하는 겁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안 봐도 되는 겁니까? 천국 가려면 성령을 받아야 되는데 소위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사도하고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사도가 내뱉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한꺼번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풍습을 좆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말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따로 있는데 그는 따로 놀고 우리도 따로 논다는 말이 아니고 여기에 따랐다는 말이 나오는데 철저하게 종속되어서, 복속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도는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우리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통합해서 보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단일구조로 보지를 않아요.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고 있으며 한 가지 원인이 아니고 갖가지 원인이 있으며 이 세상을 설명하는 방법은 다양하다고 보는 겁니다. 복합적인 요인들이 뭉쳐서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학교에서 그렇게 배운 거예요.

만약에 세상을 하나로만 움직인다고 본다면 그것은 전체주의라는 겁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악랄한 짓을 했다고 보는 그 전체주의, 그 전체주의가 종교의 이름이든, 이슬람의 이름이든, 기독교의 이름이든 그 전체주의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깬다는 겁니다. 이제는 민주주의기 때문에 그 전체주의에서 해방을 선언했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을 설명할 때 하나의 이유가지고 설명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우리는 교육받았어요.

그게 두자로 하면 인권입니다.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거예요. 조선시대 때 무슨 인권이 있고 고려 때 무슨 인권이 있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인권 주장했는지 모르겠어요. 인권 말입니까? 돈 없는 인간도 인권이 있어요? 자꾸 뭔가 속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중요하다? 기가차서 말이 안 나오는데 하나님이 중요하다고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 생각하고 살았습니까? 돈 보고 살았지요. 하나님이 밥 먹여줍니까? 교회가 밥 먹여줘요? 예수가 밥 먹여주던가요? 우리가 아는 세상은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것은 이론에 지나지 않아요. 실제로는 성경하고는 우리가 아무 상관도 없고 평생을 살면서 몸소 체험하는 것은 뭐냐? 돈 없으면 사람취급 못 받는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살아요.

결국 사람들이 교회 온다는 것은 돈 떨어져서 오는 거예요. 돈 더 채워달라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공중권세 잡은 자, 이걸 악마라 하는데 우리는 악마걱정하지 않습니다. 악마보다 돈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지요. 악마 같은 것은 옛날 신화나 영화에나 나오는 거고요. 악마가 우리에게 재앙을 주고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리 들으면 우리는 코웃음 치지요. 지금의 내 인생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은 나의 의지와 나의 결심이고 결단이고 나의 양심이고 나의 지식입니다. 언제 악마 눈치보고 살아가지 않았어요. 재앙이라는 것을 대비하는 방법은 19세기 들어와서 보험사업이 발달하면서 각종보험들, 알리앙츠니 이런 것들이 우리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거예요. 치과 보험, 건강보험. 우리는 대비 다 해놓았습니다. 악마 없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대비를 다 해놓았어요.


옛날에 사도바울이 살 당시는 마귀가 무섭고 하나님이 두렵고 했겠지요. 그런데 17세기에 서양에서 주체의식이 등장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상을 해석하고 읽는 방식이, 패러다임이 달라졌습니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 에너지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나에게 유용한 에너지와 나에게 유용하지 않은 에너지가 있는 겁니다. 그걸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에서 끄집어낸 에너지를 효율성 있게 돌리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경제라고 하는 거예요. 과학과 경제 두 가지만 있으면 다 되는 거예요. 번개가 친다. 요한계시록을 봤던 옛날사람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봤어요. 그러나 지금은, 번개는 구름 내에 양전저와 음전자가 충돌하는 것을 번개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설명이 돼요. 지진이라는 것은 맨틀이 지각을 쳐서 지각이 움직이는 것이 지진이에요. 자석이라 하는 것은 지구에 내핵과 외핵이 있는데 물렁물렁한 액체로 되어 있는 외핵과 단단한 내핵의 물체의 분자들의 질서의 배열에 의해서 자기장이 있어가지고 태양력도 막는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거예요.

전기란 무엇인가? 전기란 원자핵이 플러스전자가 있고 마이너스 전자가 있는데 그것이 균형이 안 맞아서 제 맘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있는데 그게 자유전자인데 그것이 전기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설명이 돼요. 무슨 불순종? 우리는 불순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는 나에게 순종하니까. 나는 나에게만 순종하면 돼요.

