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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 12:49:59 조회 : 45250         
   썩어질 것 181007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썩어질 것(갈라디아서 6:7-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e7JJDJgZ8Y, Hit:66
 이근호 18-10-07 13:39 
썩어질 것

2018년 10월 7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6:7-8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도 바울이 세상을 보는 눈은 영적입니다. 이로서 사도 바울처럼 세상을 보지 않는 사람은 육적인 한계에 여전히 갇혀 있음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안목은 육의 세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지 못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육의 세계를 능가하는’ 용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이 영의 세계를 못 보게 발목을 잡고 있는가 그 실재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목표와 이상과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자신이 세운 목표와 목적 달성에 열을 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라고 규정해버립니다. 즉 참으로 영적 존재는 ‘자기 육체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는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이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벌리시는 업무라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으면서 갈라집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같은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런 안목은 어떻게, 무슨 식으로 주어질까요? 세상이 육이라는 사실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육’이라는 개념 대신에, 그냥 ‘인간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상식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29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육이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모두다 예수님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는 곧 마치 “물 위를 못 걷는 인간은 다 지옥가거라”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즉 물 걷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물 못 걷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나타나신 결과성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더는 더 세상관을 구성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표준적 모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알려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운데 못박히시고 양편에 두 강도가 달리는 세트말입니다.

함께 십자가 달린 그들의 직업이 강도라는 점에 유념합시다.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는 강도 수준의 죄인 취급 당했다는 말이요 이는 그만큼 이 세상의 사람들의 안목이 근원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예수님 양편에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모델로서 ‘강도들’이 뽑힌 겁니다.

놀라운 점은 두 강도 중에 어느 한 강도가 천국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는 곧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쇼킹한 뉴스와 같습니다. 즉 천국은 강도가 못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강도가 들어갈 수는 세계라는 겁니다. 물론 모든 강도가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는, 전에 자신이 자신을 다루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즉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비로소 내가 여기 존재했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세계요 천국입니다. 이 효과마저 예수님에 의해서 생긴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결코 ‘영’과 ‘육’이라는 대치적 개념으로 구분되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육’인지를 모릅니다. 썩어가면서 썩어가는 이유를 모릅니다. 예수님 그냥 마귀에게 인질로 잡혀있어 그저 스스로 존엄성과 숭고함을 챙기며 살면 최고의 인간성을 유지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회적으로 제일 무시당하는 계층으로부터 가장 고급진 계층까지 다 훑고 계셨습니다.

처음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각색 병든 자나 귀신들린 자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고통을 면제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충동적인 자기네들 요구사항들이 예수님에게 주문했습니다. 많이 한맺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윗 계층의 눈으로 보게 되면 그들은 상대적으로 죄인들이요 막데 먹은 자들입니다. 천박한 자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의 육적인 만족을 굶주려 있는 자들로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점차 사회적 계층을 높여가십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따지는 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늘 부가가치를 고려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 만나서 자기에게 얼마나 많이 추가적 이익을 받아낼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부가가치란, 평소에 자기 노동으로 인한 추가적 가치 창출을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기에 예수님을 상대할 때도 자신의 이익을 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실 때,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께서는 ‘떡을 무상으로 제공하시는 좋은 임금님상’으로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번 다시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게 언질을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따르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은 없다”이 발언에 숱한 사람들이 그 시로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남아 있던 제자들도 결국에는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배신하기 역할을 위해 남겨진 자들입니다. 어디에도 육 아닌 것이 없습니다.

최고급 단계의 육을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종교적 행위로 자신의 육을 가리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육을 영으로 변경시키려고 시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5:18-20에 보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3:27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의 최고점은 육으로 영을 위장하는 겁니다. 영은 결코 육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마치 인간이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결코 자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을 지켜주고 위로하고 그 어떤 것도 나무라거나 꾸중하거나 잔소리하거나 꾸중하지 않고 모든 투정을 다 받아줄 그런 메시야, 그런 사람을 원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여전히 악마의 인질로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쓰레기에 불과합니다.(고전 4:13) 그래서 인간과 함께 있는 악마는 자꾸만 십자가 복음을 밀어내고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어떤 지일까요? 그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동방박사와 같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화살표같은 기능을 하는 별을 따라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여 없애고자 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음을 압니다. 마지막 천사의 말을 듣고 헤롯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의 사람이란 세상을 통해서 저주의 이유와 흔적을 발견하는 자들입니다. 이미 구원된 안목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바로 알고, 우리 자신을 바로 알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10-07 22:39 
308강-갈 6장 7-8(썩어질 것)1810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7-8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도바울이 쓰는 용어를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용어 안에 그 폭이,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을 보는 폭보다 훨씬 깊고 훨씬 넓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오직 자신이 세운 목표와 목적에 모든 것을 헌신하지요. 나만 잘되면 세상 괜찮게 돌아간다고 여깁니다. 그만큼 폭이 좁은 거예요. 범위가 작은 겁니다.

