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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 12:39:35 조회 : 9960         
   하나님의 예정 181125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하나님의 예정(에베소서 1:3-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5iC46YdhMt8, Hit:40
 이근호 18-11-25 13:25 
하나님의 예정

2018년 11월 25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1:3-5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도는 일반인들이 관심도 없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에게 있어 이 내용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3:1-3에서 사도는, 자신이 3층천에 올라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이미 창세 전의 내용은 본인이 알고 있고, 그 알게 된 내용을 편지에 담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의 입장에서는 그저 믿고 안 믿고의 사항이 아니라 목숨을 버려도 상관없을 정도의 귀한 내용입니다. 도리어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본성이 이 귀한 내용을 가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장함을 지니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런 내용에 시큰둥하고 주저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사도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자신에게 의사를 묻는 것이 도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진리 최종 판단자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즉 결과에 대해서 ‘내가 판단했다’는 가치가 담겨 있기를 원하는 마음들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이 판단해서 이해되고 좋다고 여겨지면 그때 받아들이겠다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정’이라는 뜻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는 겁니다. ‘예정’이란 의도적으로 인간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겁니다. 아직 인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이전에 결정된 사항이 예정된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예정의 정신과 취지가 전달되거나 담길 때에는 이 성격을 유지하면서 전달되고 담기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인간을 배제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판단이나 행함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참으로 예정되지 않는 존재가 엄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곧 ‘악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되지 못한 악마’을 통해서 인간세상이 지배받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따먹지 말라는 지시에 대해 거부했던 인간의 행위에 대한 후속조치입니다. 즉 악마로부터 이미 인간 마음속에 자리잡고 장착된 선과 악의 논리를 통해서 계속 추궁당하도록 하신 겁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자꾸만 판단하고 따지고 거기에 따라 행하도록 허락하신 겁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나 운명이 지금 본인들이 행하는 선과 악에 따라 정해진다는 의식에 파묻히게 된 겁니다. 인간들은 우기기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옳은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보이는 것보다 더 무한적입니다.

즉 보이는 것을 결코 만족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라는 말입니다. 악마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부추깁니다. “너는 기어이 천국가야 돼, 기어이 구원받아야 돼”라고 말입니다. 그 방법까지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서 너를 버리지 않아. 따라서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기 위해 창세 전에 너를 예정하시고 택하셨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악마는 뭐라고 다가오느냐 하면, ‘예정’보다 ‘인간 구원’을 우선합니다. 즉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인간 구원’보다 ‘예정’이 먼저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구원 위주의 예정’을 참된 예정이 지워나가고 거부하는 식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곧 인간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주변에서 끌어모으게 됩니다. 평소에는 사는 것이 우선이지만 궁극적으로 최후의 목표는 자신이 천국 가는 겁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들은 빠트리지 않고 죄다 모으기에 나서는 것이 인간이며 이런 인간들을 배후에서 악마가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는 천국 입구에 서서 자신을 천국 중개인으로 자처하고 나섭니다. 자신이 당신이 원하는 천국행을 보장하고 힘써 주겠다는 겁니다. 유럽의 중세사에서는 교황, 주교, 사제들이 이런 일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예정된 단체’라고 소개하면서 교회 말을 잘 들을 때만 천국이 보장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천국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악마의 뜻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겁니다. 그들 속에 이미 심어진 선악체계의 굴레를 인간들은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체계에 맞추어 악마는 지속적으로 선을 가지고 오라고 인간들을 닦달하고 온 겁니다. 그러나 복음이 유럽에 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인간들이 신을 믿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챈 시대가 오면, 기독교 이전의 인간들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연모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신을 믿되 그 책임은 신에게 일임하지 않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처하는 용기에 두었던 겁니다. 바로 그 자유가 중세 이후의 사람들은 부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맡겼던 그들이 다음과 같이 외치고 나온 겁니다. “구원은 내가 결정한다”고 말입니다.