나 잘되기 위해서 순종하면 그만이지 여기서 말하는 불순종이라는 것은 성립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나한테 충실한 것이 나에 대한 순종이에요. 도대체 사도바울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지금 이 시대에는 이해가 안돼요. 성경말씀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공중권세 잡은 자가 어디 있어요? 그런 괴물도 없을뿐더러 뭘 따랐다는데 우리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요. 누구한테 말을 안 들어요. 참조로 할 뿐이지요. 우리는 제대로 우리 자신을 봐야 돼요. 그런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말은 뭐냐? 너희들은 완전히 단일구조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단일구조를 다른 말로 하면 찜통, 혹은 압력밥솥. 또는 지하 감옥, 영화 <포트리스>에서처럼 못 빠져나오는 곳.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뭐냐? 이 거대한 우주를, 지구를 거대한 찜통으로 보는 거예요. 압력밥솥으로 보는 거예요.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사고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우리하고 전혀 맞지를 않아요.

현대인의 사고에서 유용한 에너지를 끄집어내서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무의미가 아니고 유의미라 하거든요.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데 그 의미라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따져서 뭐냐 하면, 유용한 에너지를 얼마나 활용할 것인가, 그것만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 조카가 한국에너지기술원에 있는데 뭘 연구하느냐 하면, 풍력발전소와 인공지능을 연결시켜요. 풍력발전소에 인공지능을 연계시켜버리면 풍력발전소의 부속품을 언제 갈아야 될지, 바람개비날개의 회전속도를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성 있는 에너지를 끄집어내느냐? 옛날에는 인공적으로 했는데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맡기는 겁니다.

만약에 내 조카가 인공지능에 대해서 모른다고 한다면 내 조카는 그 직장에서 나가야 돼요.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유용한 에너지를 계속해서 발휘하는데 아무 보탬이 안 되니까. 그 유용한 에너지를 수치로 집약한 것을 가지고 돈이라 하거든요. 돈을 내 조카에게 회사에서 지불할 이유가 없어요. 유용한 에너지가 계속 안 나오는데 왜 돈을 줍니까?

그걸 노동환경의 변화라고 하는데 아무리 가진 기술이 있다 할지라도 유용한 에너지를 계속 생산하지 못하면 회사에서는 그 사람에게 돈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노동환경이 바뀌었어요. ‘플랫폼’ 나오지요. ‘블록체인’ 나오지요. ‘IOT’ 나오지요. 그 다음에 ‘클라우드’, ‘빅데이터’ 이야기 나오지요. ‘웨어러블’ 기기 이야기 나오지요. ‘3D 프린터’, ‘sns’, ‘딥런닝’, 이런 이야기가 자꾸 쏟아져 나오는데 이런 인공지능 못 다루거든 알아서 사표 내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유용한 에너지, 영양분 같은 것이 나에게 오려면 교환수단인 돈이 와야 돼요. 에너지를 수치화시킨 것이 돈이거든요. 그 돈이 와야 되는데 돈 벌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나가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만 보니 사도바울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우리한테 순종하고 싶은데 먼저 나에게 순종하기 전에 이 시대의 변화에 순종한다는 조건하에 그 다음차례에 나는 나에게 순종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다는 조건이 성립되는 겁니다. 플랫폼이라 하는 것은 19세기 기차역을 이야기하거든요. 요새 와서 그 기차역, 플랫폼이 왜 등장하는 거예요?

회사에서 사업을 할 때 ‘플랫폼’으로 한다는 거예요. ‘스타트업.’ 새로운 기술을 새로 시작한다고 하는 것. 플랫폼이라는 것은 광장을 의미하거든요. 만남의 광장. 인터넷사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것. ‘빅데이터’라 하는 것은 정보의 큰 창고를 말합니다. ‘클라우드’란 모여드는 구름. 구글이라는 회사에서 만드는 정보의 바다를 클라우드라 한다는 말이지요.