사도바울은 키웁니다. 세상 전부를 다 포괄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용어를 사용하지요. 그 용어를 사도바울이 그렇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바울이 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 특히 신학자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사도바울의 성경을, 개인적인 편지니까, 개인적인 사견으로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하고 자기들의 신학을 라이벌관계처럼 형성해서 예수님 빼놓고는 똑같지 않느냐고 우기는데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나오지요.

악마가 증명해 줍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뭐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면 바라기는 그 다음 순서에 저와 여러분들이 꼭 끼어들기를 바랍니다. 악마의 나라에서 알아주는 사람.

악마는 이미 세상을 점령하고 접수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전부라는 것을 그들의 사고방식에 집어넣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에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을 때 악마가 시험하는 출제범위를 보세요.

출제범위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 말은, 오늘날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숫자지요. 숫자 많으면, 인기 많으면 그게 성공인줄 알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막 대비시킨 그 이유, 그 취지를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누가 봐도 부자는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서 거지 나사로는 누가 봐도 인생 조진 거예요. 일가친척에게 욕 되게 얻어먹었을 겁니다. 나가 죽으라고. 그렇게 사니 뭐하냐고.

그런데 꼭 9회 말에 역전 들어가는 거지요.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인생으로서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고 난 뒤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을 잘 살았다고 하는데 부자가 몰랐던 것은,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지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몰랐고,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자체부터 이미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안 겁니다.

죽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이미 구분되고 분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세상을 크게 본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할 때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모를 뻔한 기존 세상의 전부, 보편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에요.

그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는 기본적으로 자기사랑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자기 가족사랑, 그리고 자기 직장사랑, 자기 교회사랑, 자기 종교사랑, 자기 나라사랑, 전부 다 육체입니다. 전부 다 육이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거기에 관여되어 있거든요. 자기가 거기에 관여되어 있어요.

우리는 자기육체를 위해 살면서 예수께, 삼위일체 하나님께 얼마나 손바닥 비비면서 빕니까? 내 육체 잘 되라고 얼마나 빌었습니까? 그게 세상을 좁게 본 거예요. 사도바울이 쓰는 용어는 이 세상을 능가하는 개념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 그 맞은편에 그것과 대치가 되어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성령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대치관계니까, 대치되어 있으니까 성령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성령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참 쉬워요. 이처럼 쉬울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 끝.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런데 간단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게 이렇게 간단하게 나오니까 이 간단함이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보고 “이 가짜야.”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진정으로 죽지 않았으면서도 죽은 척을 하고 있는 이 가짜야. 정말 성도가 제대로 성령을 받게 되면 나라는 것이 육일뿐이라는 것을 아주 깊숙이 체험하게 돼요. 이 몸이 있는 한 나는 ‘나를 위해서’를 포기를 할 수 없는 속성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항상 그 결과는 나를 위해서 얼마나 좋아졌는가를 따지게 되는 본성이 우리한테 있어요. 그 본성에 대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다 알려줬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9절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물 위를 못 걷는 사람은 다 지옥가라는 이야기에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우리하고 똑같은 육체를 갖고 있는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 그 말이지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으면 인간이 물위를 걷는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인 거예요. 그것은 귀신들이나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니까 제자들이 귀신이 온다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자기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제공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뭐라는 사실을 보여준 겁니다. 육을 가지면서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 만들기.

