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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8 12:41:39 조회 : 17830         
   십자가만 자랑 181028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십자가만 자랑(갈라디아서 6:13-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WtE0wVLC2rY, Hit:47
 이근호 18-10-28 13:26 
십자가만 자랑

2018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6:14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 자체가 모든 다양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양성을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다양함이나 다양성은 오직 ‘육체의 모양’에 근거해서만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 율법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다양함으로 나오게 마련인데 이는 그만큼 자기네 사정을 고려하면서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곧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관리’입니다. ‘자기 관리’는 신앙이 아닙니다. 도리어 신앙을 밀어냅니다. 인간의 이러한 자기 관리 속성은 창세기 3장에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거기서 인간들은 아예 ‘죽음의 나무’ 자체를 훼손해버립니다.

죽음을 유발하는 나무 자체를 부정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악마의 마음을 품고 행동하는 것은, ‘죽음’과 거리를 두므로서 삶과 생존을 도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재수없는 것을 저멀리 밀어나므로서 생존이 가능한 자기만의 자리를 장만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간들의 희망이란 이처럼 죽음을 멀리 밀쳐두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살 수만 있으면 기어이 살려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도들의 진열장이 곧 이 세상입니다. 온갖 종류의 삶의 도모가 전시되어 있고, 사람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인물과 견주어보고자 합니다. 이게 인간의 일상입니다. 마음에 드는 인생이 눈에 들어오면 그것이 오늘부터 내다보는 희망이 되고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 군집의 전시공간은 결코 인간들이 주동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들어왔을 때, 마중 하듯이 만난 존재가 있습니다. 악마입니다. 악마는 결코 예수님에게 폭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유혹으로 만납니다. 돈과 인기와 세상 권력이었습니다.

악마는 결코 생김새가 흉악하거나 성품이 극악무도한 자로 대표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에게 살 희망과 의지를 부여하되 그 동기가 그동안 인간들이 원했던 바, 그것은 유혹으로 유인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지금껏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인간들의 입장에서 이런 유혹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폭력적으로 나오면 차라리 버티기라도 할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억압하면 더 튀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은 그런 강압적 수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진해서 녹아지게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대해서 인간은 아는 바 없이 살아갑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고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방주는 곧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입니다. 바깥에는 무겁고 맹렬한 폭우가 쏟아지고 안에는 긴장감 속에 고요합니다. 방주 안에서 8식구가 재미나게 일상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방주 안의 노아 가족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맞이해야 합니다.

즉 방주의 잣나무 구조물 밖에는 무서운 저주의 심판이 터지고 있어도 이 방주 안에는 그것이 없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 14절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방주 안의 사람들의 역할과 저주와 구원의 경계선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언약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로 인하여 새롭게 발생된 상황 안에 놓여 있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질책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을 흉보고 질책한 모든 자들이 다 죽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처럼 신나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바로 ‘세상 자체’가 죽은 겁니다. 십자가가 방주입니다. 그 밖에는 참혹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 참혹한 세상 자체가 악마가 제공한 유혹과 유혹으로 계속 취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육체의 모양, 육체의 자랑을 위하여 세상에 나가서 마음에 드는 모델과 고르기에 급급합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초반에 욥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가 나옵니다. 그에게 자식 10명이 있었고 많은 재산은 있었지만,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주신 자로 하나님이요 가져 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고 고백합니다.(욥 1:21) 욥기가 1장으로 끝나야 할까요?

아닙니다. 욥기가 42장까지 이어지는 것은 1장 이후, 욥 자신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정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욥이 자신을 잊어버리게 하는 겁니다. 욥으로 하여금 친구를 위해 사죄의 제사들을 드리고 하시므로서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욥의 위상을 보게끔하십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변화산에 예수님께서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큰 차이나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12제자 중의 3인의 제자들과 따로 뽑혀서 변화산에 올라갔지만 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서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잊었습니다. “여기서 좋습니다. 제가 초막을 세 채 지어서 세 분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베드로가 제안합니다.

