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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30 12:41:54 조회 : 7894         
   그리스도의 법 180930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그리스도의 법(갈라디아서 6:2-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9pECyfpNJQ, Hit:36
 이근호 18-09-30 13:20 
그리스도의 법 

2018년 9월 30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6:2-6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공유된 세계는 사적인 세계를 배격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다들 주인들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 만의 것’이 모여 오늘날 세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모두들 ‘나’로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유’라든지 ‘공통’이라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양보에 양보를 해도, ‘양보한 대가’를 그 공유물에서 찾고자 나서기 때문입니다. 멋있어 보이고 괜찮아 보이는 그 공유물을 결국에는 ‘나의 공유물’로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일어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은 각자 ‘나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곧 그 사람의 ‘개인의 법’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뒤에 ‘법’이 붙는 것이 낯설어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이 뜻은 이미 모든 체계는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확정났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지금 주님은 놀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십니다. 

그 활동은 ‘버려야 될 자’와 ‘챙겨야 될 자’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 짓는 작업입니다. 헤어질 자는 기어코 헤어지게 하시는 일에 주님께서는 결사적으로 개입하시는 겁니다. 갈라설 자는 기어이 갈라서게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얽히고설킨 정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일이 됩니다.

불신자를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지금 벌써 지옥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이 내리시는 벌에 대해서 인간이 동정심을 갖고 관여하지 마시고 내버려두세요. 주님께서 날카롭게 구분 작업을 방해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인간들의 ‘사적인 법’과 예수님의 공적인 법이 한데 섞여있게 됩니다.

개인을 위한 법이 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없느냐 하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밀쳤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 나라와 인간 나라 사이에 장벽이 쳐져있다는 말입니다. 장벽이란 곧 단절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뚫을 수 없는 장벽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의 노력이 ‘나’를 위한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나’는 창세기 2장과 3장을 놓고 볼 때에 벌써 변질된 ‘나’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의 정상적인 인간은 ‘금지’가 가로놓여 채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너머온 나는, 벌써 악마의 마음으로 무장된 ‘나’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책임지려는 ‘나’입니다. 곧 천국을 그리워해도 그 천국이 자기 사유지가 되는 그런 천국으로 이해하게 하는 그런 ‘나’입니다. 자신에게 이득이나 되고 손해가 되지 않는 그런 천국을 구상하게 되는 그런 엉터리 나입니다. 따라서 그런 ‘나’가 있는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설치한 장벽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이처럼 갇혀 있습니다. 악마의 정신체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거기에서 가르치는 악마는 ‘나’에게 손해를 입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악마를 메시야로 오해하고, 메시야를 악마로 오해하는 현상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법의 성취가 작용합니다. 용서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작업을 주님쪽에서 실시하신 겁니다. 곧 ‘용서’입니다. ‘용서’란 과거의 굴레, 아니, 시간의 굴레 자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되묻습니다. 이 때 바뀌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나’ 대신에 주님이 ‘나’가 되십니다. 그리고 성도는 ‘주님이 너라고 불러주시는 너’가 됩니다.

이사야 55장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나를 청종하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리”, “너희는 여호와를 ” 이라고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가 되시고 그 ‘나’에 의해서 이름이 불리진 자가 ‘너희’가 됩니다.

그리고 그 ‘너희’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 법’이 꽂혀입니다. 곧 용서가 꽂혀지는 겁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겁니다. 이 작업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평생 우리들의 일생을 ‘육’의 일생이 되게 하십니다. 소위 ‘모래 위에 집을 지는 자’로 이끄십니다.

결국에는 무너지고 붕괴되고 침몰하고 허무해지고 허망한 인생인 것을 감지되도록 하십니다. 아무리 평소에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자기 맥락’에서 우겨도 마태복음 7:22-23의 말씀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리스도 법’ 속에서, ‘인간으로서 아무리 해도 건너올 수 없었다’는 내용이 영원토록 담겨 있어야 합니다. 금지는 금지대로 살아있으면서 주님의 용서하심이 빛나는 식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성취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 한다는 것은 곧 자기를 속이는 짓입니다. 감사하고 고마워할 것은 지금의 자신으로 되게 하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즉 ‘좋은 것’이란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약 1:17) 결코 나의 것으로 전환되지 않기에 좋은 겁니다. 결코 내가 원하는 보상으로 내 소유가 아니기에 좋은 것입니다.

