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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8 12:44:13 조회 : 507         
   사단의 가시 17100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사단의 가시(고린도후서 12:7-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N678YA-9Vk, Hit:50
 이근호 17-10-08 13:28 
사단의 가시 

2017년 10월 8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2:7-10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고 볼 때에, 인간이 설치는 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수가 됨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싸웠던 대상, 즉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 특정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성향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잘 되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은 다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사도가 주님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도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삼층천을 보여주신 것은 사도의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단의 사자’도 사도 바울이 본인이 원한 바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완벽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완벽해야 복음이 전해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사도를 모방대상으로 삼지 마세요. 이러한 의식 배후에는, ‘나도 구원받아야지’라는 욕심이 깔려 있습니다. 주님의 천국은 죽음의 설정함을 통해서만 성립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식처럼 그냥 숨 끊어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온갖 중요한 성경 개념들을 집결시킵니다. ‘자손’, ‘사단’, ‘종’, ‘세력’ 같은 개념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 개념들이 실제 상황인 이유는, 바로 인간에게는 은연 중에 ‘무서움’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무서움‘이라는 사소한 감정을 통해서 세상 배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진실된 상황들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평소에 두려움과 무서움에 시달리는 것이 사단에게 얶매여 있기 때문이며 이런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상식에서 알고 있는 ‘죽음’이라는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죽음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층천에 나와 있듯이 인간이 자기 자아에 대해서 무심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 생긴 그 상황에 감탄하고 반하고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렇다면 자아의 존재의미나, 활약상이나, 고통이나 행동 같은 것도 완전히 무시당하는 세계가 영생의 나라입니다.

이 영생을 드러내는데 있어 주님께서는 이 나라를 다녀 온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을 심어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자기 육신이 아프고, 자기가 관련된 사람들이 불행해졌다고 여길 때에 사단이 제공한 무서움이 재발하는 겁니다.

육과 영의 그 경계선을 다 경험케 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이란 성도 자아의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육과 영의 경계선에서 방출되는 복음의 새삼스러운 위력으로 전해지는 겁니다. 즉 “나는 여전히 사단에게 속아 죽기를 무서워하는 육적인 죄인입니다”는 고백과 더불어 ‘예수님의 일방적 용서’라는 복음은 시원하게 외부로 용출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요구한 대로 ‘육체의 가시’가 뽑혀야 복음 전파가 원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박혀 있는 바가 ‘복음 전파’의 해결책인 겁니다. 인간들이 ‘잘 풀리게 해주시는 주님’을 원합니다. 이는 사도가 싸웠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잘 풀리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파괴시켜버립니다. 주님은 우리를 무장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무장 해제시키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능력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있는 능력도 빼앗아버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쑥하게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 상처 투성이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세 번씩이 요청했던 그 요청은 묵살되므로서 ‘개인적 완성’이 복음의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따라서 사도나 성도나 모두 사단의 사자가 박혀있는 채 구원되어야 될 자들입니다. 일종의 원격조정되는 폭탄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이 생각을 하다가도 얼마 안가서 육의 생각으로 전환되게 됩니다.

사단의 가시가 있는 자가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가시가 없는 자가 지옥갑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인간 개인의 여망을 달성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행하신 업적을 전달하기 위한 용도로 주님으로부터 늘 다루어지는 존재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인식적으로 불연속적인 연쇄 사실’을 이어나갑니다.

마태복음 8:25-27에 보면,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라는 제자들의 관심사 전환을 눈 여겨봐야 합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 살 궁리에 급급했고 그것이 참 현실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가가 잔잔하고 난 뒤에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식으로 관심사가 예수님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모두 자율주행입니다. 사무엘상 6:12에 보면,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는 스스로 움직이십니다. 이처럼 어떠한 사람들의 재롱잔치도 도움에 필요치 않고 홀로 일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공간이나 현재라는 시간성조차 다 예수님의 증인노릇하라고 성도에게 주신 합당한 영생의 공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사도는 비록 사단의 가시가 있더라도 늘 삼층천에 살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7-10-09 11:32 
258강-고후 12장 7-9절(사단의 가시)17010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지난 시간에 삼층천 이야기 했습니다. 자기가 하늘나라 갔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 둘 여지도 없이 그 상황 자체가 자기를 자아를 완전히 함몰시켜 버렸어요. 주어진 삼층천의 영광 속에서 따로 자신이 뭘 행했고 뭘 어떻게 수고했고, 그런 것을 따로 챙길 필요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고 그런데 관심조차도 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속적인 건데요, 그 놀라운 천국을 바라봤으니까 사람인지라 하나님께서 또 얼마나 자만할까 싶어서 이번에는 정반대로 자신의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육체에 고통이 있다는 겁니다.