와, 이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자체가, 네가 할 수 있는 일 같으면 내가 이 땅에 오지도 않았다는 그런 뜻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그 말씀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네 육으로 몸부림 쳐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사견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육과 영을, 또는 육과 성령을 대비시키는 것은 이 땅에 누가 오셨기 때문인가?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진 사항이에요. 예수님 빼고 이야기하게 되면, 이것은 이 내용 자체가 거짓말이 되어버려요.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성도가 아니라고.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이 나와야 돼요. 그리스도 사건이 없던 그 시절, 그 때 그 상황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니라 그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던 시절이 있잖아요. 서로 경쟁하고 잘난 체 하던 그 시대, 내 사람이 몇 명이라는 그 시대, 우리 가정 잘 지키고, 내 자식 잘 키웠다는 그런 것, 십자가 빼고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 기준에 의하면 물 위를 걷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것은 육이고, 지옥 가는 사람이지요.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내가 나를 아는 범위가 확대되고 확장된 거예요. 이 쯤 알았으면 나는 나답다고 여긴 그것이 와장창 다 깨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 빼놓고, 십자가 빼놓고, 뭐 과학적으로 공부하고, 수능 잘 치고, 철학공부 좀 하고, 인문학 공부 하고, 백날 해 봐야, 종교 연구하고, 신학 공부하고, 아무리 해봐야 그것으로는 자기를 몰라요.

왜냐하면 공부한 당사자가 본인이기 때문에 본인이 공부한 덕분으로 내가 이만큼 도가 텄다는 그런 것만 내놓을 뿐이고 아무것도 없어요. 사도바울의 오늘 이야기는 뭐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살아도 헛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크게 알고 넓게 아는 사람의 이야기에요.

세상을 살아도 소용없는 사람의 대표가 가룟유다거든요. 가룟유다가 하나님의 주신 햇빛과 공기와 양식 가지고 열심히 살았지만 그 사람 속에는 사탄이 들어있었고, 사탄은 가룟유다를 통해서 사탄이 무엇인가를 실효적으로, 모델케이스로 보여줬습니다.

원래 사탄은 영적존재기 때문에 안 나타나요. 그런데 가룟유다를 통해서 사탄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시범조교가 가룟유다입니다. 사탄이 뭐냐? 나를 괴롭히는 것이 사탄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사탄이에요.

사탄이 노리는 것은, 우리가 인생 살면서 순간순간 ‘예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지? 없잖아.’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그리스도가 별 볼일 없다는 것, 필요 없다는 것을 느껴지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사탄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 한다고 예수님 십자가 전하고 복음 전했는데 처음에 교인들 50명 왔는데 한 달 뒤에 20명 남았고, 두 달 뒤에 열 명 남았고, 6개월 뒤에 자기 아내 남았고, 1년 뒤에 자기 아내마저 떠났고, 이런 식으로 되면 그 사람은 정말 잘 전한 거예요.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에게 육의 구원이란 육에서 와서 육으로 되돌아가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미사일 쏴봐야 땅으로 떨어지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종교적인 노력, 기독교적인 노력은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도로 떨어지는 겁니다.

아무리 심어도 이 땅 자체가 예수님을 싫어하는 요소로 차 있기 때문에 땅 자체가 뭘 심든지 썩게 되어 있어요.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은 바로 인간과 땅이 떨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는 땅이 전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무리 고상한 것을 심어도 전부 다 썩게 되어 있어요. 이 땅,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을 밀어냈잖아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서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로 세트로 잘 보여줬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냥 십자가로 보지 말고 세트로 보시는 것이 좋아요.

세트가 되면 예수님이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양쪽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세 명이 한 세트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양쪽 둘 다 직업군이 강도에요. 강도가 강도질 하는 이유가 하늘나라 가려고 강도질 한 것이 아니거든요. 세상을 위해서, 자기육신을 위해서 심다 보니 강도된 겁니다.

물론 칼 쥔 강도인지, 아니면 권력을 쥔 강도인지, 아니면 법을 논하는 강도인지, 안 그러면 신학지식을 외치는 강도인지, 그것은 각기 달라도 강도인 것은 한결같습니다. 왜? 자기육체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둘 다 똑같은 입장이에요. 둘 다 육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예수님만 구원되고 양쪽은 다 지옥가야 돼요. 그런데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사람이 둘 중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거예요.

정말 이럴 수 없습니다. 어째 이런 일이? 강도가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천국이 강도 나라입니까? 도둑놈 나라에요? 어떻게 강도가 천국에 갑니까? 여러분, 그게 천국이에요. 강도도 받아주는 곳이 천국입니다. 모든 강도는 안 받아줘요. 모든 강도는 안 받아주는데 강도를 했든, 간음을 했든, 살인을 했든 관계가 없습니다.