용서가 용서답게 드러내기 위해 우리의 완고한 이기주의 속성을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민감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벌리고 수행하는 모든 세상 일이나 종교적이나 모두 나 자신의 이익이라는 목표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우리의 생을 마감케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게 합니다.

당연히 ‘내 생각’에 막혀 몰랐던 주님이 찾아오시는 순간, 주님의 일관된 일, 즉 일방적으로 버릴 자와 찾을 자를 생산하시는 일이 멈추지 않은 결과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세우는 모든 것을 깨트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자체적으로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8-10-02 06:41 
307강-갈 6장 2-6(그리스도의 법)1809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2-6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2-6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사도바울이 이렇게 우리에게 글을 남겼는데 그 글을 방금 우리가 같이 봤잖아요. 보게 되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특히 오늘 본문의 경우에, ‘너, 나, 너, 나’를 왔다 갔다 합니다. 뭘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어떻게 처신하라 하는지, 그리고 처신해야 될 당연한 이유, 당위성이 어디에 있기에 그런 것을 우리가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 글 가지고 와 닿지가 않아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앞을 죽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체계가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이미 모든 것은 다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정해져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서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 가느냐에 대해서 이미 확정 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해놓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목적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뒤에 법이 있다는 것이 상당히 낯설어 보이는데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리스도중심으로 모든 체제가 이미 확정지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확정지어졌다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오느냐 하면, 구원될 사람과 구원되지 않을 사람이 우리 인간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이미 정해져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쓰고 구원받고자 노력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의 그 법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것을 성취해 나가지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제 말을 연결시켜 보면 이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분 좋게 헤어지자.” 더 간단하게 말해서 갈라서자는 겁니다. “세상아, 너와 내가 갈라서자.” 주님께서 갈라서게 하신 것을 우리가 억지로, 그동안 살았던 정이라든지, 사랑, 이런 것을 동원해서 잘 사귈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놀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지금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데 활발하게 일으키는 주님의 그 작업이 뭐냐 하면, 갈라서게 하는 거예요. 헤어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을 건드리지 마세요. 그 사람들 지금 벌 받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벌 받고 있는 중인데 괜히 내가 가서 약 올릴 필요는 없잖아요.

주님이 노시면 우리가 일하겠는데 주님이 지금 안노십니다. 노는 거야 추석이라고 놀고, 주말이라고 놀고 우리가 노는 것이지 주님은 노는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의 작업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너는 아니고 너는 맞다.’ 이렇게 갈라서기 작업을 분주하게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굉장히 기쁨으로 참여하면 돼요.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뒤에 나오는 4절, 5절, 그 내용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에서 너, 너, 나, 왔다 갔다 하면서 나, 너를 언급하는 이유가 이미 그리스도의 법이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중심으로, 핵심으로 들어왔으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을 포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가 접어야 돼요.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토요일 날 글을 하나 올려놓았지요. <기독교교리와 복음의 차이점> 그 글의 내용에 보게 되면, 기독교교리의 특징은 뭐냐? 예수를 믿을 때 어떤 이득이 우리에게 주어지느냐, 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2천년 기독교의 모든 신학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런 것들을 여러분이 마음껏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눈이 뜨이고, 세상을 넓게 보고, 스스로 사회성이 발달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교회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혜택, 은혜를 입습니다.” 그런 것으로 죽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교리에요.

그러면 복음은 뭐냐? 그게 바로 마귀의 장난이라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당신한테 이런 이득이 있고, 이러한 혜택이 있습니다.” 하는 그 소리가 복음 앞에서는 개소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해요. 그동안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전부 다 내 중심으로 살아왔잖아요.

그 나라는 개념을 계속 쥐고 그 나가 윤택하게 되고, 나를 천당까지 보낼 때 나는 어떤 실천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면 되느냐는 식으로 교회 왔다면 그런 사람에게 기다리는 것은 마귀가 주는 유혹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믿게 되면 여러분은 죄용서 받고 천국 간다. 여러분, 이게 악마의 유혹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이게 마귀의 장난이라는 것을. 천국은 사유지가 아니에요. 천국의 가치는 우리가,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감추고, 문제없을 거라고 여기고 ‘이 나에게, 하나님은, 신은 나에게 뭘 해줄 것입니까?’ 라고 요구한다면, ‘기도해드릴까요, 헌금해드릴까요, 십일조 해드릴까요, 교회 출석해드릴까요, 선교해드릴까요, 교회 봉사할까요, 목사 섬길까요, 자녀들을 기독교교육을 시킬까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법과는 반대가 되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이 반대가 돼요.