즉 구원되고 아니 되고를 자기 책임 하에 두겠다고 나선 겁니다. 오늘날 교회 모습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참으로 예정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펼치는데 탕자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 아들이 집을 떠날 때 당당하게 자신이 아들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러나 돈을 다 탕진하고 다시 돌아올 때는 아들임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탕자의 인생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참된 아들의 면면이 된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살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진정 이 세상의 속성을 모든 것일 빼앗고 잃게 만드는 식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이 착각한 아들이 아니라 진짜 아들의 본성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악마의 통치에 속해서 늘 속고 또 속아왔습니다. 남이 나를 속이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늘 나를 속이고 온 겁니다.

탕자처럼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이 계속 잃어가고 있는 중임을 아는 자가 진정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택한 자입니다. 주님 앞에서 그저 정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정이 이미 마무리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을 다 해주시는 주님의 예정 활동이 꿈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11-26 11:20 
2강-엡 1장 3-5(하나님의 예정)181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3-5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를 받은 우리 입장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내용이 이 안에 담겨 있어요. 인간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사전에 우리보고 의논하거나 물어보고 해야 되는데, 편지를 보내도 그렇게 한 뒤에 보내야 되는데 불쑥 우리가 예상 못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보내버리면 결국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것을 전부 다 쏙 빼라는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 정신 속에 담고 있는 것을 다 빼고 이 에베소서 1장 3절-5절로 바꿔치기하라는 거예요. 이걸로 바꿔서 이 내용으로 가득 채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평소에 우리의 정신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살릴까 하는 내용들로 꽉 차 있어요.

물론 기본적으로는 사는 것이고, 그 다음은 멋있게 남들 앞에 자랑질하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가는 겁니다. 나 이 정도야, 하는 것을 내세우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는 죽기 싫어요. 악착같이 살아야 되겠어요. 왜냐하면 내 소원이 내가 만족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써서라도, 오기를 부려서라도 오늘 죽기 싫습니다. 우리는 버티고 싶지요.

그런데 네가 속았다는 겁니다. 바울도 사도되기 전에 속아 넘어 갔고요. 지금 속고 있다는 거예요. 네가 너를 살리는 짓이 아니고 오히려 너를 죽이는 짓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3절에 보면, “신령한 복”이라고 되어 있는데 신령한 복은 알 수 없는 복이에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미 자기가 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면서 내세우는 것이 뭐냐 하면, 삼층천에 올라가서 창세전의 상황, 하나님의 계획상황을 다 봤어요. 다 본 사람만이 이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너에게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금 너희들은 거짓말만 너희 속에 가득가득 차 있다는 뜻이에요.

거짓말로 훈련되었고 거짓말로 양육되었기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제는 반대로 되어서 옳은 이야기, 진정 현실이고 실재적인 것은 기를 쓰고 배척하고 거부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엄마가 ‘교회 갈래?’라고 나에게 물어봐야지.” 맨 날 우리보고 의논하래요. 결정은 내가 내리겠다고.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괜찮은 권리라도 있습니까? 그런 것 없어요. 무조건 평소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뭐냐? 좋고 나쁘고, 그것은 내 결정이 거기에 가미가 되어야 돼요. 내 판단이 거기에 가미가 되어야 돼요. 왜? 인간은 만물의 척도기 때문에. 세상의 진리와 거짓은 내가 판단해요. 20대 애에게 벤츠를 사주던 뭘 사주던 간에 그것은 “내 돈 내가 쓰는데 네가 왜?” 그 말이거든요. “내 돈 내가 쓰는데 네가 왜? 이것은 내 판단이야.” 왜? 나는 판단의 중심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서 산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결정하기 위해서 참고가 될 진열된 것은 다 눈에 보이거든요. 그런데 신령한 복은 인간의 선택의 대상 속에 포함이 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이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어요. 왜? 둘 다 보이니까. 인간은 기껏 선택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 가운데서 보다 좋은 것을 선택해요. 자기한테 유리한 것을. 교회 가는 것도 그렇고, 예수 믿는 것도 자기한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령하지 않은 복이에요. 인간이 예상하고 있는 복입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수학을 잘하는데 왜 천문학을 전공하기로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우주라는 것이 무한하게 넓기 때문에 내가 남자로서 또는 내 지식으로서 도전할 가치가 있어서 천문학을 선택했습니다.”라고 했어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도전하는 이유는, 인간이 갖고 있는 꿈이라든지 기대, 이상, 희망, 이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커도 성경에서는, 그 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속이는 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되어 있잖아요. 예정의 내용이 무엇이고,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펼쳐지고 전개되느냐의 그 내용을 아시려면 뭐부터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예정되지 않은 존재가 뭐냐, 부터 출발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되지 않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악마였습니다.