즉 자기네들을 위한 초막은 없는 겁니다. 이처럼 자신을 잃어버려서 잊게 되는 것이 곧 십자가 앞에서 성도의 위상입니다. 성도는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체의 모양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언약에 의해서 ‘없는데서 새로 생겨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7:23-24에 보면,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의식은 우리 인간이 골라잡는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모양’들의 물결이 밀려들어와서 성도를 포위케 합니다. 그 가운데서 세상의 정체를 밝히 알게 하십니다. 즉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십자가뿐임을 알게 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 이 세상을 심판과 복으로 가름하는 경계선으로 다루어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을 죽게 한 요인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10-29 23:13 
311강-갈 6장 13-14(십자가만 자랑)1810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13-14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13-14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4절의 말씀이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3절을 거쳐 와야 됩니다. 13절의 말씀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의 자랑거리를 내세우는데 그 자랑거리가 뭐냐? 자기 육체의 역사, 자기육체를 가지고 했던 것들을 자랑하게 된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14절 말씀, 십자가 이야기를 빼자 그 말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제켜버리고 13절 한 절만 놓고 본다면, 사도바울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했을 때에, 14절을 생각 안하고 13절만 보게 된다면, 그게 뭐가 나쁜데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잖아. 인간이 사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 사는 그걸 가지고 티 잡으면 안 되지. 그렇지 않은 사람 나와 보라고 해. 없어.” 이렇게 될 거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그 노동조차도 자기의 인생을 괜찮은 인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나오잖아요. 나오기 전보다 나오고 난 뒤에 자기 신상이 좀 더 나아지고, 자기 기대치가 만족스럽다면 나오지 말래도 나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서 초라하게 지금 살아가는 내 모습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진다면 누가 뭐래도 복 받았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집에 물이 새는데 하나님을 믿어서 물이 갑자기 안 샌다든지 그런 기적이 있으면 하나님의 덕을 톡톡히 보는 거지요.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그게 육체의 모양내는 것인데 그것은 다 헛것이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하지만 사도바울의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황당한 거예요.

‘어쩌라고? 사람 사는 것이 그건데 그거 말고 무슨 목적이 있어? 알아서 좀 밀어붙여야지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 이 세상 자체가 육체에 집결되어 있어요. 집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살아갈 때 그냥 살아가지 않고 견주면서 살아가요.

‘내가 저 사람처럼만 되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 나 저 사람처럼 안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눈앞에 전부 다 진열되어 있습니다. 갖가지의 다양함으로 진열이 좍 되어 있어가지고 마치 접시가 돌아가는 초밥 집에서 골라먹듯이 ‘나 저렇게 될래.’ 접시 하나 딱 집어서 3천원, 자기 앞으로 전부 다 가져오는 거예요.

‘남 사이판에 놀러가니까 나도 사이판 놀러 갈래.’ 태풍이나 불어라. 이것은 전부 다 남들 흉내 내는 거예요. 남들 모방하는 거예요. 그게 남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할 때 미흡함이 없는 완벽한 육신을 갖추고 이것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을 13절에서 한마디로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육체의 티를 되게 내네.” 하는 식으로 몰아붙이지요. 14절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탓할 문제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아는 한 천국 못 간다. 자기의 육체의 모양에 관심이 있고 견줌의 대상들을 세상에서 찾아낸다면 그것은 네가 사는 세상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나서시기 전에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냐 하면, 악마를 만났거든요. 악마를 만났는데 악마라 해서 험상궂고 인상이 더럽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악마가 우리한테 무엇을 넌지시 제안했는가를 봐야 됩니다.

악마의 실체가 뭐냐? 악마의 본질이 뭐냐 하는 것은 저쪽의 인생이 험악하다, 괴상하다, 가 아니라 저쪽에서 나한테 부추기는 내용물이 뭐냐를 봐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돈과 인기와 권세입니다. 돈과 인기와 권세에요.

교회 왜 나옵니까? 교회에 뭘 얻기 위해서 나왔습니까? 돈, 그 다음에 인기, 남이 날 알아주는 것, 세상적인 권세, 또는 건강문제. 그것이 집대성되면 그것을 두 자로 행복이라고 이야기하지요. 행복하려고 교회 나왔다. 그러면 내가 교회 나오기 전에 내 마음속에 그것을 은근히 노리고 나왔다면 그것은 교회에 마귀가 앉아 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과 거래하겠다는 겁니다. 나와 줬으니까, 헌금했으니까 이것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지요. “네가 누구 대표로 나왔느냐? 너는 지금 여기 앉아 있는데 마귀 대표로 나왔다. 마태복음 4장을 봐라.”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그자가 예수님을 때리지를 않았어요. 예수님께 폭력을 행한 것이 아니고 유혹을 했어요.