고통이 있으니까 이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요. 아프니까요. 아픈 것을 잊는다고 해서 안 아픈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아픈데 남이 아픈 것을 대신할 수 없고, 내 아픈 것을 남이 가져갈 수 없고, 그래서 이것을 빼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이런 사도바울의 고백에 대해서, 요즘 좀 배웠다는 사람들, 특히 신학자들, 신학교수들, 지성이 있고 이성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은 어떤 분노를 갖게 됩니다. 어떤 분노냐 하면, 나는 예수 믿으려고 했지 사도바울 믿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라는 핑계를 대면서, “사도바울처럼 삼층천, 천국에 올라가야 구원받느냐?”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문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사단의 가시가 없으면 지옥 가는 사람이냐?”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걸게 됩니다. 사도바울에게 시비 거는 사람은 평신도는 잘 없는데 소위 신학자들이나 신학교수들 중에 굉장히 많아요. 자기 믿음 없는 것이 티 날까 싶어서 억지로 억누르는 겁니다.

“나는 예수 믿지 사도바울의 경우는 개인적 체험으로만 간주하겠다. 이것은 예수님의 계시로 인정 못하겠다. 너는 너대로 구원받고 나는 나대로 구원받아야지 사도바울의 그것은 사적인 견해로 간주해서 나는 안들은 것으로 할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목사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의 주장은 뭐냐 하면, 삼층천 안 보면 지옥 가느냐, 사단의 가시 없으면 지옥 가느냐, 그러면 교인 수 다 줄고 얼마 남지 못하게 되니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 라는 여기에 잔뜩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의 이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버리면 “목사님, 죄송합니다. 나는 삼층천에 못 올라갔으니까 안 되겠네요. 이러나저러나 교회 와도 실패할 것 이 학원에 못 다니겠습니다. 다른 여행사 가볼까……” 이런 식으로 가버리면 괜히 고린도후서 12장을 이야기했어, 라는 자책을 하는 거예요.

사단의 가시가 있다고 되어 있으니까 “목사님, 저는 예수 믿었는데 편안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디 몸 한 군데 아픈 데도 없고, 늙어도 얼마나 곱게 늙는지. 나는 사단의 가시라는 것을 못 느끼니까, 지금 사도바울의 고백하고 나하고 안 맞으니까 사도바울의 경험을 개인적 견해로 보고 나는 예수나 믿으렵니다.” 이렇게 해서 의도적으로 이 하나님의 계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밀어내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지난시간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귀신이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앞장세워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활발하게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활동하고 있는 중이에요. 베드로도 인정했습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는 일반적인 서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풀어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성령도 없이 천당 가려고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 그 말이에요. 성령 없이 교회는 노닥거리는 장소에요. 멤버십 가지고 친목단체 만들어서 그냥 돈 몇 푼 내고 운영비 충당하고 밥이나 먹고 놀러나 다니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교회 키우는 그것이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고 이유인 사람들, 몸에 가시 없거든 다 나가라 그 말이지요.