IOT라 하는 것은 사물인터넷. ‘웨어러블’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부착할 수 있는 인터넷. 증강현실, 가상현실. 세상을 전부 하나로 단일화시키자. 단일화시키고 그 단일화를 지능화시키자. 편리하게 만들자. 이런 기치 하에 세상의 노동환경이 바뀌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도 마찬가지에요.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인간의 몸에 해롭다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우리 두뇌에 사이토카인이라는 염증물질을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이토카인이 우리에게 마귀입니까? 그게 악마에요? 인간은 자기한테 해가 되면 악마고요,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천사에요. 그 모든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유의미, 의미를 제공했기에 벌어진 상황이라고 보는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를 만나는데 성령께서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다. 어떤 조치를 취했느냐 하면 40일 동안 굶게 했어요. 성령께서 40일 동안 예수님을 굶게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자기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고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몰라요.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모르면서도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등 따숩고 배부르면 최고라는 겁니다.

여러분, 가만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이 뭡니까? 등 따숩고 배부르고, 몸 건강하고 기침 안하고. 그래서 좋은데 구경 돌아다니고 맛있는 것 먹으로 찾아다니고. 세상세상, 그것보다 더 좋은 세상 어디 있어요? 등 따숩고 배부르고. 북한 사람들은 하얀 쌀밥에 국밥 먹겠다는 거예요. 국밥은 저 경산 지산에 가면 파는 곳이 있어요. 요새 7천 원 하는지. 값도 막 올라요.

등 따숩고 배부르고, 기침 안하고, 천식 없이 건강한 몸으로 차 몰고 재미있게 놀고 오고. 그러면 사람 사는 재미, 행복, 더 뭐가 필요해요? 몸 건강하지, 돈 있지, 먹을 것 다 먹지, 문제는 그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이 망가진다는 이 모순이 문제에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몸이 다 망가진다는 거예요. 노세 노세, 젊어서 노는 것은 좋아요.

늙으면 놀러가는 것도 재미가 없어요. 젊어서 노는 것이 재미있는 것은 맞는데 그것은 돈이 있을 경우에, 재벌 3세로 태어났을 경우고 실제로는 돈 벌어서 늙어서 좋은데 가려니 이 몸이 다 늙어서 가도 힘들어죽겠어요. 돈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내 건강과 내 모든 것, 돈이라는 에너지를 위해서는 내 에너지를 다 낭비해야 되고 다 내놓아야 된다는 이 모순점을 어떻게 할 거예요?

광야에서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면, 40일 굶게 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등 따숩고 배부른 것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는 악마한테 그런 식으로 배웠다는 거예요. 등 따숩고, 배부르고, 놀러 다니고, 재미있는 것 보고, 맛있는 것 먹고. 그것이 인간의 최종점이라고 봤다면 그것보다 더 넘어 진정한 인간의 최종성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말씀에 의미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인간존재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렇게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만든 이유는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게 함으로서 인간이 독자적으로 네가 의미 있는 것으로 제공했기에 그렇습니다.

저 꽃이 있다. 꽃이 있더라도 내가 그 꽃을 꽃이라고 이름 지어서 나에게 왔을 때 그 꽃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본 거예요. 김춘수에 의하면. 따라서 아까 한 그 과학의 모든 이야기가 뭐가 빠졌느냐 하면, 인격성이 빠져 있어요.

문제는 악마는 이 세상 모든 우주에 자기인격성을 도배를 해버린 거예요. 이 우주의 모든 변화는 나에게 이익을 줄 때만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꽃을 보고 그 이름을 불러서 나에게 올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별이라고 할 때는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내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다시 말해서 나에게 소속이 될 때, 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순종이 되고 나에게 복종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 인간의 의미가 곧 악마의 다면체, 악마의 모델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악마의 작은 인형인데요. 왜? 우리는 더 이상 순종할 필요 없거든요. 왜? 나는 나에게 순종하면 그만이니까. 나에게 순종하면 되고 나머지가 나 외의 모든 것은 이용가치가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 예수님, 삼위일체, 전부 다 내 유익을 위해서 믿어줄게요. 순종해줄게요. 내가 드릴게요.” 이 말은 하나님을 나의 시다바리로 여기는 겁니다.

그게 교회 아닙니까? 여기 에베소서 1장 끝에 보면 교회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교회의 연속성으로 2장이 넘어온 거예요. 교회는 뭐냐? 장터다. 무슨 장터? 욕망의 장터다. 목사는 뭐냐? 잡상인들이고. 교회 와서 사람들이 주고받고 교환하는 것은 자기 자랑거리를 주고받는 거예요. 나 이렇게 하나님에게 유용한 에너지를 얻었다고.