그 원인이 나를 안 건드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를 안 건드렸어요. 그러나 복음은, 십자가는 걸림돌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걸림돌로 찾아오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자기한테 투자를 하잖아요, 모든 행동과 결실은 인간인 자기한테…….

제가 말을 좋게 해서 투자지요. 사실은 투자가 아니고 투기입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 투기를 해요. 투자라는 것은 어느 정도 확률이 있을 때 투자지요. 투기라 하는 것은 무턱대고 그냥 내질러 보는 거예요. 나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고 그리고 충성합니다. 나를 격려해주고.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은 다 시도하고.

바로 그것을 복음이 건드립니다. 십자가로서. 너 때문에 나 죽었다. 요한복음 6장 70절에, 지난번에도 제가 언급을 한 것 같은데, 요한복음 6장 70절에 그 대목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선택의 체계에 내부균열이 일어납니다. 갈라짐이에요.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이 선택해놓고 본인 선택의 그 무대의 현장에 균열을 의도적으로 야기 시켜버립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선택을 시도하시는 것은 무엇의 시범이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자신을 날마다 선택하면서 우리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입니다.

주님께서 본인이 선택해놓고 본인이 선택한 제자 가운데서도 균열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신 주님의 그 태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대비체험 하라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선택과 결정과 자유의지 속에서 주님께서는 균열을 발생시키는 겁니다.

갈라지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선택한 제자가 주님을 배신했다는 말은 곧 주님의 자기결정이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거예요. 이게 주의 일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철석같이 믿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배신하게 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지긋지긋하게 만들고, 나 자신이 미워지게 만들고, 나 자신의 꼬라지 보기 싫을 정도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너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 거야?’라고 내가 나를 질책하게 만드는 일, 그게 주의 일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나 되기를 포기하게 되고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되어야 돼요. 이렇게 바뀌어져야 된다고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기 앞의 대상, 너지요, 나 되기를 포기하고 너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결혼을 하든, 애를 낳든, 모든 것은 자기투기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투자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투자가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겁니다. 주님은 묻습니다. “너 어디다가 투자했는데?” 네가 투자한 것은 너의 세계에 투자한 거예요. 우리 자신이 상상하는 멋진 미래의 꿈에다가 우리 자신을 투자한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천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천국이 자기 사유지가 되고 말았어요. 그리스도의 법은 바로 그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의 너의 입장에서 찾아오신 거거든요. 너, 어렵게 말해서 타인이지요.

나가 있는 곳에 너의 입장에서 찾아왔어요. 그런데 그 너라고 지칭한 그 예수님은 나라고 지칭한 인간으로부터 다 밉상 받았습니다. 거절당했습니다. 사람들의 세계에서 악마의 의미는 뭐냐? 자기를 해코지하는 것을 악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악마취급을 받았어요.

인간의 배후에서 누가 그렇게 했느냐 하면, 악마가 인간에게 선한 하나님 역할을 했습니다. 네가 사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거예요. 매일같이 아침에 눈만 뜨면 악마는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남은 죽더라도 너는 살아남아야 돼. 이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세뇌시켜 온 거예요.

“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 네가 최고야. 네가 절대자야.” 그렇게 우리에게 강요해 왔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네 교회가 최고 교회야, 네 종교가 최고 종교야, 네 나라가 최고야, 우리나라는 항상 축구에서 일본을 이겨야 해, 내가 원하는 야구팀은 반드시 이번에 가을야구 해야 돼, 꼭 5등 안에 들어야 돼, 내 애는 무조건 공부 잘해야 돼, 반드시 인정받아야 돼, 내 남편 잘나야 되고 내 아내는 남보다 더 예뻐야 되고, 늘 이런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것을 우리는 그동안 세상에서 뭐로 봤느냐 하면, 자유라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권리라고 여겼습니다. 성경에 인간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 자기 맘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권리라는 것은 애당초 그런 것이 없어요. 인간이 산다는 것이 권리가 아님을 아무도 언급해 준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냥 죽은 채로 살아가는 거예요. 죽음을 위해서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도 이야기 안 해요.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야기를 안 해요.