몸에 사단의 가시 없는 사람들은 성도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몸에 가시가 없는 게 성도 아닌 이유가 가시 안에 인간의 자아가 들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단의 자아에서 사단 빼버리세요. 그냥 가시인데 그 가시는 주님이 볼 때 우리는 가시 같은 존재에요. 이미 그리스도 몸이 된 이 상태에서 우리의 옛 몸이 가시처럼 박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빼면 안돼요. 제거대상이 아니에요.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목에 걸린 계륵 같아요. 토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이것은 일종의 재갈인데요. 소에다 재갈을 물려야 “이랴!” 하면 아파서 가잖아요. 그것도 원격조정으로. 정말 성령이 임한 성도는 속에 폭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폭탄, 우리가 육적인 생각 할 때마다 폭탄 터트려 버립니다. 위에서 스위치 눌러버려요. 성령 주고 바로 데려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기도에 의하면 이미 주께서 자기제자 삼으시고 데려가지를 않아요. 이것은 그들이 예뻐서 안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못난 놈 앞장세워서 예수님의 그 복음을 전파하는 용도로 계속 활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우리 좋으라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자기 속에 사단의 가시가 있다고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는데요. 악착같이 기도 한 거지요. 응답 안 되고, 응답 안 되고, 응답 안 되고. 결국 응답 안 되었어요. 주님 응답은 질책성 응답입니다. 질책성 응답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내가 보는 너와 사도 네가 보는 예수가 뭔가 틀어져 있어요. 견해가 안 맞아요. 견해가 안 맞으니 인간들은 기도를 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을 자랑질 하지 마세요. 지금 견해가 안 맞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이 세상과 주님, 그리고 나에 관한 모든 것, 내가 지금까지 구성해놓은 세계관과 삐걱거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한 번 조정해 보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닌데 어쨌든 간에 이게 불합치지요. 기도는 자기의 솔직한 것을 이야기해야 돼요. “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후 예배 때 기도를 시키면 대부분 안한다고 하고, “기도할래요?” 하고 묻는 것조차 상스럽게 생각하는데요.

전에 안한다고 했으면 안하는 것이지 왜 자꾸 묻느냐고 하는데요. 공중기도를 할 때에 왜 공중기도를 하느냐? 기도가 생중계가 되잖아요. 생중계 되는 입장에서 평소에는 눈앞에 사람 없이 왜 못살았느냐, 이것을 묻는 겁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사람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님 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을 개무시하는 겁니다. 기도는 그렇게 해야 돼요. “주님, 저하고 이야기합시다.” 이게 기도잖아요. 평소에 살아갈 때 눈에 뵈는 것이 없어야 돼요. 그럴 때 제대로 기도가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기도하면서 ‘기도 끝난 뒤에 얼마나 뒷담 까겠나.’ 온갖 신경 다 쓰고 또 기도하면서 설교를 해서 ‘너 이거 모르지? 한 수 가르쳐줄게.’ 하는 식으로 해버리면 주님은 붕 뜨지 않습니까?

기도가 교회의 패키지 쇼의 순서맡은 거예요? 예배라는 무대의 쇼 순서 맡은 것이 아니잖아요. 기도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또 이 순간……, 이 순재 버전이 이거예요. “못난 놈!” 하잖아요. “또다시 이 순간 나를 못난 놈으로 노출 시켰습니다.” 하는 고백이 기도입니다.

사도 참 대단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운 사도기에 우리는 완벽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완전하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알려지는 사도를 못난 놈으로 공개선상에서 까발려버리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는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의견조정에 나서는 겁니다.

“제가 나쁜 짓 한 적이 없는데 가시가 왜 옵니까?” 하는 거예요. “앞으로 잘 하라는 용도로 가시를 주시는 겁니까?” 그런데 여기에 육체의 가시로 되어 있지만 그 뒤에 풀이하는 7절에 보면 ‘사단의 사자’라고 이야기해요. 사단이라는 심부름꾼을 보냈다는 그 말입니다. 내 몸에 사단 들어왔다 그 말이에요. 메신저가 들어 왔다는 그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의 구원받은 인간이라는 그것을 완전히 부숴버립니다. 나는 이제 사탄과는 상관없다. 이제 나는 주님과 동행하면 되고 교제하면 된다고 아는 것이 우리 일반적인 상식인데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고 사단이 상주해야 된다는 거예요. 삽입되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단이 삽입되어 있어 줘야 그게 네 구원 때문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활동성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네가 소모되고 쓰인다는 것이 그 때 그 때마다 증거 되는 겁니다. 만약 사단이 우리에게 없어버리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남에게 자랑질 하면서 증언할 거예요.

그런데 사단이 우리 속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나는 이미 용도가 폐기된 거예요. 나 인생 이렇게 살래, 하는 모든 것이 폐기처분 되고 그러한 시체에 불과한 것을 주께서는 들어 쓰셔서 이제는 네가 너를 증거 하는 용도는 폐기되었지만 주님이 너에게 어떤 짓을 했는가를 증거 하는 용도는 죽을 때까지 네 속에 있는 사단과 함께 계속 가야 되는 겁니다.