진정한 교회는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진정한 교회는 두 가지의 단절이 있다 했지요.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까? 참된 교회는 마지막 때 성령의 공동체라 했지요. 마지막 때가 되지 않으면 교회가 안 나타나요. 마지막 때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왜 마지막 때인지 알고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뭐냐? 모든 의미가 싹 쓸려 내려가는 거예요.

브라질 댐 터지듯이 완전히 다 쓸려 내려가는 겁니다. 저는 전에 설교할 때 그것을 무채색이라 했지요. 아무리 다양한 색깔을 뽐내도 싹쓸이 해버리면 검은색 되어버려요. 모든 시체가 다 검은 색이잖아요. 모든 뼈는 다 하얀 백골이고요. 이게 원래 우리 모습이잖아요. 흙으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거기다가 페인트칠하고 색 입혀봐야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주하게 그거 쫓아가고 있어요. 아직도 살아 있다고 여기는 순간, 아직도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을 나와 동일시하잖아요. “그런데 그 의미를 내가 알아서 다 없애줄게.”라는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때에 비로소 남은 자, 그걸 ‘레멘트’라 하는데 그 ‘남은자’를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끝에 가서 안다 그 말이지요. 사람이 교회를 만들겠다는 것조차 자기가 만드는 교회,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에게 자기 자신의 의미를 안 놓치려고 발악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를 쉽게 하면 인간은 나에게 늘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그 말입니다. 그 순종으로 인하여 불순종이 가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 순종이 악마에게 순종이고 악마는 자체가 하나님에게 불순종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불순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인생, 자기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충실했는데 그게 불순종이라고 사도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네가 왜 마지막을 모르고, 네가 왜 성령을 모르고, 네 육만 알고 있느냐는 그런 뜻이에요.

교회라는 것은 성령의 공동체에요.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성령께서는 십자가지고 나서 오시는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의미가 상실됐거든요. 내가 의미가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져야 교회가 돼요. 그런 교회 가면 “주여,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라고 반문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내가 구원받는데 뭘 하면 천당 보내줍니까, 라는 이런 소리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왜 가만있고 멀쩡한 나를 천국 보내주십니까? 지옥가도 마땅한데.”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의미 없는 나에게 왜 주께서는 성령으로 예수님의 의미를 부여하십니까, 그런 뜻이에요.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한다는 그 의미에 왜 나를 합세시키고 끼워주십니까, 라는 고백.

나는 내 잘난 맛에, 내가 행복한 맛에 살고 싶었는데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고 너희가 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통일과 관련되어 있느니라, 하는 새로운 의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이지요.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의미를 왜 우리에게 부여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의미를 부여받을만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라는 고백이 나와야 그것이 교회에요.

1장 22절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복종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자를 죽여 버리는 경우뿐입니다. 압력밥솥, 이 찜통에서 악마의 권세에서 어떻게 벗어납니까?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누가 뭐래도 나만 챙기고, 나만 의미 있고, 나만 가치 있으면 그만이라는 이 고집스러움에서 내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나는 악마도 안 믿고, 예수도 안 믿고, 종교도 없습니다. 하여튼 내게 중요한 것은 나는 나에게 충실합니다, 라는 이 고집으로 나는 한평생 그대로 살 거예요. 앞으로도! 그러면 무슨 수로 내가 천국을 가느냐는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유의미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지난 시간에 했듯이 초기조건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겁니다.

선악과 있을 때에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다 했을 때 우리는 그 선악과 따먹었다고 아주 호들갑을 떨어요. ‘큰일 났다. 우리는 죽었다.’ 하지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으니까. “그 못된 악마에 속아서 우리가 따먹었다니. 악마의 그 말을 듣지를 말지. 우리 조상 아담아, 하와야!”

그리고 또 여자를 탓하네요. “여자가 먼저 따먹었잖아. 여자가 좀 조심하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심이 좀 살아나더라도 좀 참지.” 하는데 언제까지 참을 건데요? 몇 년 참으면 이길 수 있습니까? 못 이겨요. 못 이깁니다. 그걸 충동이라 해요. 인간의 이성은 참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충동은 참을 수 없는 거예요.