강도가 예수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님, 저를 생각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낮설교에 했어요. 전에 강도질을 할 때는, 내가 너의 것을 훔치겠다, 빼앗겠다, 이렇게 ‘내가’로 시작했는데 구원받은 강도는 자기로 시작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나를 주님에게 인계한 거예요.

“주님이여”, 그 다음에 “주님 앞에 있는 나를”, 주님 보시기에 ‘너’지요, 저를 생각해 달라.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어찌 네가 나에게 부탁할 맘을 다 갖느냐? 평생에 너는 너밖에 모르면서 어찌 네가? 지금 같이 죽어가는 꼴이잖아요. 별 다른 것이 없어요. 다 사형당하고 있다고요. 똑같은 처지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처지에 있는 자에게 자신의 모든 미래의 운명까지 넘겨줄 수 있는 안목,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보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강도는 같이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에 반해서 다른 강도, 세트가 되어 있는 다른 강도는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줄을 몰랐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라고 했을 때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디에 주목해야 되느냐 하면, 다 주목해야 되지만 그 중에서 ‘썩어짐’ ‘썩어진 것’이라는 거기에 주목을 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육은 썩어져야 될 속성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썩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그렇게 되어 있지만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쓰레기로 되어 있어요. 더러운 것, 만물의 찌꺼기,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그러니까 쓰레기지요.

쓰레기의 위치에 있지 아니하면, 자기가 쓰레기인 것을 모르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 홀로 살아가는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쓰레기만도 못한 그 인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쓰레기더미에 갇혀있다고 봅시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강도의 집단 속에서 하나의 강도로서 산다고 봅시다. 실은 강도 맞고요. 전 같으면 다 같은 처지에서 다른 강도 같으면 또 다른 강도에게 도움을 요청할 텐데, 영적인 사람 같으면 똑같은 강도와 쓰레기같은 인간들에게 자기자신이 넘겨지지는 않을 거예요.

누구한테 넘기는가? 예수님께 넘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찬스, 그 기회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네가 쓰레기에 불과한 것을 언제쯤 알래?” 그러면 쓰레기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쓰레기는 쓰레기답게 살면 돼요.

쓰레기의 특징이 뭐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더 살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는 자기의 의로움이 없다는 것. 이 두 가지에요. 내세울 만한 의로움이 없고 내세울만한 의로움이 없으니까 더 살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듣는 태도가 ‘별로’라고 하는 느낌이 들어요. ‘남의 이야기,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왜 하십니까?’라는 느낌 같은데. 예수님은 육과 영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영이었으면 하늘에서 낚싯대로 건져서 올렸을 거예요. 그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몸소 이 땅에 오셨다 하는 것은 육을 충분히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육은 자기가 육인 것을 아무도 몰라요. 자기가 잘난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쓰레기 아닌 줄 알고 있어요. 살아도 이게 죽어 있는데 그냥 살아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고 우기니까 나름대로의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인생계획과 목표를 세워요.

“다음 월드컵에는 16강 들어가자. LA다저스는 이번에 우승 한 번 해야지. 류현진도 있으니.” 이런 것. 사람들이 뭔가 본다는 것은 그냥 보지 않아요. 기대를 걸고 봐요. 희망을 걸고 본다고요. 세상에서 희망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아요.

살아서 뭐할 건데요? 희망을 달성하겠다고요? 목표와 목적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해요. 예수님이 이렇게 정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게 예수님의 목표고 목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목적, 목표를 위해서는 우리의 할 일은 썩어가는 그것만 하면 돼요. 너무 욕심내지 맙시다. 어떻게 쓰레기가 쓰레기답게 사는가, 그것만 하면 돼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육과 영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육도 있고 영도 있고 다 있거든요.

그래서 육으로 십자가에 죽을 때 아버지에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했잖아요. 그게 육의 전부에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육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 자신은 육이 어느 정도의 육인지를 몰라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한평생 살게 하시는데 살아가면서 그냥 빈 시간 보내게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네가 이 정도로 육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만듭니다. 실감나게 하시는데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의 육으로 오셔가지고 아래부터 위까지 훑으면서 올라갑니다.