도대체 관심사나 사는 이유를 엉뚱한데다 꽂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지난 시간에 본 삼층천, 본인이 보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까?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 있는 사단의 가시, 자기가 원했습니까? 자기가 요구했습니까? “저에게 장미가시 좀 팍팍 뿌려주옵소서.” 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일방적으로 집어넣는 증거가 뭐냐? 빼달라고 기도했잖아요. 내가 원치 않았잖아요. “주님, 이것은 내가 원치 않는 상황입니다. 나 힘들어요. 빼주세요.” 사도바울의 생각은 뭐냐? 힘드니까 그래서 복음 전파하는데 방해되니까 힘 안 들게 해주는 것이 복음 전파에 훨씬 더 유리합니다, 라고 한 거예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너에게 사단의 가시가 있는 그것이 해결책이야.” 그게 해결책이에요. 육체의 고통이 있는 것이 해결책의 종결이에요. 아프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프니까 빼달라고 한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복음을 알고 기뻐했는데 교회 다니는데 참 힘들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보기에 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이기에 서로서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자기가 바라는 교회의 이상성, 반갑고 기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복음을 알고서 복음은 기쁜데, 막상 교회 와서 집사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나 무식하고 너무나 상식 없는, 무례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볼 때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점심을 해 왔는데 “이것도 점심이라고 해왔나?”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은 기쁜데 막상 교회 생활하기가 너무 괴롭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해줬지요. “그것은 욕하라는 타이밍입니다.” 저쪽에서 저렇게 심하게 나왔으면 내 쪽에서도 욕을 퍼부어야 될 그 타이밍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못했어요?

못한 이유가 뭐냐? 나는 평생 점잖으니까. 나는 평생 체면과 위신과 명예를 붙들고 살았으니까. 말로는 안했지만 시체한테는 그것도 욕심이에요. 복음 안다는 것, 이게 말이 됩니까? 이 말은 주님의 복음을 내 것으로 끌어당기겠다는 것,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만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주님은 반대입니다. 네가 복음을 끌어당기지 말고 네가 예수를 끌어당기지 말고 복음이 너를 끌어당기고 있는 거예요. 복음이 나를 끌어당길 때 우리는 그동안 마지막 사수하고 지키고 싶었던 것, 체면, 위신, 명예, 내 입에서는 욕 한 번 안나오는 그 고상한 세월, 그 50년 세월 그거 다 파괴됩니다.

복음은 뭐냐? 너 같은 인간도 내가 피 흘려서 건져냈다는 그 사실만 더욱 더 분명하게 외부로 방출될 거예요. 지난 시간 본문부터 계속 사도바울이 가짜 복음, 가짜 예수, 가짜성령과 싸우거든요.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가짜 성령, 가짜 예수, 가짜 복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이야기했잖아요.

그 이야기 할 때 우리가 보면서도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와는 상관없고 저 무식한 고린도교회 이야기, 그것은 남의 이야기지 설마 우리교회나 우리자신에게는 해당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복음을 자꾸 자기 쪽으로 가져오겠다는 그런 심보를 못 버렸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나는 건전한 것, 괜찮은 것 뽑아서 내 자신을 더욱더 개선하고 격을 높이는데, 클래스를 높이는데 이 교회 와서 필요한 것을 다 수집하겠다는 이런 심보로 교회 와서 앉아 있는 거예요. 결국 그거 해 봐야 나 잘났다는 것을 증거 하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에요.

나한테 유익이 되고 이익이다 싶으면 내가 행동에 나서는 것, 그것을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라 했지요. 철학에서 나온 거예요. 이익이 되면 그게 진리라는 것. 존 듀이도 마찬가지에요. 이익이 진리라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 행동이 그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 있다는 이것은 진짜 예수, 진짜 복음, 진짜 성령은 내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도리어 진짜 주님에 의해서 내가 깨어지면서 거기서 방출되는 것이 뭐냐?

“주여, 나는 다른 예수 섬겼습니다. 나는 다른 복음 내 소유로 만들었고 다른 성령을 원했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 잘되기 위해서, 나 천당 가기 위해서, 나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예수를 뽑고, 복음과 성령을 받아들였는데 이게 나중에 보니 내가 원했다는 이유 때문에 전부 다 진짜 복음, 진짜 예수, 진짜 성령이 아닌 가짜였습니다.”라는 고백.