사랑은 충동이고 미움도 충동이거든요. 미운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냥 밉다는데. 인간은 우리 자신을 좀 알아야 돼요. 내가 누굴 좋아하고 내가 누굴 미워하는 그것은 충동입니다. 이 충동을 감추기 위해서 뒤에 구차한 변명들을 대지만. 네가 이렇게 생겨서 밉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그냥 딱 보면 알아요. 딱 보면 안다고요. 딱 보면, 나는 저거 밉다. 이유 없음. 딱 보면 나는 너 좋아. 왜? 좋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없기에 사랑에 병이 나는 거예요. 그리고 미움도 병이 나는 겁니다. 미워서 못살 때는 갈라서야 되지요 뭐. 내가 병이 나서 죽을 판인데요. 좋아서 죽고 못 살거든 이것은 나이 차가 스무 살이 나든 상관없어요. 그냥 결혼해야지요. 좋다는데 어떡해요, 좋다는데.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 할지라도 지금 사과나무는 심어야 될 것 아닙니까?

선악과를 심어놓은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이 선악과 심어놓고 죽게 하는 것은 너의 책임도 아니고 너를 탓할 문제도 아니고 이것은 예수님의 기획이에요. 세상 모든 것, 선악과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장치를, 시스템을 그렇게 가동시킨 겁니다.

제발 자기 탓하지 마세요. 인생에 대해서. 내가 못나서 인생 이렇게 꼴아 박았다고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예수님의 기획이에요. 예수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자꾸 내 탓을 하니까. 천주교처럼 차 뒤에다 “내 탓이오.” 그렇게 하니까 계속해서 악마의 하수인이 되는 거예요. ‘이번에 애 성적 내려간 것은 내가 철야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 예수를 열심히 안 믿어서 그렇다.’ 이런 식으로 자기 탓 하지 마세요.

내 남편 교회 안 나가는 것도 내 탓이고, 내 아내 교회 안 나가는 것도 내 탓이고, 내 자식 교회 안 나가는 것도 내 탓이고, 그런 식으로 자기를 질책하지 마세요. 그게 악마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우리 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죽어도 그만이고 안 죽어도 그만이에요. 지금 여러분, 신앙생활 몇 년 했습니까? 수십 년 하셨어요?

왜 이 사실을 모릅니까? 수십 년 교회 다녀도. 그만큼 악마에게 농락당한 거예요.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악마한테 농락당하는지 누누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기 1장 9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인간은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천사하고 천사회의를 하는데 사탄이 거기에 앉았어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일부러 욥을 자랑했어요. 이 세상에 욥같이 믿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악마가 도저히 참지 못했지요. 왜냐하면 악마는 세상을 현재 찜통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기 때문에 욥을 지칭하는 것이 악마인 자기를 지칭하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악마가 자기성질을 못 이기고 탁 튀어나옵니다. 9절에 보면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아, 정말 이건 복음 아닙니까? “교회 나올 때 이득을 얻으려고 교회 나오는 인간들 밖에 없습니다.”라고 악마가 선언한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을 때 다 챙길 것 챙기고 싶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30배, 60배, 백배 챙기려고 봉사하는 것이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 한계에서 벗어날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장담합니다.” 이게 악마의 선언이에요.

까닭 없이 인간은 하나님을 안 섬기게 되어 있어요. 어떤 결과를 내다보고 하는 거예요. 나에게 유리하도록, 내 생존에 유리하도록, 내가 돈 버는데 유리하도록. 1939년 11월 1일을 기해서 나찌정부가 유대인들에게 이런 선언을 했어요. “이제부터 12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들은 왼쪽에 완장을 찬다. 하얀 바탕에 파란별을 새겨서 완장을 만드는데 별의 두께는 8센티, 그리고 윤곽선은 1센티로 해서 차고 다녀라.”

누가 유대인인지 누가 유대인이 아닌지를 알도록.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안하면 그만이잖아요. 나찌정부가 유대인들을 학대하기 위해서 표시를 하라는 거예요. 왼쪽에 완장을 차라는 거지요. 그러면 안하면 되잖아요. 숨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고분고분 다 완장 찹니다. 그 다음부터 나찌정부는 행정을 하기가 쉬워요. 완장 찬 사람들만 다 데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다 집어넣어서 학살하면 되거든요.