“네가 원하는 것 내가 줄게. 하나님 믿는데 다 이유가 있어야 될 거 아니냐? 하나님 믿으면 이거 다 줄게.” 라고 나오는 거예요. 거래한 겁니다. 그래놓고 성경 이야기하면 “내가 목사도 아닌데 성경 모릅니다. 그저 열심히 하지요.”라고 그저 열심히 하는 것, 그런 것만 생각하는데 창세기 3장에 보게 되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하는 짓은 뭐냐? 죽음을 밀어냄으로서, 죽음과 멀리 함으로서 비로소 생존에 유리하겠다는 그 작업을 창세기 3장에서 했어요.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으니까 아예 먹는다는 그 나무자체를 없애버린 겁니다. 이제는 살고 싶다, 라는 쪽으로 마귀와 결탁되어서 마음을 굳혔어요. 그게 3장이거든요. 6장에 보면 방주 나오거든요. 이 방주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방주라는 그 배 주변은 전부 다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빙 그 주위가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고 방주 안에서만 삶이 보장되는 장치, 그게 방주에요. 그래서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여덟 식구는 자식들과 며느리들 합쳐서 여덟 명인데 밥을 달라, 빵 달라, 그런 소리 하면 안돼요. 그들은 무엇으로 사느냐? 생존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행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어떻게 터 잡고 방주 안에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고 뭐하고 대조하고 비교하느냐?

“아버지, 우리 큰일 날 뻔 했지요. 그죠?”라고 그걸 대조하는 거예요. 지금 잣나무로 만든 방주의 두께만 나가면 거기는 물의 심판입니다. 식겁한 거예요. 휴~! 그걸 하나님의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경계선을 의미하고 이쪽 바깥과 안쪽을 늘 대비하면서 살아가라는 뜻이 언약입니다.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로 목걸이 만들지 마세요. 목에 달랑달랑, 해서 이것만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본뜻은 그 뒤에 나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방주의 구조하고 십자가구조하고 같은 언약이니까 똑같아요. 우리는, 성도는 하나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나의 처지와 십자가 바깥에 있는 저 사람의 처지가 너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차이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했어요. 반문하듯이 성경이 기록되어 있어요.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지금 그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이유는 뭐냐? 지금 너희들은 온천하만 기대하고 교회 나온다는 거예요. 온 천하를 다 가진 사람, 그걸 다섯 자로 해서 ‘방탄소년단’ 다 가졌어요, 다. 그 방탄소년단 수행원만 해도 백 명이에요. 이번에 훈장 탔잖아요. 가수가 되려는 많은 청소년들의 아이돌, 우상이에요. 나는 언제 저렇게 인기를 얻는가?

그래봤자 십자가 바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노아홍수 비오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언약이라는 의미는 그쪽과 계속 비교하면서, 식겁했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약간은, 아니 많이 좀 미안해해야 돼요. 왜냐하면, 나도 저들과 같이 망해야 마땅한데 “주여, 왜 저에게 이렇게 나오십니까? 저를 왜 이렇게 대우하십니까? 대우받을 그만한 자격도 안 되는데 왜 이러십니까? 대체 내가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습니까?” 라고 알기 위해서 교회 나오셔야 돼요.

그냥 받아 챙겼다고 헤헤거리지 말고, 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기에, 어떤 일을 하셨기에 천국 받을 입장도 못되고 갈 자격도 없는 내가 지금 천국 가고 있는 중이고, 이미 도착한 겁니까, 라고 반문하듯이 와야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육체의 모양과 십자가를 날카롭게 대비하고 있는 겁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 죽어서 낙원에, 좋은데 가는 것 그것은 나중문제고 지금 십자가 안에 어떤 혜택이 있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흉보거나, 어떤 무엇도 여러분을 질책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길에 나갔는데 나를 흉볼 사람은 다 죽어버리고 아무도 없고, 나를 책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지금 그 혜택을 여러분이 누리고 있습니까? 누려야 돼요. 누려! 그거 누려야 돼요.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살면 안돼요. 그것은 여러분을 십자가 안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혜택을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거예요. 어느 누구도 나를 책할 수가 없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어느 누구도 책할 수 없을뿐더러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책하지 마세요. 십자가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걸이 만들어서 달고 다니라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마저 나를 책망할 권한이 없음. 이게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했기에, 주님께서 더 이상 너를 책망하지 않기에, 내가 책망하지 않는다는데 너라도 너를 책망해서는 안 된다. 제발 네가 너를 놔줘라,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그 인간의 ‘나’라 하는 것은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악마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조작된 거예요. 유혹에 의해서, 유혹에 맞춰 살다 보니까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인간되고자 노력했던, 그렇게 해서 만든 ‘나’입니다.

그 나를 없애야 돼요. 구약에 욥 이야기가 나와요. 욥기 전체 흐름을 보게 되면 이런 내용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처음에 욥에게는 자식 열 명이 있었고 부자였다.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초반에 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를 해요.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아봐라. 욥은 절대로 하나님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내기를 걸었어요.