그 고백 때문에 우리는 사탄의 가시 같은 용도로서 우리 자신이,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의 몸인 우리 몸에 같이 합치해서 날마다 복음이냐를 확인해주는 용도로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유병언을 두고 구원파라 하는데 딱 깨놓고 구원파 아닌 인간 어디 있어요? 뭐 때문에 교회 옵니까? 구원받으려고 오잖아요. 구원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미 구원에 대해서 욕심을 낸다는 자체가, 방식이 개혁주의든 정통신학이든 그것은 문제 되지도 않아요. 요령부리기에 불과한 겁니다. 꼼수 쓰기에 불과한 거예요.

제자들에게 구원을 포기하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으면 제자들은 사도가 될 수 없어요. 제가 사도와 제자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지요. 제자의 역할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겁니다. 예수님 배반한 사람이 열 두 명중 한명이 아니에요. 열두 명 다를 가룟유다가 대표해서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배반 없는 예수 믿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배반이 있고 배반이 있는 가운데서 구원받는 자가 나옵니다. 저주 버리고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모든 인간이 죄 안에, 저주가운데 있을 때만, 죄 아래 있을 때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의미 있게 우리에게 인식되는 겁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죄 아래 있는데 죄 아래 있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유발하는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도록 주께서는 아예 우리 몸에 새로운 장치를 해놓은 거예요. 그게 뭐냐? 육신의 가시에요. “이러고는 못삽니다. 주여!” “너 구원받아놓고 불평하냐?” “불평하나 안하나 아픈 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도바울의 삼층천의 의미는 삼층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가시에서 그 의미가 완성이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삼층천이라는 그 천국, 천국이라는 그 말 속에는 온갖 것들이 집결되어 있어요. 구원개념, 천국개념, 모든 개념, 복음 개념, 자아 개념, 모든 것이 집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의 가시가, 구원받은, 성령 받은, 심지어 마귀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그 성령 받은 바울 속에 육체의 가시가 있다는 그 육체의 사단의 사자, 또는 육체의 가시 속에서 새로운 개념들이, 새로운 단어들이 집결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생명이나 죽음이나 모두 하나의 개념들로 구조화되어 있다, 하나의 짜임새, 골조처럼 갖춰져 있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집을 지을 때 골조를 짓잖아요. 골조만 있어도 여기는 아들 방, 여기는 침실, 여기는 거실, 이렇게 짓고 있는 중에도 윤곽이 나오지 않습니까? 생명이 뭐냐 할 때 모호해요. 그런데 생명은 구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어요.

건축처럼 설계도면으로 되어 있어요. 삼층천의 구조에서 보게 되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12장 2절에 보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자기 몸이라는 것이 천국이라는 구조 안에서는 별 의미 없는 존재가 됩니다. 나라는 것이 별 의미 없으면 성경 볼 때 나의 관점도 별 의미 없어요.

나의 관점이 별 의미 없다는 말은, 내가 지금 교회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목욕탕에 있으나 화장실에 있으나 내가 처해 있는 공간이나 내가 현재 몇 년 살았는지의 시간이나 이것이 복음 증거에서 별 의미 없어요. 내 관점, 내 의견, 내 주장, 내 목적은 천국에서는 히마리 없는 거예요. “저리 가! 치워, 치워! 사적의견은 필요 없어.” 이렇게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단의 가시가 오는 순간 갑자기 치워버린 그 천국의 구조에서 “내가 아파요”라는 그 나라는 것이 갑자기 돌출이 되고 부각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로 이것을 반복을 시켜요. “십자가 앞에서 이제 나는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다가 “아야! 누가 돌 던졌어?” 혹은 “누가 축구공 가지고 여기서 놀라고 했어?” 아야, 하는 순간 누가 아파요? 내가 아야, 하는 순간이 등장해요.

‘나는 복음만 있으면 죽어도 상관없어.’ 그런데 은행에서 전화가 왔는데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하면 “아이고, 통장에 만원밖에 없는데 어떻게 살지?” 은행에서 갑자기 전화가 오는 순간 “밥벌이도 없는데.” 하거든요. 치매환자가 이야기해요. “야야! 나 같은 인간은 그냥 늙어죽으면 되지. 밥 안 먹어도 된다.” 그러거든요.

그런데 다음에 가면 쌀 떨어졌다고, 쌀 떨어졌는데 돈 없어서 쌀도 못산다는 거예요. 어려운 말로 ‘인식론적불연속의 순환구조’라 합니다. 인식론적, 안다는 것이 딱딱 끊어져요. 불연속 되면서 그것이 연쇄 고리를 이룹니다. 감사했다가 불평했다가, 감사했다가 불평했다가, 반짝반짝하는 등불처럼, 등대의 불빛처럼.

