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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6 12:50:23 조회 : 493         
   때 18050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때(갈라디아서 4:4-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ubyKA4Jlhyo, Hit:216
 이근호 18-05-06 13:34 
때 

2018년 5월 6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4-5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에게 있어 ‘때’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시간개념이나 시간의식은 끊어짐이 없이 늘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시계상 새벽 1시나 새벽 1시 01분이 구분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의식의 흐름은 영속적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시간 자체가 무의미하게 결정적 때는 사실상 없습니다.

그렇다면 ‘때’라면 인간 세계말고 인간 외부 세계에서 실시되는 사건에 의해서 모든 시간 흐름이 무의미하게 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마치 수 천년 전에 죽었던 이집트의 왕 바로가 미이라 안에 죽은 채로 있다가 갑자기 지금에 와서 관 뚜껑을 열어졎히게 되는 사태, 이것이 ‘때’입니다.

비로서 죽은 자가 사태 전체의 돌아가는 내막을 아는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라는 대목에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구태여 올 필요가 없다는 점을 먼저 인간편에서 감안해야 합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구원이 될 수 있다면 구태여 하나님쪽에서 인간 세계에서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는 품성이, ‘홀로 서기’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홀로 서기’란 시작도 혼자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최종적인 자아의 모습도 자아에게 집중하게 되는 경향을 말합니다. 나로부터 시작한 일이 나의 잘남으로 최종 마감되는 식으로 마음이 쏠려갑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 개입되는 모든 일들은, '나의 일은 내가 결정한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본인들이 느끼는 시간이라는 것도 자신에게 주목이 되는 일들의 연속성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만드는 배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즉 “나의 연대기는 이러하다. 과거는 이러했고 미래는 이것을 소망한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자기 증거‘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동원하고 예수님을 동원해도 ‘나 증거용’으로 활용할 뿐입니다. 그런데 ‘때’가 이 시간 막대 속에 뛰어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이 자기 위주로 생각했던 모든 시간과 역사는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때’ 속에서 인간은 벌써 ‘죽은 자’로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상상해도 알 수 없는 것, 인간들이 어째서 이렇듯 늙고 죽어가는 지를 알 수 없고 또 앞으로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 속에 들어오심으로 인하여, ‘선악과 따먹는 날에게 정녕 죽으리라’는 그 취지는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즉 하나님 입장은 이러합니다. “아들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없다!”입니다. 인간들은 중성리나 중립지역에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아들로서 등장하므로서 모든 인간은 죄의 노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노예’ 혹은 ‘종’이란 갇혀 있음을 뜻합니다. 이 사실은 이방인인 우리들은 모릅니다.

하지만 구약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벌써 예시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의 권세 속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즉 애굽의 종이었던 겁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경유할 때는, ‘자연의 노예’로 노출되었습니다. 물 없이는 못살고 양식 없이는 못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부여받고 난 뒤에는 인간들은 ‘율법의 노예’라는 사실로 밝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율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에 보면,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 오신 한,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밀한 율법의 그물망 속에 갇혀서 쉬지 않고 율법이 내뿜는 저주를 온몸으로 다 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인간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이 율법을 자신의 행함으로 의를 얻고, 그 획득한 의의 누적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바로 그것이 ‘율법의 종’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두고, ‘여자에게 나시고’라고 해서 ‘여자’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간적 신체성이 남녀의 동침으로 생겼다는 점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이 악마와 결탁해서 선악과 나무 결실을 따먹은 그 사건에 담은 출생을 나타내는 겁니다. 처음에 선악과는 건드리게 된 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남자로 선악과를 먹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 인간이 생명나무 과실마저 손을 댈 수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금지 명령과 생명나무를 연계해서 그 생명나무의 취지를 아들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곧 아들을 통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생명나무의 원래 의미라는 겁니다.

그 사건은 바로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점을 구약 열왕기하 2:9-11에게는 이렇게 미리 소개되어 있습니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즉 엘리야의 제자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죽었다고 여깁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했다고 여깁니다. 죽게 되면,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종결이 됩니다. 하지만 승천이 되게 되면, 죽은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갑절의 능력으로 지상에 엘리야 능력을 연속적으로 발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취하여 위로 당기게 했습니다.