6백만 죽였다는데 사실은 더 죽였어요. 이게 전체주의라 해서 역사 속에서 인류의 오점이라고 보거든요. 후대역사가는 그것이 인류의 오점이라 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살아요. 그 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이 완장을 찰 때 그걸 무시하고 안하면 되잖아요.

목사가 “여러분, 이렇게 하세요.” 하고 봉투 돌리면서 “부활절에는 부활절 헌금하시고 명절에는 명절 헌금하세요. 또 선교헌금을 통해서 이웃사랑돌보기에 참여하세요.”라고 할 때 교인들이 안하면 되잖아요. 왜 돈 주고 욕하고 왜 그래요? 그걸 안하면 되잖아요. 안하려면 어떤 조건하에 안해야 되느냐 하면, 나는 하든지 안하든지 의미 없다고 했을 때는 그 사람은 안하게 돼요.

왜? 하나 안하나 나는 죽을 건데요 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요. 내가 교회 온 것은 내가 왜 죽지요, 그 이유 때문에 왔지 이익 보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목사님께서 특별히 여러분에게 헌금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도난 사업이 회복되고 애가 공부를 잘하게 됩니다.” 할 때 ‘야, 순종하니까, 믿음 있으니까 이런 복을 받는구나.’ 하고 전부 왁 따라가는 거예요.

결국 악마가 하는 일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기획이니 예수님에게만 의미 있어야 될 그것에다 뭘 앞장세우느냐 하면, 인간 너도 뭔가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계속 도배를 하게 만드는 일을 줄곧 악마가 계속 해 온 거예요. 그것이 나의 의미로 다가온 겁니다.

그 압력솥에서 누가 벗어나요? 아무도 못 벗어난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욥기 1장에 보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악마가 지금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마가 지금 우리 앞에서, 바로 요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다고요. “너희들 이유 없이, 이익 안 보려고 교회 온 것 아니잖아. 죽어서 천당 가려고 왔잖아.”라고 악마가 큰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꿈쩍도 못하고 예, 예, 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한테 대들면 저주받습니다.” 그 말에 왜 사람들이 넘어갑니까? 왜 속임수에 넘어갑니까? 이것은 목사 탓이 아니고 자기한테 아직도 나는 내 의미를 놓치기 싫다는 거예요. 우주가 내 중심이라는 겁니다. 언제까지 속을 거예요? 이 욕망의 장터에서. 3대째 목사가정이고, 3대째 유아세례를 받았고. 그게 뭐라고 되어 있느냐? 오늘 본문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라는 거예요.

세상 풍속을 좇고. 이거 파헤치면 뭐 나오느냐 하면, 인류종교학 나와요. 종교학의 기본은 뭐냐? 조상숭배에요. 이제 며칠 있으면 설날 아닙니까? 여러분,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말하고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 말한다고 해서 말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이 달라요. 모든 종교는 자기집안을 위한 종교입니다. 우리 가문을 위한 종교에요. 내 집구석 잘되기 위한 종교입니다. 손해 안 보려고 해요. 재앙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사랑 없어요. 내 사랑 뿐이에요.

까닭 있어서 하나님 믿어요. 그런데 욥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악마가 웃습니다. “아이고, 욥? 욥이 그렇다고요?” 하나님이 “내기할까?” 갑자기 욥기가 내기 판이 되고 말았어요. “내기할까?” “콜!” 이래가지고 욥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가 내기의 대상이 되고 말았어요.

악마 쪽은 “욥은 몸 건강하고, 자식 잘되고, 돈 많기에 하나님 믿는다.” 왜 그러냐 하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은 그만큼 내가 믿음이 좋아서, 신앙생활 잘해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훌륭하기에 이런 결과가 마땅히 주어졌기에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정의로운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악마는 그렇게 염두에 둔 거예요.

열 명의 자식 한꺼번에 죽고, 재산 다 날리고, 하인들 다 날라 갔습니다. 하나님은 악마에게 그걸 허용을 했어요. 왜? 인간의 원형, 하나님은 욥을 통해서 악마를 이용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껍질을 벗겨버려서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인간의 원판이라는 사실. 어차피 없는데서 없는 데로 가요. 조금 있으면 나중에 죽으면 없어집니다.