은혜 받은 것이 얼마 가지도 않아요. 그런데 육에서 영으로, 영에서 육으로 늘 왔다 갔다 하는 그 경계선상에서 잠재되어 있는 복음의 능력이 새삼스럽게 바깥으로 용출되는 겁니다. 성도가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이 이렇게 증거 하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복음을 지식으로 정립해서, 자, 이것만 강의하듯이 풀면 풀 때 그 때마다 복음 나온다고? 아닙니다.

파키스탄이든 아프가니스탄이든 공간적 개념은 의미 없어요. 그 사람이 백수가 되든지 목사가 되든지 관계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든지, 어느 시대이든지, 북한이든 남한이든 관계없어요.

본인의 깜빡이는, 늘 깜빡깜빡 거리는 그 모습 속에서, 그 불연속의 틈 사이에서 “나 죄인 맞구나. 내가 복음 알아도 돌아서면 나 배고픈 것만 생각하고, 내가 아픈 것, 내 명예와 체면만 생각하는구나.” 등대의 등불처럼 깜빡이면서 계속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주여, 나 죄인입니다.”라고 나오면서 복음이 나와요. 이게 영생의 구조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런 식으로 활용이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분명히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보는 순간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라요. 왜 그런가 하면, 여기에 혈육이라는 개념 나오지요? 혈육이 두 번 나옵니다. 그 다음에 사망이라는 말, 사망의 세력이라는 말 나오지요? 마귀 나오지요. 그 다음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여기에 종 나오지요.

그 다음 16절에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사망이라는 것이 심장박동이 멈추는 것, 숨 끊어지는 것을 사망,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사망이라 하는데 성경에서는 사망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골조,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자녀 들어가야 되고, 혈육 들어가야 되고, 그 다음에 세력 들어가야 되고, 마귀 들어가야 되고, 무서워함이 들어가야 그게 사망이라는 개념이 구조적으로 형성이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죽는다는 것은 꽥 하고 죽는 것, 숨 끊어지는 것, 얼굴 싸늘해지는 것, 이게 사망인줄 아는데 성경에서는, 주님은 그걸 사망이라고 보지 않아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융합되어 있는 거예요. 결합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게 사망이라면 생명은 반대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는데 그 요소들은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요소들이 결합되어서 생명이라 하는 거예요. 장례식에서 설교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오해를 해요.

안 죽고 오래 사는 것이 생명인줄 알고 있습니다. 자꾸 상식적으로 생각하니까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생명을 주노니” 생명을 준다는 소리를 들어놓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해 버립니다. 나 저 사람 모른다고 베드로가 도망쳐 버렸어요. 뭔가 잘못 안 거예요. 내가 아는 예수하고 예수님이 아는 나하고 그 나가 달라요.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무장해 주기를 바라는데 주님은 우리를 무장해제해 버려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주시기를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다 가져가버리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말쑥하게 만들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주님이 우리에게 사탄을 안줄 것 같지만 사탄을 일부러 집어넣는 그런 주님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다른 주님을 원하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위주로 살기 때문이에요. 내 구원위주로 살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면 되는가, 무슨 신학체계가 필요한가, 그거 생각해서 그래요. 본인이 시체라는 상황을, 사망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내가 숨 쉬는데 왜?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니까 이게 육적이고 상식적이고 인간적이에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을 가지고 아직도 그것가지고 나는 예수를 안다, 십자가를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가 나오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무서워한다는 그것, 인간의 바깥으로 나오는 그 무서움이라는 세밀한 감정을 가지고 히브리서 저자는 그 안쪽에 사망이라는 것을 배치를 한 겁니다. 우리 외손녀가 부엌에서 거실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부엌 전등을 꺼버려요. 그러면 얼른 부엌에서 나옵니다.

어두움이 무섭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두움이 왜 무섭지요? 왜 귀신은 어두운데, 그것도 습기 찬데, 그런데서 나옵니까? 인형 목 돌아가는 것, 그걸 왜 어두운데, 지하실에 두느냐는 말이지요. 왜 무서워하느냐는 말이지요. 몰라요.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보면 그 내막, 그 이유가, 사단이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가 인간을 붙들고 있기에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이걸 누가, 어느 대학교수가 수용합니까? 숭실대 교수가 수용합니까? 서울대학 박사가 수용합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이걸 수용해요? 우리가 사탄에 매여 있다는 것, 그래서 무서워한다는 것. 북한의 김정은이 수용해요? 세월호 물에 빠진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부모들이 안타까워하지요.