이로서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은 이미 ‘때’ 안에 다 감겨있고 그것이 이 세상 안에서 반복되게 되는데 성령께서 성도에게 임하므로서 성도는 마치 엘리사와 같은 입장입니다. 이것이 ‘아들됨의 작용’입니다. 이 아들로 인하여 성도는 ‘자유인’입니다. 모든 율법에서 벗어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 아들로 인하여 졸지에 ‘홀로 서기’ 한다고 여긴 모든 불신자들은 ‘저주의 종’으로 발각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남을 증거하면 ‘저주의 종’이요 예수님의 죽음, 곧 ‘시작과 끝’을 을 증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행함없이 예상 못하게 알게 된 그 사실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5-07 12:02 
287강-갈 4장 4-5절(때)1805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4-5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의 관심사와 오늘날 사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서로 다르지요. 관심사가 다르게 되면 쓰는 용어도 달라요. “때가 차매”, 또는 때가 되매, 아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아들 이야기를 했고 사람을 볼 때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로 사람을 보지요.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갈 때는 항상 혼자 살아간다고 보는 겁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 혼자였고 끝까지 나 혼자로서 내 인생을 꾸려나간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보는 겁니다. 거울 보세요. 자기 혼자 있지요. 옆에 귀신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 혼자 살아가기에 내가 앞으로 잘되고 못되고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잘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곁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들이 왔다는 겁니다. 아들이 왔고 아들이 와서 보니까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얽혀 있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율법에 얽혀 있는 자로 보고 율법에 그냥 얽혀 있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요.

그 율법이 뿜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쏴대는 것이 있어요. 그 율법의 영향력 때문에 인간은 늙어죽는다는 겁니다. 늙어죽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 후에 아무 일이 없다면 그냥 죽지요. 그게 아니고 죽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들춰졌기 때문에 율법이 갖고 있던 그 벌칙조항, 저주의 독소에 의해서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내가 좀 늙었네.’ 하면서 올해 들어 좀 망가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몰라요. 링거도 맞고 의학적으로 수습은 해보지만 아무리 수습해도 지나간 청춘을 돌려받을 수는 없는 겁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평소대로 그냥 사는데 골조부터 해서 모든 것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고 몸 온천지 안 아픈 데가 없고 점점 주저앉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공기 탓인가? 기분 탓인가? 미세먼지 탓인가? 자외선 때문에 그런가?’ 그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피하는데 어디로 피하느냐 하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런 쪽으로 도피를 하지요. 백날 가봐야 그 마음가짐은,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네 옆에 율법의 촘촘한 그물망이 있는 이상은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감금되어 있고 갇혀 있다는 거지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빡빡하게 쪼아대는 율법의 그 저주에서 네가 벗어날 수 없고 운명처럼 죄의 지배아래 놓여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사도바울보고 항의할 거지요.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 라고 대꾸할 겁니다. 사도바울은 준비된 이야기를 할 거예요.

나도 몰랐었는데, 나도 몰랐다는 그 말은, 내 식으로 율법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공부를 해도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실을 인간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뭔가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이 오심으로, 또는 다른 말로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옛날 지나간 한 순간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해가면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물론 훌륭한 일을 했지만 그 때는 그 일로 끝나버렸어요. 종결된 거예요. 예수님이 정치범으로 십자가 졌다. 그럴 수 있겠지. 그 당시 사회가 악해서. 그러나 그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 그렇게 끝난 줄로만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보통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과 예수님이 태어난 것은, 세상을 읽어보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다르게 볼 수 있는 안목과 더불어서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죽었다, 이렇게 끝내면 그분은 그분이고 우리는 우리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그냥 살아나기만 한 것이 아니에요. 살아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오셔서 일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뭔가 하나 절차를 거쳤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니까요. 그냥 죽어서 없는 채로 “나 하나님이다. 너희는 이제 죽었어.” 이렇게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현대인이 사고하는 대로 혼자 있다고 여겼는데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다 인간을 죽여 버리고, 저주해버리고, 심판해버리는 환경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넓은 안목가지고, 그 포괄적 안목 가지고 지금 사도바울은 적절한 단어를 섞어서 우리에게 문장을 제시한 거예요. 그러면 오늘 4절, 5절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이 문장이 갖고 있는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사도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사도바울의 안목에 동의할 수가 없어요.

이게 하나의 교리가 아니거든요.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현실 그 자체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편지를 쓸 때 하나하나 쓰면서 늘 염두에 두는 것은 뭐냐? 내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를 종합해서 이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람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나, 그 말이에요. 사람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 죄인이 만들어내는 지혜와, 죄인들이 모여서 머리 맞대고 구성해낸 그 진리 그것은 죄 아니냐 그 말입니다.