그래서 악마가 와서 모든 것을 빼앗았어요. 여기서 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초반에 합니다. 그 말은 뭐냐? 욥은 자기 것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도 자신만만한 거예요. 모든 사달, 가정이든 뭐든 모든 화근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 것 왜 건드리십니까?” 이것부터 나오잖아요.

사람 대 사람의 시비 거는 것도 뭐냐? 내 자존심 왜 건드리느냐 부터 시작된다고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공들여 온 인생인데. 나를 그렇게도 가꾸고 관리했던 거거든요. 욥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관리는 절대로 신앙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관리는 하면 할수록 신앙과는 점점 더 멀어져가요.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살면 살수록 천국과는 멀어지고 지옥은 가깝고,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 이야기할 때는 적어놓으세요. 자기관리 한다는 것은 자기를 주시하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가짜 나에요. 욥은 자식 열 명이 있었고 다 귀한 자식이지요. 그리고 많은 재산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요즘 사람 같으면, 그 재산과 자신은 하나에요. 내 앞에 사람들이 진열되어 있듯이, 육체의 모양들이 진열되어 있듯이 남들 보기에 나도 하나의 표준으로서 그 앞에 등장한다 그 말이지요. 남자는 차에 꽂힙니다. 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만 날 차 이야기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차의 타이어를 툭 치고 갔다. 그러면 자기 다리를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왜? 일체감을 느껴요. 자기 소유와. 만약 어떤 여자의 가방을 좀 건드리면 꼭 자기를 건드린 것 같잖아요. 모든 자아라 하는 것은 그냥 나,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노동으로 얻어진 어떤 사물과 물체를 앞장세워서 그걸 나의 잘남의 증거물로 등장하는 겁니다.

욥은 그게 없었어요. “제 것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욥기는 1장 2장으로 그 이야기가 끝나야 돼요. 그런데 욥기가 길게 42장까지 가잖아요. 도대체 그 이야기는 왜 필요했던가요? 자식이라든지 그리고 재산 같은 것은 날라 가도 나는 남아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욥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재산 날라 간다고 해서 “예, 제 것 아닙니다.” 자식 죽는다고 해서 “제 것 아닙니다.” 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되고 너, 내가 너 자신을 건드리겠다, 이것에 대해서 건드렸을 때 과연 사람은 가만있겠는가? 욥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욥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너라고 하는, 나 자신이라 하는 것 마저 나의 것이 아님까지 더 나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살할까요? 그래서 욥에 보면,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어요. “하나님, 제가 태어난 것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합니다. “네가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네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네가 태어난 것이 아니다. 너는 태어난 이유도 모르면서 태어났다.”

그렇게 시비를 걸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너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도를 닦는다든지, 자살을 한다든지 그런 방법이 아니고 그냥 그대로 있되 주님께서 나의 존재를 대신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 말이 상당히 어렵지요? 나를 안 건드려도 나보다 더 나 같은 분이 등장해서 나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자기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 자기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에 대한 관심이 없는 그것이 바로 나를 없애버리는 방법이다. 그게 욥기에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데 욥기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인간의 육체의 모양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저 자기 육체를 자랑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요. 그 육체의 모양냄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훼손하는 요소가 육체의 모양을 나타낼 때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나는 내 잘난 체 한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너 잘난 체, 나는 내 잘난 체함으로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요소를 지금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그 말이에요. 제가 전에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안식일 이야기하면서, 율법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 민수기에 나와 있어요. 그렇게 했을 때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 못 지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이 자기 약혼자라면? 자기 피앙세라면? 그리고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면 그래도 돌로 칠 수 있겠습니까? 못 치지요.

왜냐하면 나의 것이니까. 자기가 굉장히 미워해서 죽이고 싶은 사람인데 마침 안식일에 나무한다? 1번 타자로 바위 이만한 것 가지고 “네가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법을 어기다니!” 하고 정면으로 머리를 박살내 버릴 거예요. ‘잘됐다. 이참에.’

그러나 내가 그 율법을 위반할 때는 이 핑계 저 핑계, 사회가 어떻고, 친구를 잘못 만나서,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리잖아요. 율법은 남을 비판하는 그 비판의 검을 네 자신에게 돌리라는 겁니다. 남 비판을 너 자신에게 돌려봐라. 이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예수님은 남 비평하러 오신 분이 아니에요. 비평받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그 비평받음을 자기 몸으로 인수인계 하신 분이에요. “내가 맞으마. 너는 네 인생에 대해 신경 쓰지 마. 이 저주의 모든 것을 내가 다 맞아줄게.”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채찍에 맞음으로,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이 있어요.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그게 끝이에요? 아니에요. 우리가 나음을 입은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일과 나라는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 이게 믿음이에요.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지. 그게 아니에요. 욥이 그걸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프로젝트에 본인이 참여했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해서 “나 자신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나는 어떻게 행복합니까?” 계속 자기 문제에 있는 거예요.