없는데서 없는 대로 가는 것, 그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아계심, 그리스도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을 드러내면 끝나는 문제에요. 하나님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이 없어요. 욥은 말합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어가는 것도 하나님이다. 욥이 이야기 한 그대로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허락합니다. 이제는 네 것, 네 목숨까지도 내가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들어버려요.

욥은 마지막 남은 저항, 저항요소, 그 나라는 것……, 왜냐하면 나가 없어지면 내 믿음도 없어지거든요. 내 하나님도 없어지고 마지막은 내가 있어줘야 내 하나님이고, 내가 있어줘야 내 믿음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 믿음가지고 천당 가겠다는 것이 보장이 되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에 구멍을 내버리지요.

그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나를 저주받은 나, 의인이 아닌 죄가 솟구쳐 올라오는 구멍으로서의 나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죄가 생산되는 장소로서의 나,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의 인간의 유일한 의미 있는 자리입니다. 압력솥 같고 찜통 같은데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주님께서 몸소 시범해 보였습니다.

시범으로 보인 것이 마태복음 16장 47절에 나옵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아, 이스라엘 제가 가기 전에 이 말씀과, 이스라엘의 그 현장에 있으면서 보는 이 말씀이 조금은 달랐습니다.

예수님 시체가 뉘였던 그 돌 판이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던 그 현장에서 하셨던 말씀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되어 있어요. 저주받는 거예요. 내 의미를 가진 것 자체가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시범조로 먼저 보이신 겁니다. 내가 죄 때문에, 이 죄 있음 때문에 내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 때 주님은 이 찜통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에서 벗어난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사랑은 시작됩니다. 사랑은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저주가 마땅함의 그 현장에서 비로소 그 때 처음 나타나는 것이 사랑이에요.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옥 와 있다고 치고 지옥에 왔을 때 비로소 그 때 유의미, 의미 있는 것은 뭐냐? 천국이에요.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통일된 나라에요.

지옥이라는 평토장이 먼저 이루어져야 돼요. 그 지옥과 저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악마에서 순종하도록 만들었어요. 이게 오늘 성경해석의 역전입니다. 불순종이 당연한 거예요. 내가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마워요.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나에게 독하게 살아가는 것,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것, 하나님 믿더라도 까닭이 있어서, 까닭을 다 챙기면서 믿게 되는 것,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해야 돼요.

비로소 그 때에 십자가가 유의미하니까. 십자가가 비로소 나에게 유의미하니까. 나의 유의미가 날라 가버리니까 그 현장에 완전히 피부가 다 벗겨지고 내장이 나올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의미해요. 그렇지 않고 내가 의미 있으면요, 나의 건강이 중요하고, 배부르고, 등 따숩고, 놀러가고, 돈 벌고, 자랑질 하고, 이 의미에 주님의 십자가의미가 시답지 않은 것으로 다 처리되잖아요.

십자가 찾으려고 교회 오지 않잖아요. 남에게 자랑거리 좀 만들려고 오잖아요. 자식 자랑하고, 자기자랑하고. 때로는 겸손했다고요? 겸손은 자랑거리 아니에요? 겸손도 자랑거리에요. 자기낮춤도 자랑거리에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주께서 부탁한 것이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십자가를 지라.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십자가 지기 전에.

십자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너의 의미가 없고 십자가에만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만 나는 너를 활용할 것이고 이것이 나의 기획, 예수님의 프로젝트라는 겁니다. 너희는 거기에 말려들었고. 제자들은 배신해야 했고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했어요. 그게 후회스럽습니까? 우리 인생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막 산 것을 후회하십니까?

후회한다는 그 자체가 뭔가 은근히 나름대로의 의미를 얻으려고 하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주님, 저에게 뭘 했어요? 무슨 짓을 하셨어요? 주님 계획은 뭡니까?” 그것 알기 위해서 와야 돼요. “너 때문에 내가 고생 많이 했다.”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만 찰랑찰랑 있어야 돼요.