인간이 부지런히 노력을 하는데,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백날 노력해봐야 너희들을 꽉 조이고 있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지혜를 끄집어내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현재 너희들이 분투노력하고 있는 모든 시도가 도리어 더욱더 주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모독과 모욕으로 반복해서 번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바울 쪽에서 복음을 전해도 받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는 것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는 것, 분명히 둘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성령 받지 않은 채로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5절을 지키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할 거예요. 왜? 시도하는 그 출발점이 자기니까. 믿으려고 할 것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속량에서 벗어난 자아상을 구축하려고 시도할 겁니다. 그게 가짜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기라는 겁니다.

사도가 이 말씀을 주는 것은, 이 내용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나 혼자 있다면 4절과 5절을 내가 내 이성으로 믿으려고 할 거예요. 나 아니면 나를 살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노력을 해도 내가 해야 되고, 성경공부를 해도 내가 해야 되고, 예배참석을 해도 내가 결심하고 선택해서 하고, 모든 것을 내가 해야 돼요.

그걸 제가 사기라고 했지요. 사기는 사기꾼만 만날 뿐이에요. 여러분이 이렇게 하시면 구원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는 이유가, 당신은 안 해서 구원 못 받았다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 중립지역에 있는데, 중성적인 위치에 있는데 구원받는 정보를 제대로 입수를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시도를 안 했는데 이제 구원받는 비법을 알려줄 테니까 이것 받아들이시고 노력하시고 순전한 마음으로 진짜 ‘믿습니다’하고 매달리면 여러분은 구원되도록 사랑의 하나님께서 허용했다는 겁니다.

거짓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사람을 꾀이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신의 경험상 노력을 안 해봤겠어요? 모든 노력을 다 해봤잖아요. 그런데 노력했다는 그 노력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할 때 그 사람 중에서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본인도 그중 하나로 끼워넣자는 그 말이지요.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외부에서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나에게 집어넣어 준 것은 내가 노력한 보상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내가 기도 열심히 한 그 대가로 오신 것이 아니에요. 내가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스스로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 열매로, 그 애씀을 가상히 여긴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예수님 보내주마.” 그렇게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게 된 그 상황은 오히려 반대였어요. 본인이 사기꾼이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을 사기꾼으로 본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사기꾼으로 본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법을 줬고, 말씀을 줬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줬고, 그래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그 주체세력들은 전부 다 지금 사울 쪽에, 자기 쪽에 다 있다는 말이지요.

베냐민 지파로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 안에 누적된 진리가 정보처럼 꽉 차 있다는 말이지요. 한 두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숱하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리 아닌 것을 배제하고 진리 엑기스만 골라서 정통적인 신학으로서의 해석법을 사울은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거기에 준해서 볼 때 예수 믿는다, 성령 받아서 구원받았다, 하는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용서할 수 없는 사기꾼들이라고 해서, 사울은 자신만만해서 그들을 처단했던 겁니다. 스데반집사 같은 경우에는 물론이지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을 때 사울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자신만만했지요. 확신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놈이 확신.

그놈의 확신을 그렇게 쓴다니까요.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본인은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올 때 “주여, 누구십니까?” 그냥 “나 예수다.”가 아니에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해서 앞에 ‘핍박’이라는 말을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 그 핍박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도 여전하더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에 반복해서 적용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누굴 핍박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요새 사람들은 다 점잖아서 새벽 다섯 시에 술 먹고 남 패기 전에는, 광주이야기입니다, 새벽 다섯 시에 술 먹고 패싸움하기 이 전에는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안잖아요. 벌금 물어줘야 되고, 구치소도 가야 되고 그게 귀찮으니까.

욱, 하는 것을 자제하고, 배운 값을 하고, 지성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도덕적 탁월함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고, 본질을 움켜쥐는 시도를 함으로서 그것이 나의 미래를 구원한다는 생각들이 있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누굴 핍박한 적이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핍박이라는 방식으로만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나풀나풀 주님께서 천사의 날개를 타고 오게 되면 “웰컴, 주님이여” 이런 식으로 오는 줄로 알고 있어요. 핍박이라는 방식이 삭제된 채.