대충 보게 되면 세 가지 계층이 보여요. 첫 번째는 그냥 아래단계. 중간쯤의 중간단계. 아랫단계의 육, 중간단계의 육, 그리고 고급단계의 고급진 육, 이 세 단계를 주께서는 공생애시작부터 아래부터 죽 훑어 올라갑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누굴 찾아가느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하층민들, 그리고 장소도 갈릴리, 그리고 혈통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피를 가진 사람들, 유대인인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온갖 잡종들이 다 있는 그 동네, 그 동네를 이사야에서는 어두운 동네라고 했어요.

마치 요새 같으면 부두의 뒷골목의 어두운 곳, 분위기 이상한 데, 천박스러운 데, 온갖 저질 인간은 다 집결한 그곳, 그렇게 본 거예요. 그 당시 유대사회란 그런 곳이고 어두운 곳이에요. 빛이 없는 동네에요. 어두운 곳, 그 밑바닥 사람들에게 빛이 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의 육적인 요소를 유감없이 나타냈습니다.

병 고쳐 주세요, 귀신 나가게 해주세요. 노골적이고 상당히 충동적이지요. 마치 개한테 돌을 던지면 마구 덤벼드는 것처럼 그냥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따지지 않으면서 이성적이지 않는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순박한데 노골적으로 말해서 막돼먹은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욕을 한 거예요. “노는 가락이라고 어째 죄수들하고 술꾼들하고 노느냐? 메시아라면 좀 고상하게 놀지. 어떻게 막달라마리아같은, 행세 안 좋다고 온 동네에 다 소문난 그런 행실 나쁜 여자와 상대해서 환대나 받고. 뭐가 그러냐! 값싸게 놀기는!” 이런 식으로요.

출신 자체가 더럽다고 저평가 받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은 시작을 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뭐냐? 충동적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원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부 다, 방금 이것을 아래쪽 저질의 계층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이 저질을 밑바탕에, 내부에 기초소로 다 깔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교회 문 나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뭔가 맘속에 우러나는 것이 딴 게 아니고 이겁니다. 마음껏 함께 울어줄 사람, 마음껏 함께 웃어줄 사람. 어디 그런 사람 없어요?

마음껏 운다고 해서, 또 마음껏 웃는다고 해서 꾸중하지 않고, 나무라지 아니하고, 어떤 투정도 다 받아주는 사람, 참, 그런 사람 그립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 아래쪽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우리의 본성입니다.

천당이고 구원이고 그따위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살아가면서 정말 원하는 것은, 모든 나의 서러운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면서 꽉 안아줄 수 있는 사람. 탓하지 아니하고, 나무라지 아니하고. 그런 사람 있으면 교회도 갈 필요 없고, 구지 하나님 찾을 필요도 없어요. 그 사람만 있다면 더는 소원 없네.

그렇잖아요. 결혼은 왜 합니까? 여자들이 결혼을 왜 해요? 그런 사람 찾는 거예요. 결혼했는데 싸우면 ‘결혼해서 좋다고 했는데 친정 엄마보다도 못하다.’ 하면서 쪼르르 친정엄마한테 찾아가지요. “엄마 나 이 서방 때문에 못살겠다.” 가서 실컷 울고요. “나 애하고 둘이서 살래.” 이런 식으로.

엄마가 “좀 잘 알아보고 하지 왜 그렇게 성급하게 했나.” “그 때는 날 지켜줄 줄 알았지.” 날 보호하는 사람 찾는 거예요. 날 보호하는 사람 찾기. 이것은 20대든 30대든 관계없어요. 70대도 마찬가지고 90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 아멘이 나왔습니다.

날 지켜주는 사람, 예수고 하나님이고 필요 없어요. 나를 지켜주는 사람, 나한테 요만큼도 싫은 소리 안하는 사람, 무슨 짓을 해도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무조건, 무조건 안아주고 다독거려주고, 위로해주는 사람, 내가 위로하고 싶은 것을 대신 위로해주고, 내가 격려하고 싶은 것을 대신 격려해주는 사람.

종교가 뭐가 필요합니까? 그런 사람 찾으려고 교회 오는데. 물론 교회와도 실망하고 다 돌아가지만. 그게 썩었다는 거예요.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는 거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백날 귀신도 아는 그 썩었다는 소리를 해도 우리는 그 소리가 안 들립니다.