끝으로 말씀 드릴 것은 불순종과 순종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마태복음을 통해서 정리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7절에 보면 순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갈릴리바다. 벌써 또 기억납니다. 갈릴리바다. 제가 동영상 올려놨잖아요. 그 갈릴리 바다를 배타고 가는데 풍랑이 일었어요. 갑자기 심히 풍랑이 일었을 때 제자들이 자기 의미를 챙기기 위해서, 이제는 의미를 알았으니까 내 의미가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마치 우리 일상 같아요. 배 위에서, 내가 죽으면 안돼요. 남 죽는 것은 괜찮은데 내가 죽으면 안돼요. 내가 죽으면 안 된다고 갖은 노력을 다 할 때에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럴 때 제자들이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자기들이 죽게 되었으니까 자기 의미를 계속 유지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해서, 까닭이 있어서, 까닭이 있어서 주님을 깨웁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제일먼저 지적한 것은 바다보고 지적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보고 지적했어요. “네가 믿음이 없구나.” 다시 말해서 “네가 지금 이 상황을 순종하지 않는구나.”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지금 악마에게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구나.” 그리고 난 뒤에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바람과 바다보다 더 못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순종하는 것. 주께서 쓰실 때만 쓰이면 그만이잖아요. 내가 까닭 있어서 주를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살아가는 이 엉터리 같은 인생, 나밖에 모르는 이 극단의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조차도 주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사용하시고 주께 영광 돌리고 십자가 드러내면 나름대로 유의미한 거예요.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지금 뭘 부추기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하던 대로 사시라 그 말입니다. 잘하는 것 있잖아요. 자기밖에 모르는 것. 그대로 사시라 그 말입니다. 그렇게 살면 천당 갑니까? 그것은 제 소관 아니지요. 어쨌든 그것조차도 십자가의 유의미에 의해서 빼놓지 않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 주님은 만물위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지난번에 이야기했지요. 백부장이 순종을 해요. 그런데 이 백부장은 언약이 없는 이방인, 개 같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 앞에 자기 의미가 없어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네가 네 인생 어떻게 계획 잡고 하는 것이 없냐?” 백부장은 말합니다. “그게 주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내 계획이라는 것이.

그냥 주께서 할당한 인생이지요. 네가 간호사가 되라면 간호사가 되고, 네가 교사가 되라면 교사가 되고, 집에서 놀라고 하면 놀고. 아프라고 하면 아프고. 할당된 거예요. 오늘 기침이 나서 설교가 되겠나 싶었는데 지금 끝까지 끌고 왔네요. 이것도 그냥 할당된 거예요. 할당된 거라니까요. ‘아, 그래 나 잘했어.’ 이것은 필요치 않아요, 우리의 자랑은.

우리의 행함이 아닙니다. 행함에 의미 주는 것은 전부다 교회의 전당에서 악마가 그렇게 시켜서 그래요. 행함이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은. 시킨 거예요 그냥. 행함은 반드시 유의미를, 악마의 속성을 낳게 되어 있어요. 행해놓고는 잊지를 못하거든요. 기억을 하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없지만 꽃꽂이를 한다 해보세요.
꽃꽂이 해놓은 사람은 내내 자기가 꽃꽂이 해놓은 것만 볼 거예요. ‘다음에는 안개꽃 좀 더 넣어서 해볼까?’ 설교시간에 그것만 생각한다니까요. 자기한테는 유의미해요. 우리는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없으니까 지금 말씀만 청종하지요. 지금 약간 붕 띄워줍니다만. 그냥 교회 오라고 해서 왔고, 가기 싫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가기 싫은 마음을 줘서 안온 거예요.

이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태어난 것도 내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 안에 뭐가 있느냐? 예수님의 하신 기획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이 유의미하기 때문에, 백부장은 그리스도 자신의 일 때문에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아들의 나라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행함을 주장했던 바리새인들은 지옥에서 다 쫓겨나가지요. 이게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이것조차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이 매맞을만한, 그야말로 기도하신 내용대로 채찍 맞을 나쁜 짓을 하는 불순종의 모습으로 나는 지금 살아 있음을 십자가에서 도리어 감사하는 사람, 자기수정과 자기개선에 나서지 않고 “주여, 저는 이 따위밖에 안 되는 존재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의 하나님의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계산을 가지고 교회 나왔습니까? 무슨 계산을 가지고 예수 믿는다고 우겼습니까? 다 헛짓이고 부질없는 종교행위에 불과한데 그것이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했습니까? 이제는 십자가만 자랑케 해주시고 우리 때문에 흘리신 주님의 그 피와 아픔을 잊지 않는, 기억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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