핍박이라는 말이 사울에게만 개인적으로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어찌할꼬, 라는 것은 구원받았던 유대인들이 하는 고백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사적인 죽음이고, 그 주변에 직접적으로 근접해서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에게 다 예수님은 핍박이라는 방식으로 죽은 분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줄 때에 취지는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없는데 뭔가 보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달라진 사람을 찾아내는 방식이에요.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주실 때 그것을 예고한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이렇게 시작해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에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농부가 밭을 갈 때에, 분명히 이 밑 지하 2미터 안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밭을 간 적이 없다는 그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것은 본인이 미리 예상한 바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밭 갈다가 혹시 횡재해서 보물이 생기면 좋겠다는 그런 상상력을 미리 발휘한 적이 없어요. 하다 보니까 뭔가 덜컥 걸렸고 보물이었어요. 가서 그 밭을 몽땅 샀습니다. 이것은 예상 밖의 문제에요. 자기가 예상한 범주 안에 들어있지 않은 사실입니다.

내가 천국에 가요? 이것은 내가 예상하지 않은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돼요.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드리면 설만 넣어주겠지. 이것은 이미 예상이 되잖아요. 우리는 삼대 째 기독교집안이다. 이것은 예상이 된다고요. 태어날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이미 예상이 되잖아요.

예상이 되어버리면 준비한 것이 되고, 준비한 것이 되면 핍박이라는 요소가 빠져버려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예상도 섞이지 않은 채로 구원해요. 아예 공로라는 것은 일체 끼어들지 않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때가 차매,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때, 결정적인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헬라어로 ‘카이로스’라 해요.

결정적인 순간이 오매, 라고 할 때 그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없어요. 있더라도 일방적입니다. 자기위주에요. 인간은 자기연대기를 따로 설정해서 자기에게 결정적 순간을 뒤에 소급해서 평가를 하고 임의로 의미를 붙이거든요. 그것은 주님 앞에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것은 통하지 않아요.

결정적순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인간이 꿈도 꾸지 않았을 때, 갇혀 있을 때. 아주 쉬운 예가 미이라같은 경우입니다. 시체가 되어서 관속에 누워 있는 경우, 이집트의 미이라같은 경우는 피라미드 안의 관속에서 수천 년 동안 누워 있잖아요. 그렇게 누워있는 입장에서는 ‘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미이라의 관 뚜껑을 열었다면 이것은 미이라 입장에서 예상한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그 죽음의 관을 열어 제키는 그쪽의 입장에서 때가 차매, 때가 되매 관을 연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때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때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연결, 연결, 연결되기 때문에요. 23시간하고 24시간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새벽 1시하고 새벽 2시하고 연결되어 있잖아요. 이게 끊어짐이 없다는 말이지요. 새벽 1시의 인간이나 새벽 2시의 인간이나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겁니다.

새벽 2시 10분에 술 먹는 인간이 새벽 2시 11분에 술 먹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미친 사람이지요. 똑같은 인간이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 속에 놓여 있고, 시간은 중지되는 법이 없고 끊어지는 법이 없어요. 심지어 내가 의식을 잃더라도 바깥사람에게 물어보게 되면 “네가 기절한지 두 시간 되었어.”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기절해서 의식이 없더라도 계속 이어져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끊어짐이란 게 애초에 없어요. 그러면 끊어짐은 누가 결정하느냐? 인간 바깥에 계신분이 끊어짐을 결정하지요. 이게 시간의 끊어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끊어짐이 침투가 되면 인간이 연속되면서 구축해놓은 자기존재의 의미가 다 무의미가 돼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끊게 되면 그 시간의 이어짐의 끊어짐이 처음 시간이 시작할 때와 시간이 끝날 때가 그 때 안에 같이 담겨져 있어요. 끝과 시작이. 때 안에 우주의 시작과 우주의 끝이 담겨 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한다면 4절에 나오지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설명을 해줘요.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원래 사람이 태어날 때는 여자 혼자만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남자와 여자가 같이 동침을 해야 자식이 태어나기 마련입니다. 이건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상식적이어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알지요.

그런데 유난히도 4절에서, 여자에게서 태어난다는 말은, 남자를 강조하지 않고 여자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낼 때 처음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의식하고, 그 사건을 주목하고 그 사건의 취지를 역사 속에 침투해내기 위해서 여자에게서 태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남자 없이 여자만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었던 사건이에요. 남자가 먼저 따먹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그 선악과 따먹는 사건으로서 이 땅에 뭐가 왔느냐 하면,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약속대로 봇물 터지듯이 죽음이 확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그 때부터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고 살아도 죽음 안에서 살아 있다. 그냥 죽은 거지요. 죽음 안에 갇혀 있는 살아있음이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이집트의 미이라같은 존재에요. 관속에 있는 꼼지락거리는 인간. 그런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한 그 사건 안에 갇혀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를 증명하고 그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이 땅의 시간 속에서 계속 줄기차게 출생하고, 출생하고, 출생한 거예요.