왜? 그게 전부인데요. 그게 가장 나다운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그런 실현을 위한 어떤 계기나 목표를 세우지 말고 완전히 전부 다 긁어내는 거예요. 진짜 너다움의 면면을 똑바로 네가 보라고요. 염색빛깔 날라 가면요, 원단 나옵니다. 우리의 원단을 다 보라고요, 원단을.

메시아가 왔다고 하니까 유대백성들이 수천 명이 우우 따라왔지요. 충동적으로 배고픈 것 해결한다고 소문나서 다 따라왔어요. 주님께서 휙 돌아봤어요. 그냥 돌아본 것이 아니고 휙, 돌아봤어요. “왜 따라왔는데 너희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이유는, 이 말씀대로 하면, 자기 육체를 위해서 계속 그 사태를 지속하고, 그 사고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 얻을 것은 얻고 챙길 것은 챙기겠다고 따라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육을 위해서, 배부른 까닭으로 나에게 왔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 많은 사람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돌려보냈습니다. 돌려보내는 방법은 간단했어요. 내 피와 내 살을 먹을 수 있느냐. 나 죽을 때 풍덩 같이 죽을 수 있느냐.

죽는 척 하지 말고, 그 따위 소리는 하지 말고, 나와 함께 죽을 수 있느냐. 죽는 척 말고 진짜 죽을 수 있느냐. 다 가버렸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열두 제자는 왜 남아 있느냐? 열두 제자도 가야 될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냐?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떨어지고 싶어도 못 떨어질 사람으로 나에게 부름을 받은 사람, 소명 받은 사람이에요. 나에게 온 거예요. 와서 열두제자가 보여준 것은 배신과 배신이었습니다. 육의 진정한 면면, 악마의 지배를 받는, 악마의 점령을 받는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바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누가 더 숭고하냐를 두고 대결하는 상태, 다투는 상태, 치열하게 다투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꽉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 전하고 우리가 설교를 듣지만 이것은 마치 뭐한테 설교하느냐 하면, 인질범에게 잡혀 있는 애한테 전화 거는 것과 똑같아요. 만약에 아버지가 인질범에게 전화를 해서 애 바꿔달라고 하니까 인질범이 전화를 받고서 “당신은 애한테 전화하지 마소. 당신 애 잘 데리고 있으니까 앞으로 나에게만 전화하라고.”

마귀가 대신 수화기 쥐고 전화 받는 거예요. 우리 말고 우리 속에 있는 악마가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퇴박을 놓고 강력하게 밀어내는 겁니다. “지금 당신 애 우리 품 안에서 잘 자라고 있어요.” 잘 먹고, 공부 잘하고, 씩씩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그러니 예수님 쪽에서 전화하지 말라고.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고,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자고.

그런 식으로 전화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더 센 세력이 사도바울의 의견조차도 “그것은 개인적인 편지잖아.” 이렇게 밀어내는 거예요. 세상을 넓게 못 보게 만들어요. 나만 잘된다는 그런 소리만 하라는 거예요. 나만 잘되면 되는 그런 소리만 설교에서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내 가정 잘되고, 내가 투자한 기업 잘되고, 내 땅 사놓은 것 잘 풀리고, 우리 교회 부흥되는 그 소리만 하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다 훑었습니다. 중간단계는 삭개오같이 약간 사는 사람들이에요. 상당히 계산적입니다. 계산적인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부가가치를 노리는 거예요.

반도체 하나가 4.5달러라면 천억 개를 팔면 4천 5백억 달러지요. 문제는 반도체 천억 개하고 그걸 팔아서 생긴 4천 5백억 달러하고 차이가 있어요. 4천 5백억 달러는 현찰이기 때문에 부가가치를 매길 수 있지만 그냥 천억 개의 반도체를 물건으로만 갖고 있는 것은 아무 소용없어요. 안 팔리면 소용없다 이 말이지요.

부가가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부가 생선 하나 팔아서 2천원 남기고 중간상인은 6천원 받고 식당에 넘길 때 4천원이 부가가치라는 겁니다. 부가가치라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나 쓰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이걸 시장에 돌리는 거예요. 그러면 가치가 생기는 그것. 내가 지금보다 더 부자 되기 위해서 남들 이용할 때 필요한 조치가 부가가치라는 겁니다.