그런데 왜 부모들이 무서워하느냐 하는 그 이유는 부모가 아는가요? 자기 딸 여중생의 친구를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가 죽여 버렸어요. 죽은 그 아이가 얼마나 무서워했겠는가? 그 사건을 대하고 경찰이 아무리 조사해도 인간은 왜 무서워하느냐의 이유를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미 사탄의 조정을 받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밥 먹고 살아야지’ 이거 빼놓고는 마귀가 다 잘라놓아서 다 모르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악마의 종이 되어서 ‘네가 죽으면 안 돼. 너 죽으면 안 돼.’ 계속 귀에다 속삭이는 겁니다.

‘죽으면 안 된다’ 계속해서 우리 맘속에 속삭이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 네가 번듯하게 살아있어야 되고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야 돼, 계속해서 우리에게 그걸 줍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5절은, 영생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영생은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그런 사탄을 너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깜빡깜빡 하라고. 인식론적 불연속성이에요. 안다 하는 것도 오래 못가요. 돌아서면 ‘아이고 무서워라.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죽으면 안 돼.’ 하다가 ‘아니야. 나는 이제 내가 산다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야. 주님을 증거 하는 그것이 내 존재이유지 내가 꼭 살아야 된다는 것이 존재 이유가 아니야.’ 또 깜빡 오지요.

깜빡 오는 사람은 천만다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게 안와서 문제지. 어떤 사람은 너무 길게 가요. 너무 길게. 자주 깜빡깜빡 해야 되는데. 육으로 가는 것은 후딱 가는데 육에서 영으로 돌아오는 데는 석 달 열흘 걸려요. 너무 길어요. 남자의 눈물인가.

사무엘상 6장 10절부터 보면 “그 사람들이 그 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언약궤가 소에 실려서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율주행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어떤 도움도, 어떤 기도도, 어떤 헌금도, 어떤 헌신도, 어떤 순종도 하나님에게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체기 때문에. 시체라는 말은 숨 끊어져서 시체가 아니라 사탄 속에 있는 상태를 사망이라 해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무서워하거든요. 무서워한다고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5장에 보면 헌금 속인 사람 있지요. 그 사람이 사도를 속였다는 말은 무섭다는 겁니다. 이거 다 날라 가버리면 우리는 뭐 먹고 사느냐, 그거에요. 그게 바로 성령을 속인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돈 다 내도 그 사람 죽었어요.

헌금 액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동네, 다시 말해서 영생의 골조에 있어서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임을 네가 왜 몰랐느냐 그 말이지요.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도 찾아오고 내 목적, 내 의미, ‘더 살아야 되겠다.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은 누가 키우나? 내가 죽으면 내 아내는 어떻게 밥 먹고 사나?’ 모든 걱정은 일단 내가 엄연히 아직도 나로서, 나의 가치로서 있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관점이 되고 하나의 시선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주님의 복음을 가로막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요청하는 것이 돼요. 그렇지 않은 인간은 없어요. 왜? 죽을 때까지 그런 요소가 우리의 육과 더불어, 함께 있어야 되니까.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 건드리지 말라고. 꼭 예수님 같아요.(요 20:7) 나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네 눈에 보기에 내가 너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이는가, 나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고. 십자가의 흔적이 뭐냐 하면,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내가 보기에 너희는 다 죽은 시체라는 겁니다.

죽은 뼈다귀에요, 뼉다구. 사도바울이 늘 그런 것도 아니에요. 사도바울도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제대로 정신 박힐 때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제정신 박힐 때 하는 소리가 뭐냐?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성경은 우리의 자리와 우리의 위치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놓여 있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한테 무엇이 필요한가가 아닙니다. 하나의 구조라니까요. 하나의 구조에 있어서 내가 나한테는 신경쓸 필요조차 없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 한 구석에 집어넣어 놔도 내가 참 어디 있지, 이렇게 찾지 말라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안 찾아도 돼요. 왜냐하면 찾는 것이 내 임무가 아니고 내가 여기 있으나 마나 하게 있는 것은 그로 인하여 하나의 영생구조가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펼쳐지게 하면, 그것이 주께서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주께서 기뻐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같이 감사해야 되고 기뻐해야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 27절을 설명하게 되면 이것이 분명해진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26절부터 읽어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고 하더라.”