생일축하 합니다, 이렇게 계속 태어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선악과원칙을 하나님 쪽에서 취소하거나 포기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용도로서, 그걸 보여주는 용도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게 때가 차매 아들이 오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그런 아이디어를 전혀 생각지도 못하지요.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지만 살 때까지 한 번 열심히 살아보자. 그 식으로 죽 가는 겁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갑자기 율법이 등장한다고요. 여자 아래 난 것이 어떻게 율법 아래 난 것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은 문장을 그냥 연결시켜 버렸어요. 이미 3장에서 충실히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율법아래 있다는 것은 곧 저주아래 있는 것이라고 3장 10절에서 12절까지 이야기했거든요.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율법 아래 태어난 것은 저주를 찾아서 오신 거예요. 저주받는 인간 세상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은 그냥 저주받고 늙어죽는 것이 아니고 율법 때문에 인간은 저주받고, 심판받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늙어죽고 마지막에 지옥 간다는 그 저주의 실효성, 저주가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라는 그 사건, 첫 번째 사건을 끌고 인간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음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그 시작이 곧 끝이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현재는 시작을 보여주는 현재요,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 5월 6일 11시 몇 분의 지금은 마지막을 보여주는 현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서로서로를 만나면 시작은 이렇게 했다가 이렇게 끝납니다, 를 서로 소통하는 식의 인간대 인간의 만남이라는 그 말입니다. “요새 나이가 들었는지 어깨가 아파.” 그게 바로 시작과 끝을 자기 아는 범위 내에서 표현한 거예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도덕적 탁월성을 보여줘도 오십견을 어떻게 이깁니까? 착하면 오십견 안 걸립니까? 우리가 시도하는 것은 시도하는 것이고 주님이 일은 일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시도하는 것이 주님의 일에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한다고 우리 인생이 달라지지 않아요. 헌금한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우리 인생이 달라지지 않아요.

예수 믿으면 “처분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나와야지. 왜 자기가 사적인 자기소망을 거기에 심어 넣습니까? 경상도 말로 “지가 뭔데?” 표준말로 “네가 뭔데?” 예수님 그 아들이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율법 아래 태어났다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그 뒤 5절에 나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면, 그러면 아들이 되기 전 그들의 신분이 뭐였느냐 하는 겁니다. 4장 3절에 보면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노릇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제 말은 뭐냐 하면, 이래도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저래도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본인이 혼자 있기 때문에 자기 미래의 ‘되고 안 되고’가 자기 결정에 의해서 된다는 그 혼자 있다는 의식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이방인들이고 옛날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혼자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언약이 있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에 살게 했지요.

애굽에 살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신분은 종이었습니다. 노예였습니다. “거 봐. 노예잖아.” 문제는 노예생활 하고 있는 그들을 가지고 자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그들을 노예 삼는 애굽은 아들이 아니에요. 어쨌든 간에 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람들의 노예가 되었지요. 그리고 그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오고 난 뒤에는 광야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광야길에서 인간은 자연의 노예에요. 그래서 물 없이는 못살고 떡 없이는 못삽니다. 자연의 노예에요. 사람의 노예든 자연의 노예든 인간은 어쨌든 간에 노예입니다. 그 광야에서 주께서 어디로 인도하는가? 시내산으로 인도합니다. 시내산으로 인도하게 되면 모세가 거기서 율법을 받게 되지요.

그러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율법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율법의 노예라는 것은 법,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선악과가 심겨진 에덴동산에서 살 때부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의 저촉을 받게 되어 있고 거기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존재로 인간은 태어난 거예요.

무슨 말이냐?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선악과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생명나무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은 태어난 거예요. 인간을 위한 하나님, 인간을 위한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자기 맘대로 살지요. 그것은 근본을 잃어서 그래요. 근본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권세에 들볶이고 살고, 국가라는 힘의 권세의 노예로 살게 하고, 그 다음에 자연의 노예로 살게 하는 그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줘서 율법의 노예의 티를 내게 하시는가?

그것은 율법을 투입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이 어디에 등장하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있다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이 땅에 오면서 거기서 발생된 관계가 율법관계라는 겁니다. 율법은 저주 때문에 생긴 거라는 거예요.