진즉에 죽어야 했어요.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이 이야기하셨어요. 사고 났을 때에 살 확률이 20퍼센트였다고. 제가 그 소리 듣고 맘속으로 생각했어요. 집사님은 아직도 멀었다. 왜냐하면 0퍼센트여야 돼요. 아직 20퍼센트가 남아 있으면 안돼요. 배 열 두 척이 남아 있으면 안돼요. 0퍼센트여야 돼요.

우리는 매일같이 0퍼센트에서 아침에 눈 뜬 겁니다.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창세기 2장이 있는 이유, 창세기 3장이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우리에게 보게 하면서 거기에서 인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를 현재 네가 간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변화가 뭐냐?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정상적인 관계는 금지에 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금지가 개입되는 것이 정상적이에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그런데 3장에 오게 되면 우리는 금지하기에 더 갖고 싶어 해요.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은 겁니다. 이미 이것은 어떤 마음씨냐 하면, 악마의 마음씨로 완전히 전환되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마음을 분배받고 태어난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죄 안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지요. 시편 51편에서는, 내가 어머니의 죄 중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일을 잘못해서 죄가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죄가 되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았어? 진즉에 알았어야 할 것을 왜 이제야 안거야?’

다윗의 행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옆에 있는 사람이 가르쳐 주지를 않았어요. 성령이 직접 가르쳐 줬습니다. 너는 뭘 해도 죄니까 너 자신에게 기대 걸지 말라. 네가 꿈을 꾸면 그것은 개꿈이고 네가 비전을 가지면 그것은 악마가 준 비전이다.

교회 부흥? 선교확장? 마귀의 장난이에요. 그거 돈 끌어내겠다는 수작들입니다. 교회 없이 천당 가겠다는 생각을 왜 못해요? 기독교 없이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왜 못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나라는 인간을 너라고 바꿔줌으로서 이미 구원된 거예요. 이제부터는 나의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차지할 자리가 나의 자리고, 그래서 그 주님 앞에서는 전부 다 너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모든 것을 나의 자리에서 내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고대했습니까? 그게 창세기 2장의 이야기가 아니고 창세기 3장의 이야기에요. 내 앞에서 건방지게 금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이게 우리들의 본성이잖아요. 16개월 애든, 24개월 애든, 36개월 애든, 60살 먹은 어른이든 평생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잔소리에요. 평생.

“안전띠 매세요.” 안 맵니다. 경찰 있으면 매는 척 하고 도로 풀지요. 타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한테 퍼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나에게 잔소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게 우리의 철칙입니다. 이것을 말로 해야 됩니까? 우리의 본성인데요? 우리의 본성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나 목사가 무슨 잔소리를 하게 되면, 항상 우리는 이걸 원합니다. ‘잔소리 들어줄 테니까 3십 배, 6십 배, 백배 줄 거예요?’ 이렇게 나와요. 그냥 공짜로 해주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일종의 근로니까, 노동이니까.

노동의 대가는 얻겠다는 겁니다. 그 얻은 대가는 바로 나라는 창고에 채우겠다는 거예요. 내가 빛을 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법은 철저하게 금지, 금지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절단 되었다는 것, 네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 그것을 확실하게 우리한테 꽂아주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이에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네 쪽에서 내 쪽으로 건너올 수 없었다, 를 분명히 하는 그 법, 그 법이 꽂힐 때 그것을 성취하라는 겁니다. 제가 올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이걸 제가 언제까지 우려먹을지, 앞으로 몇 년이 더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베들레헴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요. 왜 기분이 좋았나?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8킬로미터 내지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에요. 버스를 탔는데 검문을 해요.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입장에서는 남의 나라기 때문에 검문을 합니다.

검문을 하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골라서 하는데 얼마나 상대적으로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우리는 봐준다, 그 말이지요. 패스하잖아요. 그렇게 들어갈 때부터 기분이 좋았지요. 베들레헴 들어가니까 장벽이 있는데 8.5미터 장벽에 전기가 흐릅니다.