악마는 예정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악마가 예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악마가 알고 있어요. 그만큼 악마는 예정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거예요. 나를 멸하기로 예정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무덤가에 귀신들린 청년에게 왔을 때 그 청년이 하는 말이, 우리를 멸하려고 오신 것은 아는데 아직 때가 안 되었는데 왜 벌써 오십니까, 라는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런데 악마가,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를 처벌하려고 예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예정되지 않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맡기신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은 예정되지 않은 자의 종으로서, 노예로서 살아야 예정된 세계가 비로소 개입할 수 있는 절차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로 하여금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이야기했고, 그 결과로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한 그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쏟아져 나온 것인가 하면, 예정될 수 없음이 확정된 존재로부터 펼쳐진 거예요. 그러면 예정되지 않는 존재기 때문에 예정되지 않는 악마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 스스로 하나님의 예정 안 됨을 하나님 쪽에서 후회하도록 만드는 조치를 할 수밖에 없지요. 그게 바로 인간을 볼모로 잡고 신에게 대적하는 겁니다.

그런 일에 인간은 이미 어느 편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 편에 소속된 것이 아니고 그 짓 하는 악마와 단짝이 되어서 같이 거기에 휩쓸려서 평생 모든 정력을 소모하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마를 속이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짓된 자, 속이는 자라고 하는 거지요.

그 소리 듣고 인간들은 자존심이 강하니까 ‘악마가 아무리 속여도 나는 속지 않을 자신만만합니다. 나에게는 이성적 판단이 있기 때문에 내가 판단 내려서 죄 짓는 일,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고자 마음 단단히 먹고 있습니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악마를 못 이깁니다. 내가 내 힘으로 악마를 이기고 천국에 가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악마가 유포한 구원방식이에요. 악마가 유포한 구원방식이 이렇습니다. 성경에서는 4, 5절을 합해버리면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택했다, 그렇게 됩니다. 4절에 택했다고 되어 있고 5절에 예정했다고 나와 있으니까 두 개를 합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를 택해서 구원한다고 되어 있어요.

구원 이전에 하나님의 예정이 먼저 있다는 것은 복음이에요. 이것은 성경이고 진리이야기에요. 그런데 이 세상에 유포된 예정론은 뭐냐 하면, 인간의 구원이 먼저 있고 그 구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유포하는 거예요.

내 구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했느냐를 보는 것이 이 세상의 교회의 가르침이 되는 겁니다. 왜? 이 세상 교회는 악마가 쥐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가 쥐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하는 일을 아주 손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부잣집 마나님들이 있어요. 하여튼 좋은 대학, 서울대, 연대, 고대, 그야말로 sky라고 하지요, 그들만이 사는 그 마을, 스카이캐슬, 그 엄마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입시전문코디를 만나서 백퍼센트 서울의대, 일류대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모으는 겁니다.