아들이 어느 나라에 가야 되는데 어느 나라에 가느냐 하면, 이 세상나라에 와요. 아들이 이 세상나라에 가면서 이 세상나라에서 자기 아들로서 부여받을 때 아들이 지니고 있는 아들 됨의 취지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아들사이에 형성된 율법관계가 연이어서 아들을 따라서 같이 둘둘 감아서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지금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 말은 예수님마저 율법 따라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결과대로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함유된, 포함된 그 세상은 예수님만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율법의 저주받은 상태가 유일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걸 예수님오심으로서 알게 되지 예수님 모르고서는 그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껏 착실하게 살았는데 왜 내가 몸이 아프지?’ 맨 날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난 남에게 해코지 한 적도 없는데 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서글프지?’ 지금 인간이 내 인생 서글프다는데 주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맨 날 몸 아파서 교회도 못나오고.’

자기 몸이 아픈데 주목하지 말고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취지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사람에게서 난 게 아니에요. 인간의 철학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 이 사태, 이 현실의 내막, 그것을 계속 알리기 위한 취지로서 내 몸 아픈데 신경 쓰지 말고, 남북회담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도바울 안목에서 볼 때는. 미이라처럼 갇혀 있는데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오신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이 율법을 왜 가져왔는가? 원래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상호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되어 있는 것도 모르고 선악과 따먹고 따먹은 상태에서 영생나무 따먹으려고 시도한 겁니다.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했지요. 왜냐하면 선악과 열매가 계속 성취되는 한에서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된다는 겁니다. 생명나무의 취지를 그동안 몰랐는데 생명나무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서로 연결돼요. 연결된 채 예수님이 이 땅에 생명으로 오신 겁니다.

오셔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 거예요. 예수님처럼 코스 밟지 아니하면 그것은 생명나무열매는 구경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둘 다 해결하시는 거예요. 둘 다 완성을 시키는 겁니다.

이걸 설명하는데 비누가지고 설명하는 게 제일 좋아요. 비누를 가지고 계면활성체라고 해요. 계면이라는 말은 액체와 고체, 고체와 기체, 액체와 액체 사이의 서로 성질 다른 두 면사이의 접합을 계면(界面)이라 합니다. 계면활성체. 면이 접촉이 되고 난 뒤에는 그 면에서 활동을 일으키는, 어떤 성질을 발휘하는 물질이 생깁니다.

비누의 화학구조를 보면 중보자도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몸은 하나인데 기능이 서로 달라요. 하나는 친수성(親水性, Hydrophile)이라 해서 물에 친한 요소가 있고, 소수성(疏水性, Hydrophobe), 물을 아주 싫어하는 요소가 비누 안에 둘 다 들어 있어요.

인간 몸의 때라 하는 것은 각질과 먼지가 결합되어서 새까맣거든요. 기름때가 묻어 있는 그것과 친한 요소가 있고 물과 친한 요소가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중보자적 기능이에요. 죄와 접합하는 요소가 있고 죄에 접해서 하늘나라로 당겨서 올라가는 요소의 비누 같은 기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소수성이라 해서 물을 싫어한다는 영어번역은 아주 적절한 거예요. 그걸 두고 친유성, 기름을 좋아한다고 하면 안돼요. 싫어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싫어하는 자로부터 싫어함을 받도록 오신 거예요. 사람을 꾀어서 챙겨가지고 구원해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자는 싫어하도록 해서 배제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복음만 전해야 돼요. 지금 사도바울이 사람들 모아서 구원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불신자는 철저하게 배제해야 돼요. 불신자를 자꾸 거두려고 하면 안돼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위반되고 종교라는 이름의 교회를 통해서 하는 목회와 선교라는 잘못된 짓입니다. 그것은 마귀 짓이에요.

불신자를 소수성, 친수성으로 해서 복음을 싫어하면 나가도록 해줘야 돼요. 그런 용기도 없이 무슨 목회를 합니까? 교회에 사람 모아서 계모임할 거예요? 오락단체 만들 겁니까? 그렇게 해서 뭐할 겁니까?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주의 종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사도바울은 교회 만들려고 온 게 아니에요.

교회는 이미 있어요. “보자, 누가 교회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자기교회 만드는 게 아니에요. 누가 교회인가 보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돈 있으면 교회 되고 돈 없으면 교회 안 된다고요.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돈 있으면 가정도 유지되고 돈 없으면 가정 깨져요. 뻔한 거 아닙니까? 하여튼 교회에 돈이 있는 게 문제에요.