자기 문제에서 손을 놔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변화산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이 이야기 또 할 줄 알았어요. 제가 또 가봤습니다. 다볼산에 뺑뺑이 돌아서 올라갔는데 오후 5시라 너무 늦어서 못 들어갔지만 바깥에서 봤어요.

성전이 세 개인데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또 하나는 모세,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배당 지어놨어요. 그 변화산에서 저쪽의 세분 그리고 이쪽에 세분이거든요.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등장했습니다. 3이라는 숫자에 맞춰서 예수님 제자 중에서 임원진들 세 명 모았어요. 야고보 베드로 요한, 이 세 사람이 올라갑니다.

이쪽 산, 지상에서 올라온 예수님의 제자들 중 뽑힌 세 명이 이게 현실이냐, 이게 실제냐, 이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인물이냐?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느냐? 한 번 비교 대조해 보라 그 말이지요.

세 사람이 거기 올라가서 좋아도 너무 좋았지요. 해같이 빛났으니까. 조명시설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냥 튀어나왔어요. 여기가 좋다는 거예요. 여기가 좋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를 생각하지 않는 이 장소가 좋다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의 고백과 비슷해요. 거기에 보면,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너무 좋았다는 겁니다. 너무 좋았다는 표현을 이렇게 해요. 내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좋았다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은, 내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앞으로 내 월급이 얼마인지 그것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좋다는 겁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없듯이 모든 것을 얻은 사람 앞에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주 시시한 일,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 집에 물이 새는 것은 문제꺼리도 안 되고 그것은 온 천하에 포함된 것으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약에 그런 것이 문제꺼리가 된다면 여러분은 유혹받아요. 돈과 인기와 권세의 주가라는 유혹 앞에 자꾸 말려드는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누가 날 욕할 거라는 것, 뒤에서 험담할 것이라는 것, 그것조차도 생각할 필요 없어요.

야, 참, 저는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 교회 오전 예배 때 남자 성도님들이 돌아가면서 기도하는데 나는 절반쯤은 빠질 줄 알았어요. 왜? 남들 앞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과 연결시켜 볼 때에 이것은 정말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여기서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여기서 듣는 사람이나 동영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하는 꼬라지하고 기도하고 영 안 맞네, 이런 식으로 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온갖 뒷담화들이 얼마나 뒤숭숭하게 만들겠어요.

기존교회야 매뉴얼이 다 나와 있으니까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남북통일이니 뭐니 주르륵 하면 되지만 그런 것을 아주 씩씩거리면서 싫어하는 마당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벌이십니다.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고, 반타작, 반 토막이나 하면 남는 것이다. 안하시면 할 수 없고 알아서 하세요.’라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이어지고 있어요. 지속적으로. 언제까지 갈지는 장담 못합니다.

육체의 모양에서 13절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14절 십자가 이야기를 전혀 이해 못해요. 그래서 14절 말씀 대하기가 아주 주저스러운데 아직까지 하나도 설명 안했어요. 14절의 내용은 뭐냐 하면,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거든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음을 자랑한다는 뜻이에요.

십자가라고 거창하게 할 필요 없이 나의 죽음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자, 어느 20대가 있는데 그 20대가 결혼을 앞두고 어느 아가씨하고 선 자리에 나갔다 합시다. 호텔 커피숍에 마주 앉아서 낯선 타인이지만 이야기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참하시네요. 성실해 보이십니다.” 되도 않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해서 파토 안내려고 애를 쓰는데 한 5분쯤 지나면 첫 인상 보는 것은 마감되는데 이야기가 자꾸 길어져요. 10분, 20분 길어지게 되면 드디어 본질이 다 드러나거든요.

그런데 20대 후반에 은혜를 받은 어떤 청년이 말하기를 “저는 정말 기뻐요. 저는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기뻐요.”라는 이야기를 해보세요. 상대방 여자는 기절초풍 할 거예요. 곧 죽을 사람하고 결혼한다면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자기 인생은 손해 보잖아요.