그러면 고 1때부터 자녀들을 코디해줘요. 맞춤안내를 해주는 거예요. 그 일을 오늘날 교회가 해준다니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부터 시작해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거부터 코디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인간은 벌써,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는 모르고 ‘그래. 나는 구원받아야 합당해. 구원받을 가치 있어. 나는 나의 최후의 목적은 뭐냐? 천국 가는 것.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최후에 남는 것은 천당, 천국 가는 것. 그 목적은 내가 이루고야 말리라.’ 그런 야심들이 있어요. 인간은 전부 다 야심가들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코디를 해주지요. 마치 입사서류 낼 때 “내가 회장하고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나에게 회비내고 돈 내면 필요한 서류 챙겨서 면접에 합격하게 해줄게.”라고 할 때 거기에 필요한 서류를 이만큼 쥐고 동분서주하면서 그 회장님한테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니 좀 넣어주세요.”라는 코디네이션 하는 그 역할, 그게 목사나 부목사, 전도사들이 교회에서 하는 짓이라니까요.

저 사람은 십일조 했으니 봐주세요, 저 사람은 열심히 봉사했으니까, 저 사람은 선교에 목적을 두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봐주세요, 라고 서류봉투 들고 인사과에 찾아다니듯이 또는 입시사정관 찾아다니면서 부탁하듯이. 일종의 여행사 직원 같은 거예요. 여권 한 뭉치 들고 다니면서, 그리고 피켓 하나 들고 인솔하면서 “말 다 해놓았으니 줄 따로 서지 마시고 바로 박물관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런 서비스를 하는 거예요.

교회가 제 3차 산업이에요. 그 짓해도 생계가 보장되니 신학교에 가는 겁니다. 그 일을 처음에 로마 교회가 했었어요. 거기에 필요한 신앙고백서와 교리들을 그들이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교리가 서류뭉치에요. 삼위일체 그런 것들. 그걸 보고 동의하면 서류에 사인한 것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한테 빌든지 아니면 예수님도 잘 안받아준다면 예수님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여자 분이 예수님 옆에 계셔요. 성모마리아.

예수님은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회해서 성모마리아를 통해서 압력을 가하도록 하는 겁니다. 심지어 연옥이라는 것까지 창안해서 거기서 끄집어내 주는 거예요. 거기에 동원된 사람이 교황이고, 추기경들이고, 주교들이고, 각자 마을마다 있는 신부들이었어요. 그리고 오늘날 목사들이었고.

그런데 그 시대가 대략 서기 1500년까지, 서기 5백년쯤이 국교가 된 시기니까 약 천년동안 유럽의 정신을 꽉 잡고 있었습니다. 중간업체, 중간에서 코디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거예요. 그 당시 14세기까지의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영주가 있고 영주가 교회를 세우고 정신적으로 농노들을 다 지배한 겁니다.

그들에게 월급을 주고 그들은 “이것은 신이 지시한 일이기에 무조건 너는 나에게 바쳐라. 대신 정기적인 성만찬의 떡을 먹으면 이 땅에서 고생이 그치고 죽어서 하늘나라 영원한 복락을 누리니까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하는 봉건적정신체제로 완전히 묶여 있었던 겁니다.

지금 우리하고 무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관련된 이야기를 합니다. 르네상스라는 것이 있어요. 문예부흥인데, 그 당시에 생각하기를, 이상하다, 옛날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그리스나 로마사람들도 신을 믿었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은 자신의 구원을 타인에게 일임하지 않았거든요. 어떤 코디라는 것이 필요가 없었어요.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신은 믿되 인생의 잘한 결과의 보상과 못한 것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기꺼이 자신만만하게 자기가 감수하겠다고 받아들인 겁니다. 그게 진정한 인간해방, 진짜 내 인생 내 원대로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자극시키는 동기가 된 거예요. 인간정신의 부흥이 되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신을 묘사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그 말이에요. 그 말은, “신을 믿고 안 믿고는 내가 책임질게, 내가. 이제는 누구에게 일임하지 않고 내가 책임질게.”라고 시작되는 겁니다. 16세기부터. 그게 바로 종교개혁이에요. 이게 개신교입니다.