과수원에 사과 심었는데 밥도 안 먹고 세 끼니 사과만 먹으려고 심지는 않잖아요. 모든 인간은 노동을 했으면 항상 거기에 대한 부가가치를 노리고 하는 거예요. 예수 믿을 때 어떤 이익이 있는가 하는 부가가치를 노리고 하는 그것이 약간 고급단계의 육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다시 말해서 기도하고 난 뒤에, 십일조 헌금하고 난 뒤에 얼마의 이익을 챙기는가? 그게 부가가치에요. 충동적인 것보다 더 못돼먹은, 아주 더 사악하고 더 악마에 가까운 모습이에요. 예수님 때문에 이런 혜택을 얻고, 예수님 때문에 가정이 이렇게 잘 풀렸다는 거예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밑에 충동적인 것을 감추고 있는 거예요. 원단색깔을 감추고 있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고급적인 것이 마태복음에 아주 수두룩하게 나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비를 악마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마태복음 15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교회라고 보면 되지요. 목사, 장로, 집사, 권사, 햇권사, 이 사람들이, 물론 평교인도 마찬가지고, 이 사람들이 교회 나왔을 때에 헌법에 꼭 교회 나와야 된다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국민의 의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 나올 때는 이런 고급진, 더 사악하고 악마적인 모습을 영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나오는 거예요.

교묘하게 위장해요. 속을 계속 겉의 종교로서 칠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충격적인 발언을 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시체놀이 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23장 27, 28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한다는 것은 위선적이라는 말이지요.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묘지를 너무 아름답게 한 거예요. 마치 삼성의 이병철 회장 묘지처럼. 전에 뉴스에서 나왔는데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그 아름다운 묘지를 뜯어보자는 말이지요. 뜯어보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온갖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는 말이지요.

더러운 것이 본질, 본 내용이에요. 본 내용을 더럽게 꾸미지 않고 깨끗하게 꾸몄다는 그것이 악마의 수작이라는 말이지요.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는 수작이 그 수작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성령은 그걸 뜯어내는 것이 성령의 일이에요.

죽은 자를 죽었다, 더러운 자를 더럽다,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의 직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위장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은폐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만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경솔하게 너희에게 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조롱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너 하나님 놀리고 있지, 그지? 지금 나 놀리지 그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 속일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훑어 올라갔잖아요. 죽 올라갔다고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자기를 위장하는 재주들은 전부 다 훑고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신 거예요.

어떤 단체에서는 젊은 20대, 30대 애들을 불러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개적으로 자기 죄를 사람들 앞에 회개해야 한국교회가 지금껏 깨닫지 못한 영적사람으로서 진짜 교회라고 가르쳤습니다. 복음학교라는 것. 거기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많은 교인들이 그 복음학교에 훈련받으러 가고 있어요. 그 복음학교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빠져나왔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보장은 못합니다만. 그게 뭐냐 하면, 사람들 앞에 자기 죄를 회개하는 그 자체가 죄에요. 그게 사탄적이에요. 왜냐하면 자기자신에 대한 평가를 사람들에게 맡기고자 하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게 자기평가를 맡기지 않고 사람들에게 맡겨서, ‘야,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회개를 저렇게 하는구나. 진짜 성도 맞다.’라고 집단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침례교회에서 손들고 나오는 것과 똑같아요. “오늘 두 분이 손들고 회개하십니다.”

자기 죄를 남들 앞에 회개하면 안 되는 이유는, 회개한 그것만 죄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 죄를 몰라요. 왜냐하면 자기의 죄를 알기 위해서 선악적인 체제가 가동이 되면서, 20대같으면 20대까지 살아오면서 주변에서 이것은 죄라고 지적한 그것만 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인간들이 뭘 안다고요. 그것들이 뭘 안다고 “너는 그러면 안 돼.” 하고 지시를 내립니까? 너나 잘하세요. 좀 친절하게 해서,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하지 자기들이 뭘 안다고 남의 죄까지 거론합니까? 왜 자기의 사정을 남들 앞에 까발립니까? 그것도 일종의 겸손을 위장한 자랑 아니에요?