그 장벽을 보면서 또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을 가두어놓기 위한 장벽이거든요. 우리는 동양인이라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 자유라는 것을 언제 느끼느냐 하면, 장벽이 있을 때 기분을 아주 만끽했습니다. 장벽 때문에 내내 기분이 좋았어요.

차별대우 받는다는 것, 그냥 외국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로 특혜 받는 그 기분, 마치 헹가래 치는 그 기분, 지상에서 공중으로 붕 나르는 그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자기밖에 모르거든요.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것을 마음껏 허용하셔요.

허용해놓고 벽을 쳐버립니다. 벽을 치게 되면 내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고, 삼위일체 믿고, 구원 받고, 교회봉사 열심히 하는 이 모든 것을 아무리 해도 주님이 쳐놓은 그 장벽을 통과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장벽을 건너가지는 못하고 장벽 그 바로 밑에서 꼼지락꼼지락 뭔가 노력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 노력하는 것을, 치밀하게 너 자신의 모습을 눈으로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그 노력이 무슨 노력이냐 하면, 뚫리지 않는 벽을, 어쨌든 살아야 되니까, 죽어서 지옥가면 안되니까, 영원히 못 빠져 나오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천국에 가서 편안하게 쉬기 위해서는 뭔가 자기가 자기에게 기여를 해야 되고 노력을 해야 되니까 노력하는 그 완고함, 자기 자신을 기어이 살려내겠다는 그 완고함을 그 벽이 쳐 있는 바로 밑에서, 건너가지도 못한 채 시도하는 것을 네가 치밀하게 보라는 거예요.

그 모든 노력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주님을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서? 놀고 있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너를 위해서. 평생토록 기도하는 것이 너 자신을 위해서 하잖아요.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나 물동이는요, 아무리 물을 퍼도 물동이가 있는 그 한계이상 물을 담지를 못해요.

인간자체라는 그 그릇, 인간이라는 그릇에 자기가 채우고자 하는 것은 자기 한도를 못 벗어납니다. 기껏 나는 이것까지 채웠습니다, 하는 그것만 들고 와요. 그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겠습니까? 계속해서 마귀가 인간들에게, 교인들에게, 기독교에게 헛짓을 하게 만들었어요. 노력한다고 그 벽이 뚫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기독교교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벽을 세우신 당사자가 벽을 뚫어요. 주님의 벽은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걸 재료로 해서 벽을 만들었던 거예요. “너 나 배신 때렸잖아. 배신해놓고 왜 그렇게 딴 얼굴이야? 네 본성은 나를 배신하면서.”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만큼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신을 배신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동안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에 퍼부은 돈이 얼마입니까? 우리교회는 관계없지만. 그 모든 헌금과 노력을 개무시해 보세요. 어느 인간인들 화내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 격분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지키겠다는 의미입니다. 노력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무서운 이야기를 했어요. 성경을 보면서 제일 무서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고 꼽으라면 저는 마태복음 7장 23절을 듭니다. 또 하나 있는데, 로마서 9장 3절에도 무서운 이야기가 있는데. 마태복음 7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신학교 나와서 목회 4십년 했습니다, 교회 스무 군데 세웠습니다, 남들이 나보고 사도바울이라고 칭했습니다, 지금도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강의하고 설교합니다, 책을 얼마나 냈는지 몰라요, 조회 수가 수만 건이 됩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이 중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가룟유다도 포함되어 있어요. 23절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걸 두자로 줄이면 “누고?” “저 모르겠어요?” “누군데?” 그동안 같은 교인들끼리,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서로 독려했고 격려했어요. 서로가 서로를 속인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 3절에 나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그리스도의 법이 꽂혀야 되는데 자기가 만든, 수십 년 교회에서 공들인 그것이 자기 안에, 중앙에 꽂혀 있어요. 그래서 ‘이만큼 하면 되겠습니까, 목사님? 더 충성해 드릴까요? 기도 더 오래할까요? 성경 필사 열 댓 번 더 할까요? 새벽기도 20년 더 나올까요? 우리 애를 신학교 보낼까요? 이번 교육관 짓는데 목돈 낼까요?’