옛날에 예정론을 교회가 가져갔어요. 예정된 사람은 교회가 코디기 때문에, 교회가 중개업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시키는 성만찬, “이 떡은 예수님의 살이고 이 잔은 예수님의 피다. 이걸 믿고 먹으라 하면 먹어.” 안 먹으면 잘리는 거예요. “왕이고 뭐고 간에 이거 안 먹으면 지옥 가는 거야.”라고 했을 때 다 일임했기에 “예,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겠습니다.” 이렇게 한 거예요. 옛날 천주교에서는.

신부들이 그렇게 한 겁니다. 교회를 예정했기 때문에 예정된 교회에 등록 안하면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에 의해서 탈락이 돼요. 예정 안 된 자가 탈락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예정 안 된 자에요. 그래서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 성만찬에 참석하게 되면, 신부 말을 들으면 자기는 창세전부터 구원된 사람으로서 이미 자기구원을 교회에 일임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16세기에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이제는 그 예정론을 교회에 일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내가 내 안에 예정론을 가져오는 겁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둘 다 마귀에게 속한 것은 한결같은 이야기입니다.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겠다, 하는 순간 이제는 교회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거예요.

신부 의존도가 그만큼 떨어지는 겁니다. 목사의존도가 그만큼 떨어지는 거예요. 내 구원이 괜찮은 구원이고, “당신 구원이 옳습니다.”라고 목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서비스만 해 달라, 박수만 쳐주고 칭찬만 해 달라는 식으로 한다면 교회에 대한 헌금은 아깝지 않게 할 테니 목사 당신은 그 서비스업에 충실하라는 거예요. 이게 개신교입니다.

천주교는 천주교 나름대로의 고집이 있지요. 개신교는 나름대로 고집 같은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교인들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단체기 때문에, 가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는데 무조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예, 구원 받았습니다. 예, 예정된 사람 맞습니다. 당신이 예정 안 되었으면 누가 예정되었겠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성품과 믿음을 가졌으니까.”

그렇게 될 때 교회의 말, 천주교 신부나 주교의 말을 듣던 그 여력을 그 다음부터는 일반 시민들이나 국민들이 자기재산 불리는데 다 투자를 하는 거예요. 투자하고 가끔씩 교회에 얼굴 보이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목사가 눈치 없이 탓하면 안돼요. 교회가 한두 군데가 아닌데 삐져서 다른 데로 가면 안 된다니까요. 다른 데로 가면 돈이 이동하는 거니까. 가게 운영이 안 되잖아요.

백종원이 한 번 불러봐야 돼요? 골목식당이 아니라 골목교회가 안 되잖아요. “돈이나 많이 버세요. 그것이 신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거예요. 막스 베버라는 사람이 그걸 이야기한 거예요. 개신교로 인해서 비로소 자본주의는 크게 성장되었다 하는 겁니다.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정신>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오늘날에 있어서 이 종교는 본인이 스스로 자기내부에 종교인테리어를 하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불 질러버리면 종교인테리어도 다 타버립니다. 소용이 없어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성경은 예정이 먼저 되어 있고 그 다음이 예정에 입각한, 신령한 복에 입각한 구원이 나중에 설정되어 있어요.

이 세상 모든 기독교 계통, 모든 종교계통은 하나님은 날 사랑하니까, 이것이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는데 무조건 나의 구원을 위해서, 최후 목표가 내가 천당 가는 것이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얼마든지 동의해 줄 테니까. 예정했다고요? 예정, 믿습니다. 택했다고요? 택한 것 믿지요.”

이렇게 자기 자신이 잘되기 위해서 예정론을 거론한 거예요. 그래서 맨 날 저에게 묻는 것이 “목사님, 저는 예정되었습니까? 구원되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다른 교회 가니까 구원된 자의 특징, 표징, 택함 받은 자의 표징, 이런 것이 있던데 그런 것이 뭐가 없습니까?” 시켜만 주이소, 다 하겠다는 거예요.