십자가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만약에 어느 가장이 있는데 연세 80, 90이 되어서 나 죽는다 하면 ‘잘 됐어요. 빨리 죽으세요.’ 하겠는데 이제 50대쯤 된 가장이 “여보, 나는 기뻐. 은혜를 받아서 나는 곧 죽을 거야. 너무 기뻐. 십자가 복음 알았으니 나는 나의 죽음을 자랑할거야.” 이렇게 나온다면 다른 식구들,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나 아들이 “아빠, 그러시면 안돼요.” 하고 말릴 거예요.

그 정도로 인간에게는 죽음을 자랑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인간은 없어요.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니다. 13절에 있는 사람이 모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14절의 이런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14절을 그냥 보기만 하세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든지, 나는 세상에서 이미 죽은 자고 그리고 내가 살았다면 세상 사람은 반대로 죽은 자다, 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진정성 있게 나올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걸 아예 시도하지 마세요. 13절에서 그쳐야 돼요. 그리고 13절에서 넘어가는 것은 우리 소관 아닙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있는 것을 개선해서 새사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는 13절에서 스톱, 해야 돼요.

우린 육체의 모양, 그게 우리의 살아가는 이유고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육체의 모양이기 때문에 육체의 모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그것이 천하보다 귀하고, 현재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려야 된다는 생존에 대한 집념, 이것만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세월 속에, 그리고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질주합니다.

자전가 타고 가다가 스톱, 하면 넘어지듯이 우리는 내가 누구냐, 인생이 무엇이냐, 그런 것은 몰라요. 계속 뒤에서 떠밀고 앞에서 당기면 그냥 세월 따라 달려가던 대로 달려가요. 그걸 만약에 스톱, 해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뒤처졌거나 아니면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본 책이 있어요. 노래집인데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보니까 그 노래집의 삽화에 40대 아주머니가 있어요. 삼각형모양으로 스카프로 머리에 두르고, 가을철에 코트 깃을 세우고, 연노랑 색 버버리를 입고, 해변가 외따로이 떨어져 나온 한적한 돌 위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어요. 노래는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그런 옛날 트로트 노래집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보면 그런 삽화가 있었어요. 그 여인을 보면 ‘아, 나도 커서 저런 여인과 결혼해야지.’ 할 정도로 굉장히 우아하고 낭만적으로 보였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 여인은 지금 시간 속에 멈춘 거예요. 달리지를 않고.

멈춰버리면 그렇게 바닷가에 나와요. 그것도 혼자. 제가 장담합니다. 바닷가에 혼자 떠도는 사람은 분명히 사법고시 불합격했거나, 수능점수 잘 안 나왔거나, 취직이 안 되었거나, 파혼을 당했거나, 이런 사람만 몽돌해변의 바닷가에 혼자 나와 있을 거예요.

반드시 같이 나온 경우는 괜찮은데 혼자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은 뭔가 약간의 자살적인 징후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낭만을 즐긴다는 것은 뭔가 사는 것이 잘 수월하지 않고 지금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닷가에서 그러는데 바닷가는 육지의 끝이잖아요. 칵, 그만 들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으로 나와 있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내가 누군지, 사는 것이 뭔지, 죽는 것이 뭔지, 하나님이 누군지, 관심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유행 따라서 단풍들면 팔공산 단풍구경 이 때 놓치면 안 된다 싶어 남 하는 대로 따라 하기 바쁘지 내가 누구냐를 관심두지 않아요. 시간 속에 정지하면 자빠지고 넘어집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그런데 14절은 뭐냐? 세월아, 내월아, 가거라. 내 운명은 이미 확정된 겁니다. 결정 난 거예요. 아무 걱정 없어요. 사도행전 27장 23, 24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은 어떤 대목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지중해에서 풍랑이 일었습니다. ‘유라굴라’라는 풍랑이 일었고 그 풍랑에 의해서 배타고 있던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되었어요.

얼마나 풍랑이 배를 흔들어댔는데 아주 죽으라고 흔들어대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풍랑이 일어나서 열 두 제자가 탄 배를 죽으라고 흔들어댔습니다. “이래도 안 죽어?” 하는 식으로 심술을 부리면서 움직이는 그 대목과 같은 대목입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폭풍 속에서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는 고백을 했어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의 14절의 고백입니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은 반드시 무엇을 주위에 둘러싸이느냐 하면, 육체의 모양을 내는 사람에게 완전 포위된 가운데서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뭐가 있어야 건너가지요. 없어요.

없는데 우리 주변에 뭐가 몰려오느냐 하면, 세상육체의 모양,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자랑거리, 이런 것들로 완전히 세상이 우리를 포위하게 될 때, 그 때 주께서 저 사람들과 너의 차이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도바울에게 폭풍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제가 하는 이 말은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무슨 말이냐 하면, 내 힘으로 신앙생활 한다든지, 바르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신앙을 잘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쁜 것이 아니고 없어져야 될, 기억하지 말아야 될, 관심두지 말아야 될 내가 자꾸 관심이 더 가게 돼요.