그저 누굴 보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목사라는, 장로라는 타인을 의식하는 거예요. 내가 나고 저쪽은 너가 돼요. 너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그들이 보는 대로,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것으로 평생을 다 소모했어요.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어떻게 사라져야 되는가는 아무데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살아있는 한 어떤 노력을 해도 나는 오히려 더 완고해질 뿐이에요. 교회에서 완고해지기 시합을 하세요. 더 완악하기 시합.

광주강의에서 제가 그것을 두고 신경조직 건드린다 했는데, 실컷 나름대로 뿌듯한 거예요. 이 정도 하면 천당 보내주겠지, 지금 재림하시면 천국 보내주겠지, 하는데 십자가의 그 베들레헴 장벽이 오게 되면 주께서 두꺼운 벽으로 딱 와버려요. “네가 백날 해도 벽의 시멘트나 긁어대고 네 손톱만 아플 뿐이야.”

그 벽을 어떻게 뚫어요? 나를 의식하는 자는 도저히 그 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벽을 뚫을 수 없다면 누가 구원되느냐? 주께서 그 벽을 쳐놓고 그 벽을 주께서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용서라는 거예요.

용서라는 것은 뭐냐 하면, 과거의 굴레가 다 벗겨지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누굴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이거예요. “잘못되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하면 “당신이 나에게 뭘 한 것이 있어요? 없는 것 같은데?” “그 때 내가 당신을 얼마나 괴롭혔는지요.”라고 이야기하지요. 용서해달라는 쪽에서.

그러면 성도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없는데요? 그 때 주님께서 나에게 그런 일을 당하도록 하셨습니다.”라고 해버리지요. 이사야 55장, 아까 읽은 교독문인데 한 번 보세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여기 ‘너희’가 나오지요.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가 나오지요. “나를 청종하라” 나가 나오지요.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너희가 나오지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그 다음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너희가 나오지요.

전부 다 주님께서 ‘너희’라고 불러줄 때 이미 벽을 뚫고 들어오신 거예요. 너는 네가 아는 너, 그 나가 아니고 이제는 유일한 나 예수님이 너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너는 나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김춘수의 시처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줄 때 너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된 거예요.

사도가, 전에 사울이라는 사람일 때 예수님을 핍박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다메섹에서 내려갈 때 찾아옴으로서 찾아온 그 자체로, 사도바울이 뭘 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이미 사도바울은 예수님에게 너라고 지칭이 되면서 이사야55장이 전부 다 완성이 되어서 그 안에 담기는 겁니다.

이거 이해 안 되면 제가 준비한 것이 있어요. 이것은 이해하실 거예요. 좀 유명한 노래인데요.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나이트클럽에서 남자친구를 만났어요. 그 때 여자가 물어봅니다. “행복하냐 물었지”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행복해?” 물으니까 남자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뚝 흘리는 그 사람” 그 때 유명한 가사가 나옵니다. “난 벌써 용서 했다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갑자기 가락이 붙어버렸는데.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그 다음에 하이라이트에요. “말을 해놓고 안아주었지. 정말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연이에요. 그리고 주님은 우연이가 되고. 내가 기도해서 불러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헌신한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동안 나를 위한 장벽을 쌓는, 나에게 충실한 나의 일평생만 기억될 뿐이에요. “내게 도움준 일 없거든 내 벽 바깥으로 나가.” 그거예요. “그러나 내게 도움이 되거든 내 벽 안으로 들어와. 너는 내 것이야. 내 소유야.”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 대목 정말……. 그 남자는 눈물만 뚝뚝 흘렸고 여자가 정말 훌륭해요. “난 벌써 용서 했다고” 이게 그냥 용서가 아니고 “벌써” 내가 기억하기 전에, 성경적으로 하면 창세전에 벌써 용서했다고. 그리고 “안아주었지” 나라는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너의 존재로서 안아주는 거예요.

나 구원받으라고 안아주는 것이 아니고 정작 구원은 네 쪽이 아니고 내 쪽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너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를 포섭한 거예요.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러한 소식이 들려오지를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제가 그렇게 설명을 하고 강의를 해도 잘 안 먹혀 들어갔는데, tv 예능프로를 보는데 세상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있었어요.