손들고 남 앞에 회개하고 그러지 마세요. 신부 앞에 나와서 고해하고 그러지 마세요. 신부 자기는 뭐 안다고? 맨 날 술만 처먹는 인간들인데. 그 사람들 술 없이는 못사는 사람들이에요. 총각이니까. 총각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지만.

종교 자체가 악마가 만든 거예요. 종교라는 것, 기독교, 천주교, 불교, 전부 마귀가 만든 것이고,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무교도 마찬가지고요. 그것은 그냥 그대로 지옥 가는 거고요. 인간이 심을 때에 부가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나오는 그것도 노동 아닙니까, 대가도 없이 그냥 나오는 바보등신 같은 인간은 없다 그 말입니다.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보상 달라고 하지요. 전부 다 지금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그 앞에서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썩을 인간이 썩기만 하면 돼요. 안 썩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러면 영생은요?” 이렇게 하거든요. 주제에 영생까지 탐을 내네. “영생은요? 성령을 위해서 심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겁니까?” 이렇게 하고 싶지요. 성경 마태복음 2장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와요. 그런데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올 때 어떻게 따라오느냐 하면, 그냥 집에서 별을 보면 될 텐데 별이 화살표에요. 제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별이 화살표처럼 되었다고 보면 돼요. 화살표처럼 생긴 별이라고 생각합시다. 화살표가, 따라와, 하는 것처럼 완전히 내비게이션처럼 인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콕 찍어버려요. 여기 도착! 그리고 별은 사라집니다. 구원을 하시려면 조용하게 자기 집에서 살다가 구원받게 하지 왜 동방박사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가게 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인간이 왜 주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고, 인간은 왜 지옥갈 수밖에 없고, 왜 죽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동방박사로 하여금 알게 만듭니다.

자기가 죽는 이유를 알게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 잘나고, 훌륭하고, 착실하고, 자기조절 잘하고, 자기관리 잘하고, 철저하고, 악한 것은 싫어하고, 선한 것만 좋아하는 내가 왜 저주받아야 되고, 지옥가야 되고, 왜 죽어야 마땅한지를 알려주는 그 바탕 되시는 분과 연결을 시켜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이유가 저주의 흔적을 찾는 거예요.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 전부가 일괄적으로 저주받아야 될 이유를 찾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저주성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필요치 않은 존재로 판단되어서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와 모든 것을 관련시키라고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동방박사가 그걸 보고 난 뒤에 다시 화살표별이 등장했어요. 베들레헴을 콕 찍어서 갑니다. 그러면 동방박사 역할이 그것으로 끝난 줄 알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콕 찍었는데 그 동방박사에게 추가적인 중요한 천사의 지시가 떨어집니다.

마태복음 2장 12절에 보니까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가 별의 인도함을 받아서 만나는 모든 것, 이것은 동방박사가 기대했던 메시아만 만난다면 동방박사의 사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걸 능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모든 것과의 연관성, 그것까지 파악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데요. 참 이 대목 언급할 때마다 제가 약간은 미안한 감이 들어요.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를 성령 받은 사도가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식당에 가서 예쁜 미제 신발을 잃어버렸어요. 차라리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신발 하나 잃어버렸어요. 동태탕 하는 집에서. 거기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6장 7절의 말씀은 뭐냐?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런데 참을 수가 없어. 너무 못됐어. cctv 까라. 경찰에 신고한다. 그게 바로 주께서 인도하는 육입니다. 성질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왜? 고린도전서 6장에는 고소하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의 성격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고소해야 되겠어요.

그게 뭐냐? 우리가 자기자신이 쓰레기인 것을 알 수 있도록 주께서 좋은 기회를 허락하신 겁니다. 말씀대로 안 살아요. 아주 고집 있어요. 기어이 자기의 존엄성, 자기의 가치는 양보 못한다는 식으로 격렬하게 자기를 위해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알아요. 이것이 바로 주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성도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영생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왜 육이냐 하는 사실을, 나라는 인간은 주님 없이는 썩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렇게 해서 고맙고, 너무나 고귀하다는 사실을 절로 고백할 수밖에 그 고백, 그것이 성도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질대로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것이 쓰레기의 속성인 것을 저희들이 겹쳐서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또다시 예수님의 죽는 죽음이 이래서 죽으셔야 한다는 그것까지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겹쳐서 우리가 마지막 고백할 것은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그 고백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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