코디가 시키는 대로 다 해야지요. 그래야 구원받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돈벌이를 좋아하면서도 주일날 교회 가는 이유는 코디가 있기 때문에. 서류가방 들고 바쁘게 움직여야 되잖아요. 주님한테 빽 써서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니 넣어주라고. 유아세례 받고, 세례 받고, 성만찬하고, 다 해서 넣어준다고 분주하니까 하나의 계약관계에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그러면 에베소서 오늘 본문의 뜻은 뭐냐? 아까도 했지만 사도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알았어요. 뭘 알았느냐 하면, 천국에는 인간들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지요. 열 두 제자가 갔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차단시켰습니다. 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네 자리가 없어요. 처소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인간을 빼는 거예요. 주님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 그런 것 해도 소용없어요. “가! 가!” 가고 그 다음에 예수님과 아버지가 단독으로 서요. 아버지가 택한 사람이 있어요. 그 택했다 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성령은 나중에 알겠지만.

아버지와 아들, 그게 본문에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이 뜻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이지요. 찬송은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을 때나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가면 찬송만 해요. 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으니까. 여러분, 요새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학생도서관에 가면 두 글자가 붙어 있지요.

좀 유식한 도서관에서는 한자로 쓰고 좀 배려하는 도서관에서는 한글로 써놨어요. 두 자입니다. ‘정숙’(靜肅) 조용히 하라는 그 말이거든요. 천국은 입을 다물어야 될 곳입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악마는 천국 못가는 것을 본인이 알거든요. 천국 입구에서 압살롬이 하는 질문을 똑같이 해요.

압살롬은 여러분이 알지요?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배반한 아들인데 키 크고 잘생기고 머리가 길어요. 가수 하다가 영화배우 된 사람을 보면 압살롬만 생각하면 돼요. 만화에 나오는 테리우스 비슷하게 생긴 사람.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너에게 무슨 고민이 있어?”라고 물어요. 이게 악마가 오늘날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고민 내가 들어줄게. 상담해 줄게.”

이것이, 자신이 천국에 못가는 것을 아는 악마가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 모으는 방법이에요. 목사가 교인들을 모으는 방법이 그겁니다. “무슨 고민 있어요? 가정적으로 고부간에 갈등이 있습니까? 애가 말썽을 일으킵니까? 자꾸 병이 도져서 그렇습니까? 제가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악마가 하는 일이에요.

악마의 하수인들, 악마의 업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성령이 오면 입 다무는 거예요. 모든 것이 마무리 된 거예요. 왜냐하면 진지하고 비정한 마음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에요.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것도. 제가 여기 서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걸 좀 비장한 각오로 이야기하세요.

목숨하고 맞바꾼 대가로 이 자리에 앉아 있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겁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은 거예요. 그런 비장함이 있어야 돼요. 말씀에 대해서.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까요? 에베소서 1장 3, 4, 5절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현재 네 정신 속에,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다 긁어내고 이걸로 채워도 넉넉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없어도 괜찮아요. 아빠, 엄마 죽어도 괜찮고, 빌어먹어도 괜찮고, 자빠져 놀아도 괜찮고, 부도나도 괜찮아요. 에베소서 1장 3절, 4절, 5절만 있으면 돼요. 지금 사도바울은 이거 하나 붙들고 지금 대만족하고 있습니다. “너희 이거 모르지?” 하고 약 올리고 있어요, 우리한테.

무슨 교회에 와서 복을 달라고. 그것은 마귀한테 그런 짓하고 빌어요. 마귀한테 빌라고. 무당들한테나. 대나무대신 십자가 꽂힌 무당들 많잖아요. 그거한테 빌라는 말이지요. “어떻게 하면 내 것을 안 다치고 지킬 수 있습니까?” 네 것이 어디 있는데? 네 것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을 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악마가 예정되지 못했다면 예정된 분의 원형은 예수님뿐이에요. 그래서 예수 안에 들어와야 우리가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택했고, 예수 안에서 예정된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 창세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입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창세전에, 태곳적 사연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온 사연 말고요, 여자의 일생 말고, 시어머니에게 머리 쥐어뜯긴 그거 말고요, 그거보다 더, 더, 더, 더, 더 태곳적 사연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친구 만날 때 무슨 이야기를 들으려고 친구 만납니까? 각자 자기자랑하려고 만나잖아요. 이만큼 버텨왔다고. 너 못지않게 나도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그거 자랑질하려고 사람들 만나거든요. 주님의 예정은 그걸 긁어내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꿈과 기대와 희망을 좌절시키는 거예요.