광산 김 씨 이야기입니다. 광산김씨 아들 김 성현이가 나이가 사십이 넘어서 장가를 가려고 결혼정보회사를 찾아갔는데 상담사가 나이가 한 육십쯤 된 분이에요. “학교는 어디 나왔어요?” 경기대 나왔고. 그리고 지금 사는 집은 전세입니까, 뭡니까, 라고 묻지요. 김승현이가 기분 나빠 해요. 그래도 전에는 스타인데 꼬치꼬치 물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데 도저히 참지 못해서 광산김씨 김원종씨와 백씨부인이 찾아와서 자기 아들 후원한다고 옆에 딱 앉아 있어요. 그 때부터 사달 난 거지요. 상담이고 뭐고 다 깨지고 난리 났습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훌륭하고, 어떻고…….

“어머니께서는 어떤 여자를 좋아합니까?” “우리는 별 욕심 없어요. 그저 착하고, 참하고, 성실하고, 거기다 재정력까지 있는 사람, 착하고, 참하고, 성실하고, 건강하고, 돈, 재정력까지 갖춘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내 자식은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상담사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왔느냐 하면, “미혼부잖아요. 고등학생 딸이 있잖아요.” 그 순간 김승현 엄마 아빠는 눈물을 죽 흘려버려요. 자기는 내 아들이 천하에 최고에요. 그래서 만나야 될 색시감은 처녀를 원하는 거예요. 자기 아들이 미혼부라는 것은 몰라요.

만약에 그 미혼부에게 상담사가 미혼모를 소개시켜 줬다면 광산김씨 부부가 그 자리에 그냥 있겠습니까?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요. 진짜 박차고 나갔어요. 우리 애 그런 애 아니라고. 얼마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릅니까? 자기주제파악도 안 된 채 자기가 원하는 것, 괜찮은 것을 자기장벽 속에 다 끌어 모으려고 했잖아요.

그걸 보면서 욕할 수가 없어요. 왜? 우리 자신부터 해서 모든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관심 없어요. 나는 저 천국에 가야 되겠다는 거예요. 거기가 자기사유지입니까? 네 동네에요? 무슨 자격으로 거기 가요? 거기 가서 데모하려고? 촛불집회하려고?

광주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하니까 다 웃었어요. 만약에 한화 야구팬이 천국가게 되면 그 주변에 한화 팬들만 다 와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가는 천국은 악마가 천국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 정신을 조작한 겁니다.

네가 잘되는 그것이 행복이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나 세상으로부터 강요당하고 그렇게 세뇌 받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천국이고 내가 원하는 메시아가 진짜 메시아라고. 실은 그게 마귀인데요.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마귀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교회 오는 내내 같이 붙어서 교회까지 따라와서 옆에 참석하고 있어요. 한 번 옆에 보세요. 마귀가 같이 앉아 있는지.

목사가, 교회 부흥되어야 된다고 하니까 “내가 얼마나 교회에 기여하면 부흥되겠습니까?” 목사가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교회에 충성해야 되는 것처럼. 전부 다 나라는 것을 중심에 놓고 맥락을 봤잖아요.

야고보서 1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온다 했어요. 땅에는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은사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마태복음 7장 26절에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이 말씀이 유명한 만큼이나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거기에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나와요. 그런데 모든 인간은 자기가 모래위에 집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출발이 모래위에 집을 짓는 거예요.

살면서 사는 무게만큼 푹푹 꺼집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어가지고. 나중에 살면 살수록 허무해져요. ‘아이고, 내 집안이 왜 이러지? 내 건강했던 몸이, 산에 오르던 내 몸이 왜 자꾸 허리가 아프지?’ 뭔가 전부 다 붕괴되고 주저앉고 있어요. 20대에 안 예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예뻐요.

그러나 80이 되면 다 이상하게 생겼어요. 내가 지금 넉넉하게 했어요. 70이라고 하면 큰일 나요. 90까지 늘릴 참인데. 80, 90이 되면 귀신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귀신이에요. 그런데 처음부터 인간은 귀신이었어요. 그나마도 붙어있는 것을 고마운 줄 아셔야 됩니다. 귀신 껍데기라도 붙어 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이거 붙어 있는 사건 하나하나 전부 다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에요. 갈라디아서 6장에 보게 되면 자랑할 것은 우리 속에 있다는 거예요. 각자 자신의 짐을 질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뭐냐? 그리스도의 법이 우리에게 뭘 가르치느냐 하면, 뚫리지 않는 것을 뚫어냈다는 것, 그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가르치는 자와 받는 자에게 함께 좋은 것이에요.