위에서 끌어올리는 그 대목이 열왕기하 2장 9절에서 11절에 나옵니다. 엘리야 이야기인데요. 엘리야가 떠납니다. 엘리야가 떠날 때 엘리사가 바짝 붙어 있어요. 엘리야가 이런 표현을 했는데요. 9절에 보면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하니까 엘리야가 하는 말이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이라는 거예요.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에요. 죽이는 게 아닙니다. 엘리야를 위에서 데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11절에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고 난 뒤에 승천하셨어요. 승천했다는 말은 엘리사와 엘리야의 관계에 의하면 그 승천할 때 갑절의 능력이 승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승천하게 된 취지가 이 땅에 본격적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엘리야의 능력이 갑절이나 엘리사에게 전달된 겁니다.

승천이 그 의미에요. 그런데 엘리야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이 죽은 줄로만 알고 시체를 찾는데 시체를 사흘 동안 찾아다녔지만 찾지를 못했어요. 엘리사가 이야기했어요. 안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의 그 다른 제자가 하는 말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 인간의 예상 속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야든 엘리사든 인간은 살다가 죽을 뿐이고 하나님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좋으라고, 우리가 살 때 사는 힘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상 못하는 다른 일이 우리한테 덮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우리가 예상 못한 것이 뭐냐? 우리는 시작을 모르고요, 우리는 끝을 모르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야 될 일이 뭐냐? 그 시작과 끝을 우리 인생 속에 심어버려요. 시작과 끝이 계속해서 우러나오는 그 상황을 반복해서 우리에게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이 지상에 오실 때의 그 능력이에요.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그 능력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시작과 끝을 보자 이 말입니다. 제 말이 어렵지 않아요. 시작과 끝이 뭐냐 하면, 나는 이래서 늙는다, 그 이야기하고, 그렇게 늙어가도 나는 생명나무 따먹었다, 그 이야기 하라는 말이지요.

나 이래서 늙는다, 하는 그것은 시작 이야기고, 그래도 나는 오늘 밤 죽어도 생명나무 따먹었다는 그것은 마지막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 마지막과 시작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반복되라고 하나님께서는 뭘 하느냐? 아들의 영을 보내신 거예요. 승천을 확보한 그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집어넣어진 거예요.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러면 그로 인하여 아들 아닌 자가 아들이 되는 겁니다. 아들 아닌 자가 아들이 되어버리면 졸지에 뭐가 떨어져 나가느냐 하면, 아들이 생겨버리면 아들로 인하여 갑자기 혼자 살던 사람들이 전부 다 율법의 저주의 종이 되어버려요.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나옵니다. 22절인데, 아브라함에게 두 여자가 있는데 한 여자는 종이고 한 여자는 본처라고 되어 있잖아요.

4장 26절에 보면 본처 정도가 아니고 ‘자유자’라고 되어 있어요. 자유 하는 여인. 자유 하는 여인이 등장했다는 말은 그 옆에 대조되는 여자는 자유하지 않는 여자, 종, 애굽의 종이든, 자연의 종이든, 율법이 종이든 어쨌든 갇혀서 꼼짝도 못하고 저주받아야 될 사람, 그게 바로 불신자입니다.

어떻게 종하고 자유자가 함께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불신자를 내쫒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그 말이지요. 어떻게? 자유자가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고 발설하는 그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친구, 20년 친구, 50년 친구가 갑자기 종이 되어서 삐져서 도망간다니까요.

소수성(疏水性)이에요, 소수성. 복음을 싫어해요. 물을 싫어하듯이. 소수성, 거부하는 거예요. “40년 동안 너하고 이야기가 통했는데 요새 이상하게 네가 좀 변했다. 너하고 내가 왜 대화가 안 되노.” “그럼 니는 어떻게 보는데?” “인간은 누구의 종이 아니야. 우리는 선택권, 결정권이 있어. 예수 믿어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서 예수 믿고 세상사는 것도 그런 거야. 인생은 내가 하기 나름이야.”

이런 식으로 옆의 친구가 이야기해 오는 거예요. 전에 성령 받기 전까지는 충분히 납득했지요. “우리 교회는 아무개 장로님이 희생적으로 헌신을 해서 땅 바쳐서 주의 은혜로 이렇게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얼마든지 납득이 되지요.