내 꿈과 희망, 산적한 그것을 전부 다 제거하는 겁니다. 빼앗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살려고 하고, 모으려고 하고 주님의 예정하심은 그것을 제거하고 깨뜨리고 빼려고 하시고. 가졌다 하면 빼버리고. 모았다 하면 다 없어지게 만들고. 주님 살아가신 것 보세요.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진 것 다 날렸습니다. 가진 것 다 날렸어요.

까딱없습니다,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이 한마디에 까딱없어요. 그분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분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동일하게 분배되었고 할당되었어요. 마치 화투패 나누듯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5절을 준 거예요.

“아나, 먹어라.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 이대로 실시할거야.” 우리는 봐도 ‘이거 뭔데? 내가 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네.’ 버려버립니다. 악마가 보낸 코디들이 그걸 버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믿음 좋으냐 하는 것은 얼마나 여러분이 평소에 떵떵거리고 잘 사느냐가 복 받은 증거라는 겁니다. 그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국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못사니까 전도가 안 되지 잘살면 전도 된다는 거예요. 자기같이 지옥 갈 인간 또 모집하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비유입니다. 탕자비유의 진정한 뜻은 이겁니다. 아버지는 현장에, 그 자리에 있어요.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있는데 가만히 있는 아버지의 속내, 속뜻을 누가 이 세상에 제대로 보여주느냐는 아버지에게 있는 큰 아들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 제대로 아버지의 뜻을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은, 내 인생은 내가 정하겠다고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챙겨서 나간 거예요. 세상으로. 그런데 세상의 기능은 그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지요. 그러고 난 뒤에 그 둘째 아들이, 처음에는 “나 아들입니다.” 하고 큰소리 치고 당당하게 나갔다가 들어올 때는 “나는 아버지 아들 아니에요.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아들이 돼요?”라는 소리를 하면서 기어들어온 거예요.

오늘 본문 1장 5절에 봅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아버지의 속뜻을 탕자를 통해서, 탕자와 이 세상의 만남을 통해서 예정이 어떻게 예정답게 펼쳐지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를 회수하려고 해요. 세상에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회수하는 시그널, 신호입니다.

세상은, 네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너를 빼앗기 위해서 너와 매치된 인간들이에요. 내 것을 빼앗아가는 인간들. 우리는 착각을 해가지고, 내가 저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내가 더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만나게 해줬다고 착각한 거예요.

그러나 인생은 빼앗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빼앗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예정된 자가 아니에요. 이게 바로 우리 주님의 속임수입니다. 속이는 악마마저 속여 버리는 주님의 반전, 인간은 자기의 잘남에 자기가 속습니다. 자기 자식이 잘나가는데 자기가 속아요. 공부 잘하니까 그것이 훌륭한 아들인 줄 알고 속았습니다.

우리는 속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정된 자가 자랑할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속고 속았다. 평생을, 남에게 속은 것도 있지만 나 자신에게 내가 속아왔다는 것을 여러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안 속았으면 저런 아내, 저런 남편을 만났겠습니까? 내가 미쳤어. 내가 나 자신에게 속았어요.

그게 마치 전부인 줄 알고. 오늘 복음을 생각하면서 갑자기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는데 남진 장로님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둥지>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현실일까 꿈일까 사실일까 아닐까 …… 사랑이 뭔지 그동안 몰랐지 내 품에 둥지를 틀어봐 내 품에 둥지를 틀어봐.”