주님의 용서하심이 그리스도 법 안에서 완성이 되고 그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 베들레헴장벽 밑에서 그걸 뚫겠다고 맨손으로 흙 파내고 있는데 갑자기 벽 뚫고 들어온 거예요. 그 벽을 뚫었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는 그 벽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겁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라는 그 마술사가 만리장성 통과할 때 깜짝 놀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카메라트릭인데 그걸 모르고. 만리장성의 이쪽에 있었는데 어느새 저쪽에 가 있어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벽을 통과한 거예요.

미운 예수님이 좋아질 리가 없어요. 우리는 주님 좋아할 근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좋아지고 이미 주님이 안아주고 용서함으로서 이제는 어느 쪽이냐 하면, 벽을 통과한 그 쪽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속해버렸습니다. 돌아보니까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용서였다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의 남아 있는 육을 통해서 발현되고 표현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만을 위해서 벽을 세우고,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살아남아 있는 세월 동안 계속해서 그거 보여줘야 돼요. 이 대목이 어려운 거예요. 막 살아야 돼요. 막 살 때 그게 가장 우리답습니다.

기도해도 내 이익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세요. 그게 맞아요. 헌금을 해도 30배, 60배의 그 보상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고 헌금하는 이런 이기주의를 살아있을 동안에 계속해서 우리는 보여줄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할 일은 그거밖에 없습니다. 왜? 이미 통과했기 때문에.

이런 나를 주께서는 피를 흘려서 용서했다는 거예요. 이미 통과시켰다는 겁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제가 20대 초반에 군대에서 처음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40년 세월동안 이 대목을 풀 수가 없었어요.

아까 본 야고보서 1장 17절 같으면 대번 풀리잖아요. 모든 각양 좋은 것은 다 위에서부터 오거든요. 내가 투자해서, 내가 나에게 투기해서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용서하실 때 따라온 것이라는 말이지요. 주님이 용서하실 때 따라온 그 좋은 것을 함께 한다는 그런 내용으로 지금은 이해가 되는데 처음 교회 갔을 때 부흥회에 많이 참석했잖아요.

그 때 부흥사가 이걸 가지고 뭘 이야기했느냐? 가르침을 받는 자, 교인들이지요. 말씀을 가르치는 자, 목사지요. 각양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이 대목을 부흥사는 어떻게 설명했느냐 하면, 광어회로 설명했어요. 광어회, 고급차, 맨션아파트, 좋은 옷, 제일 맛있는 포도, 제일 맛있는 쌀…….

적어도 교인이 되었으면 그 귀한 복음을 전하는 목사한테 하나님 섬기듯이 섬기라고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명령을 했으니까 여러분은 그 명령을 따라야 된다는 거예요. 철따라 목사한테 좋은 것 주고.

지금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이 들으면 여러분의 추억이 새롭지 않습니까? 새록새록 새롭지요. 아프리카에서 좋은 것이라는 것은 츄리닝입니다. ‘좋은 것’이라는 것은 나로 인하여 만들어지지 않고, 너나 나다 둘 다 쪼다인데 너나 나나 둘 다 주님께서 봐줘서 얻어진 그 좋은 것, 그게 바로 ‘용서하심’이에요.

그 용서하심을 서로서로 내놓고 그걸 모습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은혜 받은 것 다시 하면, 난 벌써……, 입에서 가락이 막 나올라 한다,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집사나 권사나 목사나 장로 사이에, “뭐 했어요? 나에게 무슨 짓을 했어요?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없어요. 우리는 나기 때문에 용서가 안돼요. 내가 용서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내내 갑질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누굴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용서받은 사람이에요. 좋은 것을 안에서 누리고 있는 사람이지 건방지게 누가 누굴 용서합니까? 뭘 용서해요? 나도 용서받은 입장인데.

주님께서는 지금도 이 작업, 용서라는 그리스도 법을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성취시키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본색 다 노출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더러운 이기주의가 까발리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개가 되고 개의 눈에 오직 복음이 얼마나 고귀하고 주님의 찾아오심과 십자가의 용서하심이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을 저희들이 깨달아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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