‘아, 헌금 안하면 교회 안 되는구나. 역시 훌륭한 목사님이 안계시면 교회 안 되는구나. 그 결과체로 이렇게 괜찮은 교회 되었구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왔다. 옆에 있던 40년 지기의 같은 교회집사, 장로, 친구에게 하는 말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그게 네가 누구의 종이라는 뜻이에요.

바리새인인은 악마의 종이거든요.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들이 법을 앞세우게 되면 법에 의해서 위계가 생깁니다. 계층이 생겨요. 우열이 생긴다고요, 우열이. 더 도덕적인 사람과 덜 도덕적인 사람사이에 계층이 생겨버려요. 종과 종 사이에 리그전이 벌어지고 토너먼트가 발생된다니까요.

목사 입장에서 교회 목회라는 것이 뭐냐? 목회는 교인들끼리 토너먼트 붙이는 거예요. 경쟁붙이는 겁니다. 아주 쉬워요. 누구 하나 감사헌금 올려놓으면요. 우리 교회 감사헌금 안 올라온 지 벌써 20년 넘었다만. 감사헌금 올려놓으면 “보세요. 어떤 분은 머리 아픈데도 이렇게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아, 목사님이 저 분 위에서 기도하는 것 보니까 목사님 입장에서 저게 칭찬받을 일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하얀 봉투에 써서 낼 근거가 없을까?’ 모든 것이 리그전이고 토너먼트라니까요. 결승전, 준결승전, 예선탈락, 전부 다 그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결과가 뭐냐? 나 잘났다 아닙니까? 나 잘났다.

거기에 말려드는 이유가 뭐냐? 내 미래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종의 발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유가 아니에요. 나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과 악의 갈등구조에서 벗어남이 아니에요. 나 자신의 행함과 나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예상 못한 거니까. 아들 됨을 칼로 쪼개보면 어쩔 수 없음이 들어 있어요. 시작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우리 조상이 범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영생 얻은 것을 내 힘으로 바꿀 수 없고 나는 어쩔 수가 없어. 어쩔 수가 없이 나는 천국 가야 돼, 라는 그 어쩔 수 없음이 나와야 돼요.

그렇게 나오게 되면 졸지에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는 그 50년 지기 동료가 지금 악마의 종이라는 것이 눈에 보일 거예요. 마귀의 종이라는 것이. 자기가 생각한 선과 악의 지식이 문제였던 거예요. 선과 악, 선과 악, 그 내부적 갈등, 천사냐 악마냐, 천사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악마의 말을 들을 것이냐? 맨 날 행동해놓고 이것이 천사의 일일까, 악마의 일일까?

거기에 시달리면서 내놓을 것은 자기 자신의 잘난 것밖에 증언할 수 없고 증거 할 수밖에 없는, 주의 증인이 아닌 자기 잘남의 증인, 자기 목회 잘한 증인, 기도 잘하는 증인, 헌금 많이 하는 증인, 오직 자기 잘남의 증거에서 인간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뭘 할까요,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걸려들 것은 보이스피싱 밖에 없어요.

아까 예배 전에 어떤 분이 이야기했어요. 박 근혜 줄 잘 섰다고 좋아했는데 지금 박 근혜 줄 선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고. 인간은 결국 미래를 미리 모르면 감을 잡아요. 찐득찐득하게. 많은 숫자가 모인 교회가 진리에 가깝다는 식으로 자꾸 감을 잡아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선택입니다. 소용없어요. 마지막은 이미 사도바울의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끝났어요. 백날 인간 속에서, 시간 속에서 해봐야 때가 되매 침투해 버리면 모든 시간은 의미가 없고 중지가 돼버려요. 동결돼 버려요. 얼음땡이에요. 시작과 끝, 세월이 수천 년 흘러도 천년이 하루 같아요.

더 진척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승천했다면 우리는 엘리사입니다. 주님이 엘리야라면 우리는 엘리사에요. 따라서 우리 안의 능력은 시작은 이러했고 끝도 이미 났어, 그 끝남에서 오는 자유함, 그게 바로 아들입니다. 스스로 아들 되려고 하지 마세요. 아들 되게 하시기 때문에 동시에 우리 곁에는 세상 사람들이 저주의 율법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든 종교가 악마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을 누군지도 모르고, 주인도 모르고, 스스로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선악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착하게 하면 봐주는지 알았고 주의 일을 하면 인생 편한지 알았는데 그게 바로 사기였다는 사실을 저희가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 박하사탕처럼 퍼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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