지금 부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데 참고 있어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도저히 인간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해요. 너의 운명은 네가 싸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광주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꼭 자기가 자기 탓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어떤 가정에 부도가 나서 큰 버리고 작은 지하방으로 들어가야 될 입장에 있으니까 그 사연을 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애가 들었어요. 애가 울면서 “엄마, 이제는 엄마 말 잘 듣고 게임 안할게.” 할 때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게임해서 집안이 망한 것이 아니야. 네가 말썽부렸다고 해서 집안이 망한 것이 아니고 너와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악마는 자꾸 우리에게 스며들지 않아야 될 선악과를 집어넣고 그 다음부터 선악 가지고 조지는 거예요. 네 잘못 때문에 네가 지옥 간다고. 네가 이 교리를 안 믿기 때문에 지옥 간다고. 네가 교회를 부정해서 지옥 간다고. 판단 똑바로 하라는 거예요.

네 구원은 네가 판단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데 까지만 했고 그 다음 믿고 안 믿고는 이성적으로 네가 판단해야 되고 그래야 네가 천국과 지옥 가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진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거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끝났어요. 태어나기 전부터 끝났습니다. 정숙. 어떤 아줌마 이름 같다만. 정숙. 입 다무시고 빼앗기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한테. 특히 무엇을 빼앗기냐 하면, 건강을 빼앗기시기 바랍니다. 지금 조금씩 빠지고 있어요. 아무리 발라도 피부가 메말라요.

가을 지나고 겨울이 되면 벌써 늙습니다. 빠집니다. 조금씩 빼가고 있습니다. 예정된 코스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주께서 남진 장로님을 통해서.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우리는 그저 ‘이게 꿈일까 현실일까? 진짜 내가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이런 거야?’ 이러고 있다니까요.

좀 비장함 같은 것이 있어야 돼요. 좀 진지함이 있어야 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돈벌이에 진지하지 마시고, 소유하는데, 가지는데 진지하지 마시고, 버리는데 진지하시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잃어버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주여, 그만 빼내시고 아예 저를 데려가시지요.” “가만있어. 아직 빼낼게 더 있어.”

날마다 우리의 무한한 꿈과 기대 그것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좌절시키지요. 따라서 사는 것이 고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고문당하는 거예요. “이게 안 빠지나?” 하고 주님이 목 조르고요. 팔 비틀고. 거꾸로 해서 툴툴 털고. “나올게 아직도 있네, 이거! 못 죽이겠네. 아직 더 살려야겠어. 동전 쓰레기가, 이런 것이 나오잖아. 봐, 봐!”

예수님 가는 코스가 그 코스였고, 선지자들이 가는 코스가 그 신나는 죽는 코스였습니다. 선지자나 예수님이나 성령 받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속옷만 입었는데 물 한바가지 뒤집어썼을 때 옷이 쫙 달라붙잖아요. 우리는 죽음과 밀착되어 있어요. 어떤 순간도 영생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우리 자신이.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주님께서는 이러한 속임수를 쓰시면서 우리 자체를 세상을 향하여 속임수의 앞잡이로 사용하셨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주님께서 35, 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렇게 하니까 성도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할 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우리가 성도지만 별 볼일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악마를 속이는 속임수가 되는 겁니다.

“너희들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지만 사실은 이미 산사람이다.” 우리가 주님의 속임수의 작품으로서 주께서 우리를 안 죽이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써먹을 데가 있다고 써먹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세상을 부러워하고, 그 부러움에 못 이겨서 얼마나 주님께 불평해 댔습니까? “기도 잘하는데 남들 가지는 것 우리는 왜 못가지게 합니까?” 얼마나 불평했고, 바가지 긁었고, 얼마나 싫어했습니까?

그러면 이 소자한테, 주님한테 싫다고 한 것밖에 안되거든요. 사도바울의 그 당당함과 그 진지함을 우리가 같이 답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5절, 내가 배제된 채 주께서 친히 마련하신 처소, 마련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소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고 이 소식이 네 목숨보다 귀하다는 그런 생각이 퍼뜩 드시거든 여러분, 예정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뜻을 우리가 얕잡아 보았습니다. 내가 나 사는 방식으로 주님을 끌어당겼던 그것이 오류였고 악마의 짓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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