그러면 내가 관심 둔 나를 내가 포기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나 믿음 좋다, 나 십자가 복음 안다, 이것은 십자가를 가로막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가 또 살겠다는 옛날 그 버릇이 또 나와 버렸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 잘할 수 있습니까?” 저는 답변합니다. 하지 마세요. 엉뚱한데 관심을 둬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하지 마세요. 왜요? 구원되고 안 되고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는 구원하고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도록 주님 소관이지 본인이 노력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에게 희망과 기대를 줘서는 안돼요. 사람에게 기대와 희망을 줘버리면 사람은 노림수를 가지고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기가 더욱 더 힘들어요. 그것도 유혹입니다. 악마의 유혹이에요.

다만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이 세상 자체가 폭풍이라는 거예요. 방탄소년단 폭풍, 엑소,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의 온갖 문화, it산업, 인공지능, 수많은 유혹의 폭풍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아 안할 수가 없어요. 따라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과 견줘서 그들보다 미진한 것에 대해서 내 인생 못났다, 나는 인간도 아니야, 평생에 골프도 못 쳐보고 이게 남자인가, 자꾸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러나 그게 바로 폭풍속입니다. 천하보다 더 좋아해야 될 것은 놓쳐버리고 천하가 좋은 거예요. 천하제일의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는 겁니다.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너 커서 뭐 될래?” “엄마, 나 커서 죽을 거야.” “그래, 그게 바로 주의 뜻이야.” 이렇게 가르치고 주고받는 다정한 대화가 가정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걸 어렵게 해서 욕망의 세 가지 요소라고 하는데, 생산의 연결과 등록의 연결과 소비의 연결이라고 했어요.

생산의 연결이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욕망이 내 몸을 통해서 욕심을 생산해 내는 그 중심체가 나라는 것. 내가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나를 매일같이 건드리고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은 내가 어떻게 관리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그 욕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그냥 일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등록해요. 소속의 욕구라 하는데 어디에 등록을 합니다. 이번에 여러분이 보는 뉴스에 온두라스 나오잖아요. 온두라스에서 1900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미국에 가겠다는 거예요. 완전히 출애굽입니다. 생존을 위한 출애굽. 미국이 약속의 땅이에요. 폭염 가운데서 애들 데리고 1900킬로를 갈 수 있다는 것은 오직 무엇 때문인가? 바로 희망 때문이에요. 희망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좌절도 이기고 어떤 난관도 굴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게 한다는 거예요. 의지의 온두라스.

그게 바로 악마의 짓입니다.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거예요. 온두라스에 등록된 국민이 안 되고 미국, USA에 등록된 욕망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생산되어서 1900킬로 달려서 미국에 가서 등록하겠다는 거예요. 그것이 끝이 아니고 마지막에 뭐냐? 소비의 연결이 있어요.

이제는 내 자신의 쌓아놓은 욕망을 소비하는데서 어떤 쾌락을 얻고 쾌감을 얻겠다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움직임은 이 세 가지로 다 표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14절로 이제 넘어가야 돼요. 그러면 14절의 이야기는 뭐냐?

다시 읽어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십자가는 아까 말한 대로 죽음이지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그 때 해가 빛을 잃었다 했어요. 이것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평소에는 해와 달이 마치 인간을 위하라는 해고 달이고 별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화성이 있는 이유는 지구가 온난화가 되어서 문제가 생기면 빨리 화성으로 건너가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우주에 지구와 똑같은 삶의 환경이 보장된 그런 별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한 행성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문학자들은 거기에 어떤 목표와 희망을 걸고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과학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자기 분수와 위치를 모르는 데서부터 과학이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무조건 잘되어야 되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되고, 이것부터 과학이 시작돼요. 과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도 하나의 유혹이에요.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해가 빛을 잃었어요. 우리 하나님이 죽는데 해가 같이 보조 맞춰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면 이 해도 빛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슬퍼서! 나는 주님 없이는 살 가치도 없다, 라고 해와 달과 별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거예요. 십자가, 그 십자가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자랑한다, 십자가를 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죽음을 내 안에 심는 거예요. 살다 보면 죽겠지, 가 아니라 아예 죽음을 내 안에 잉태하는 겁니다.