이 대목에서 제자들이 하는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이분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생활고가 어렵다, 가정에 불이 났다, 애가 아프다 할 때 “주여, 우리 애 낫게 해주세요. 돈 주시옵소서.” 할 것이 아니라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어야 돼요.

나한테 어떤 이득을 기대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한테 중요한 인물이 돼버려요. 그러면 나는 뭐냐 하면, 사탄의 가시로서 사탄이 원하는 식으로 따라가는 것밖에 안됩니다. 삼층천에서 나는 존재가치도 없는데 갑자기 사탄의 가시가 와버리면 “주여, 이러시면 안 되지요.” 이렇게 돼버린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의 질책성 응답이 오잖아요. “너 지금 하는 일이 뭐야? 너 구원받는 거야, 아니면 나를 증거 하는 거야? 똑바로 해. 바른 예수, 바른 복음, 바른 성령 증거 하는 사도야, 아니면 지금 너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 네가 존재하는 이유야 뭐야?”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서 제자들이 풍랑 일기 전에는 ‘우리는 지금 바다 위를 가고 있다. 풍랑이 이는구나. 풍랑이 일고 배가 뒤집어지면 아 우리는 죽네. 죽으면 우리는 무섭다.’ 아까 히브리서에서 봤듯이 ‘우리가 죽는 것은 무서워. 안되지. 우리는 살아야 되겠지. 예수님 깨우자.’ 이게 주된 관심사였어요. 열 두 제자 몽땅 다 그랬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한 뒤에 관심사가 뭐냐?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우리와 같이 이 세상을 보내십니까?” 이런 뜻이에요. 현장성이에요. 그 현장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제자들이 할 때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거예요. 자아가 소멸되어버린 겁니다.

“아, 오늘 나 이익 봤어. 예수님 덕분에 살았어.” 이게 아니고 관심사가 자기 쪽에 있다가 갑자기 “누구세요? 주님 누구신데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까?” 묻는다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떻게 된다 하는 것은 없어지는 겁니다. 이게 깜빡깜빡 늘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랬던 제자들이 나중에,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불 쬐고 있다가 “당신도 저 예수와 한 패지.” 하니까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해서 또다시 자기 쪽으로 관심을 두잖아요. 제 말은 뭐냐 하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사탄이 시키는데서 나오는 고백일 뿐이에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우리를 가지고 주께서 영생의 골조를 어떻게 미리 펼치는가, 그것과 관련되어서 우리는 거기에 참여된 사람이지 우리가 손들고 구원받겠습니다, 해서 구원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 말이 맞는듯한데 그러면 교회에 그런 이야기를 해가지고 만약 성령세례 안 받은 사람이 그 교회 태반이라서 다 나가버린다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목사님 마누라만 남을 텐데요.” 마누라는 안 떠날 줄 알아요? 다 가버리지요.

“다 가면 몇 명 남습니까?”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나’라는 관심사에서 내가 속한 교회라는 관심사로 살짝 형태만 바꾸었을 뿐이지 여전히 나 관심사에서 안 떠나고 있어요. 또 “목사님, 그 말씀은 맞는 것 같은데, 나는 구원받았는데 내 딸은 구원 안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자기중심적관점이라 해요.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와 관련된 인물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계속해서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소유가 두려움을 유발시킵니다. 소유하는 곳에 반드시 일곱 귀신이 달라붙게 되어 있어요. 아주 귀신을 불러요. 굿을 해, 굿을. 무당 춤추는 것만 굿인 줄 알아요? 찬양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굿입니다.

예배해서, 굿을 해서 자기 관심사를 더욱 당도리하고 쥐려는 그것, 아직도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가시였습니다. 내가 나에게 가시였던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몸에 내가 하나의 폭탄처럼 결합되어 있다는 것, 이런 결합을 통해서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지 마시고 이로써 이 땅에 이미 하늘나라가 이런 상태로, 구조로 와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모든 걱정근심 배후에 악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부시키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육에 속한 존재가 주의 은혜로 가끔은, 가끔은 죽어도 좋다는 환희와 희열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도 주께서 합력해서 꼭 필요한 상태란 사실을 우리가 소급해서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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