임플란트 치료 받아보신 분은 알겠지만 임플란트 씌우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번 다물어 보세요. 딱딱, 소리 내 보세요.” 하거든요. 죽음이 장착되고 난 뒤에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가 한번 해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뭐냐? 살다 보면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들춰내기 위해서, ‘나는 누구덕분에 살지?’라는 고백이 나오라고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나는 죽는데 왜 죽지?’라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오늘도 살아서 차 몰고 교회까지 오신 겁니다.

산다는 것은 주님의 죽음에 합세하기 위한 참여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삶이 죽음의 일부입니다. 죽음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런 연관관계가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주님의 십자가와 나의 삶이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자기 육체의 모양을 내는, 남 유행 따라 사는 일에 정신 팔려 있는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내 안에 예수님의 죽음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의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없습니다. 성도는 없어요. 없는데 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내 욕심대로 나서 그냥 살다가 갈 뿐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령이 찾아오고, 십자가 영이 찾아오고, 주님이 이 폭풍 속에서, 이 유혹의 바다 속에서 “바울아, 바울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주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생명도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주신 여분의 예수님의 생명이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 일도 없고, 내 몸도 없고, 주님의 몸으로만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십자가를 운반하는 운반체에요. dna빼버리세요. 예수님의 죽음을 그 dna자리에 집어넣으세요. 육으로 난 것, dna에서 난 것은 dna에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 14절의 말씀은 “여러분, 교회 나오셔서 헌금 많이 하시고 십일조 많이 하시고 목사 섬기시고, 교회 봉사하시고, 기도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나오시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이 구원을 얻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사기라는 거예요. 그런 소리 나온다는 것이 사기라는 거예요. 왜? 욥이 마지막에 생각했던 것,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제사해야 된다는 말은, 욥 안의 그리스도께서 욥 자신에게 너를 용서함으로서 이제부터 네가 가졌던 구닥다리 목숨은 날라 가버리고, 이 세상의 일부로서의 목숨은 날라 가버리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예수님 몸에서 발생되는 생명이 네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이야기를 이 본문에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뭐냐? 성도는 방주입니다. 방주는 뭐냐? 심판과 심판에서 면제됨을 가름하는 경계선이죠. 14절 끝에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하나님의 언약을 자랑하니, 하나님이 주신 경계선을 자랑하니,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을 자랑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방주의 잣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내 몸을 가지고 세상을 똑바로 보세요. 세상은 육체의 모양의 집합체, 진열장, 그것밖에 안돼요. 그 바다에요. 육체의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그 물결의 넘침이 세상입니다. 육체의 모양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들은 다양함이에요.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살아야 된다.

그러나 우리 언약에서는 다양함이 필요 없어요. 오직 하나뿐입니다. only you, 오직 하나뿐이에요. 예수님 십자가만 자랑해요.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교회 가보세요. 기도 자랑, 헌금 자랑, 신앙연조자랑, 장로자랑, 목사자랑, 권사자랑, 전도사자랑, 집사자랑, 넘실거리는 육체의 모양.

다른 교회를 이기세, 다른 교회보다 더 크세. 교인들은 죽을 지경이에요. 자기 집 살림도 못사는데 두 집 살림해야 돼요. 교회 살림 살아야지, 자기 집도 살려야지. 이제는, 이제는 그만! 주께서 우리를 멈추지 않습니다.

나중에 부도나거든 바닷가에 가고요. 같이 가세요. 같이 가야 돼요. 이제 스톱, 할 것도 없어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주님의 나라 갈 때까지. 우리는 방주니까 노를 저을 필요도 없어요. 주께서 우리를 더욱더 세상의 모양으로 살게 하실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을 강남에 살게 하실 거예요. 맨해튼에 살게 하실 거예요.

여러분 주위가 최상의 유행이 넘치는, 가장 욕심들이 많은 곳. 여러분 와 닿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변이 전부 다 “나 이렇게 잘났다. 이렇게 부자다.” 그런 곳에 휩쓸리잖아요. 내 자식 공부 잘했다, MIT대학에 들어갔다, 온갖 것 속에 여러분을 속하게 만들 거예요.

그럴 때 여러분은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가 저런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시는 것, 그게 바로 여러분의 믿음 좋은 것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저들과 똑같은데 왜 저에게 천국을 허락하십니까, 십자가를 허락하십니까? 주님, 주님을 왜 알게 하십니까?”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리석고 어리석은 저희들. 남들 죽 가니까, 넓은 길로 가니까 그 길에 생명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따라갔던 저희들, 주님 가신 길 몰랐고 세상 가는 길, 교회 가는 길로 봤습니다. 주여, 성령 오셔서, 십자가로 오셔서 일찍이 사랑했기에 우리 목덜미를 잡아채서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게 하셨사오니 이제는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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